해미

海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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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 순교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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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 순교 성지.


순교 사적지.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274-22 소재. 조선 시대 진영(鎭營)이 있던 군사적 요충지로, 중 죄인들을 처형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1799년부터 1868년까지 내포 지방에서 체포된 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해미와 천주교〕 조선 천주교회가 창설된 1784년 무 렵 입교한 여사울(현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출신의 이 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은 활발한 전교 활동을 벌여 내포 지방의 많은 사람들을 천주교에 입교시켰다. 그가 해미에서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는 구체적인 기록 은 없으나, 내포 지방 곳곳에 천주교를 전파하였고 인접 지역인 예산, 홍산 등의 지역에서도 활동하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해미 지역도 이존창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해미가 유명해진 것은 이곳이 1790년 대부터의 순교 사적지이기 때문이다. 1799년 4월 3일 해미 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한 홍주 출신 박취득(朴取得, 라우렌시오)을 시작으로 1800년 1월 9일에는 덕산 출 신 이보현(李步玄, 프란치스코)과 인언민(印彥敏, 마르 티노)이 매를 맞아 순교하였고, 1814년 12월 1일에는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金震 厚, 비오)가 10여 년의 옥중 생활 끝에 해미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그리고 1817년 덕산 배나다리에서 체포된 민 첨지(베드로), 안나, 송 첨지(요셉), 손연욱(요셉), 손여심 등이 해미에서 옥사하였고, 1839년에는 면천 양 대 출신인 전 베드로가 해미 진영에서 심문을 받다가 굶 주림과 장독(杖毒)으로 옥사하였다. 해미 지방에서 대규모의 박해가 발생한 것은 병인박해 (丙寅迫害, 1866~1873) 때로, 이 시기 해미에서 순교한 사람은 《치명일기》(致命日記) ,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 록》(丙寅迫害殉教者證言綠), 《공충도사학죄인성책》(公 忠道邪學罪人成冊) 등에서 그 성씨와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자만 117명에 달한다. 그러나 1868년 5~6월경 농바우 출신 26명이 살해되고 6월 22일과 7월 12일 해 미천 가에서 신자들이 생매장을 당하는 등 집단적인 학 살이 자행되었던 것으로 보아,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채 처형된 신자들이 무수히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지 조성 과정〕 해미 순교자들에 대한 조사는 1935 년 당시 서산(현 서산 동문동) 본당의 주임 신부였던 바로 (P. Barraux, 范) 신부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 그는 해 미의 이주필(李周弼)과 이병준(李秉俊), , 도장리의 박승 익(朴承益), 조산리의 임인필(任仁弼) 등의 증언에 따라 해미면 조산리 일대를 발굴하여 순교자들의 유해와 묵 주, 십자가 등을 수습하고 서산군 음양면 상홍리 공소(현 서산 동문동 본당 뒷산)에 안장하였다. 그리고 이를 기념하 여 국판 40면의 소책자인 《해미순교자약사》(海美殉教者 略史)를 간행하였다. 그 후 1955년 4월에 서산 본당의 신자들이 순교 기념비를 세웠으며, 1956년 3월에는 오 기선(吳基先, 요셉) 신부와 서산 본당의 신균식(申均植, 도미니코) 신부가 옛 해미 감옥터와 형구로 사용되었던 돌다리를 찾았다. 돌다리는 6월에 서산 본당으로 옮겨 보관되었다. 이어 1957년에는 해미 읍성 안에 공소 건 물을 마련하였고, 1962년에는 해미 읍성 안 옛 감옥이 었던 호야나무 옆의 순교 성지를 매입한 뒤 1966년에 공소 강당을 신축하였다. 그런 가운데 1975년 10월 대 전교구에서는 '순교복자 79위 시복 50주년' 을 기념하여 해미면 조산리에 순교 기념탑을 세우고 대전교구장 황민 성(黃旼性, 베드로) 주교의 집전으로 제막식을 거행하였 다. 이 기념탑 앞에 세운 화강석 제대는 흥선 대원군(興 宣大院君)의 부친인 남연군(南延君) 묘의 상석(床石)을 기증받아 다듬어 만든 것이다. 한편 정부에서는 사적지 보존을 위해 1973년 해미 읍 성을 사적 116호로 지정하고 읍성 일대의 복원 작업을 추진하여, 1981년 해미 공소 강당이 철거되었다. 이에 교회 측에서도 읍성 안팎의 순교 성지를 보존하기 위해 1982년 읍성 내 감옥터에 순교 기념비를 세웠고, 1984 년에는 순교자들의 생매장터를 매입하였으며 1985년 4 월에는 성지 관리를 위해 해미 본당을 설립하였다. 본당 에서는 6월부터 '해미 순교 선열 현양 협의회' 를 설치하 고 성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1986년 9월에는 서산 본당에 보관 중이던 돌다리를 원위치인 해미 진영 서문 밖으로 옮기고 1989년에는 돌다리 옆에 순교 현양비를 건립하였으며, 1995년 9월에는 옛 상홍리 공소에 안장 되었던 순교자들의 유해를 해미 성지로 이장하였다. 이와 함께 해미 순교 선열 현양 협의회에서는 순교 성 지 매입을 위한 전국적인 모금 운동을 전개하여 1998년 에는 해미 읍성 주위의 부지 약 7천 평을 확보할 수 있었 다. 그러나 해미 본당은 성지에서 떨어져 있어 순례객들 의 미사 봉헌과 성지 관리가 어려웠기에, 해미 본당의 안 상길(安相吉, 사도 요한) 신부는 성지 안에 성당을 짓기 로 결정하고 2000년 8월에 기공식을 거행하였으며 이듬 해 1월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하였다. 2003년 6월에 완 공된 무명 순교자 기념 성당은 200평 규모의 대성당과 50평 규모의 소성당을 갖추고 있으며, 성당 뒤쪽에 지름 15m의 대형 묘지 모양의 유해 참배실을 마련하여 순교 자들의 유해를 안장하였다. 2005년 현재 해미 성지는 솔뫼, 갈매못, 홍성 등과 함 께 충청남도가 추진하는 '내포 문화권 개발 사업' 대상 에 포함되어 향후 5년 동안 개발될 예정에 있다. ※ 참고문헌  해미 성지 홈페이지(www.haemi.or.kr)/ <가톨릭 시 보> 1974년 3월 3일자 · 1976년 3월 7일자/ <가톨릭신문> 1995년 9 월 10일자 · 1999년 7월 18일자 · 2005년 1월 23일자/ <평화신문> 2002년 9월 29일자 · 2003년 6월 8일자/ 《경향잡지》 815호(1935. 10. 12) . 822호(1936. 1. 31) · 1293호(1975. 12) · 1414호(1986. 1) · 1590호(2000. 9)/ 《교회와 역사》 104호(1984. 2) · 218호(1993. 7)/ 《瑞山 東門本堂 七十年史》, 瑞山 東門本堂 70年史 發刊委員會, 1987/ 吳基先, 《순교자들의 얼을 찾아서》, 韓國天主教聖地研究院, 1988/ 샤를르 달레,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 천주교회사》 상 · 중,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 1980/ 조광, <19세기 해미 지방 에서의 서학 신봉>, 《순교지와 순교 유물》, 한국 순교자 현양위원 회, 2003. 〔梁仁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