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주 본당
海州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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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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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정 사제관 앞의 신자들.
서울대교구 소속 침묵의 본당. 황해도 해주시 장춘동 299번지 소재. 1912년 9월 8일 청계동 본당 소속 공소 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다가 1949년 5월 폐쇄. 주보는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관할 구역은 해주시 전 지역과 벽성군 일부 지역. 〔교 세〕 1914년 716명 〔역대 신부〕 초대 빌렘(N.J.M. Wilhelm, 洪錫九) 요셉(1912. 9~1914.4), 2대 이순성(李順成) 안드레아(1926. 5~1928. 5), 3대 서기창(徐起昌) 프란치스코(1928. 5~1929. 5), 4대 구천 우(具天祐) 요셉(1929. 5~1931. 5), 5대 신성우(申聖雨) 마르코(1931. 5~1933. 5), 6대 양덕환(梁德煥) 안드레아 (1933. 5~1936. 5), 7대 방유룡(方有龍) 레오(1936. 5~1942. 2), 8대 안학만(安學滿) 루가(1942. 2~1944. 4), 9 대 김철규(金哲珪) 바르나바(1944. 5~1947. 9), 10대 한 윤승(韓允勝) 필립보(1948. 9~1949. 5). 〔전 사〕 황해도 해주 지역이 처음 교회 역사에 등장한 것은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가 선교사들의 해로 입국로 개척을 위해 백령도로 나갔다가 순위도(巡威島) 에서 체포되어 해주 감영으로 끌려간 1846년이다. 이후 해주 지역이 기록에 재등장하는 것은 1866년 병인박해 (丙寅迫害) 때로, 해주옥에서 순교한 17명의 신자들 중 해주 교우가 4명 포함되어 있었다. 해주 지역에 본격적으로 천주교가 전파된 것은 1890 년대 이후로 추정된다. 1896년 황해도 담임 선교사로 안악군 용문면 매화동에 정착한 빌렘 신부는 해주를 황 해도 전교의 중심지로 삼고자 하였으며, 해주로 진출하 기 전인 1898년 봄, 일단 신천군 청계동에 청계동 본당 을 설립하고 해주 읍내에 공소를 건설하기 위한 준비 작 업에 착수하였다. 이에 해주군 내 대아골, 먹방이, 염촌 등지에 우선 공소가 개설되었는데 대아골은 장연 본당의 파이야스(C.-C.-P. Pailhasse, 河敬朝) 신부가, 먹방이와 염 촌은 빌렘 신부가 관할하였다. 1899년 여름 해주 지역 예비 신자들의 방문 요청을 받은 빌렘 신부는 7월에 최 형규(崔炯奎, 시몬)를 공소 회장으로 임명하고 공소 개 설을 준비시켰다. 그 결과 그해 가을 해주 읍내에 공소가 설립되었고 당시 해주의 거부이자 열심한 신자이던 김영 석(金永錫, 아우구스티노)이 집 한 채를 제공하여 공소 강당으로 이용하였다. 이처럼 읍내에 공소가 개설되자 신자수도 매년 십수 명씩 증가하였다. 〔본당의 설정〕 이러한 신자수의 급격한 신장은 한편으 로 교회와 향촌 사회 간의 갈등을 불러와 1901년부터 1903년까지 황해도에서는 해서 교안(海西敎案)이 발발 하였다. 이 여파로 빌렘 신부는 서울로 소환되어 1903 년 2월부터 약 8개월 동안 청계동으로 돌아오지 못하였 다. 교안 이후 황해도 지역은 1904년의 러일 전쟁과 일 진회의 침투 등으로 전교 활동에 큰 어려움을 맞게 되어, 본당의 교세도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빌렘 신부는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를 암살한 안중근(安重根, 토마스)에게 성사 를 집행하기 위하여 1910년 3월 여순(旅順)을 방문하였 고, 이로 인해 정치적인 문제에 관여하였다는 이유로 뮈 텔(G.C.-M. Mutel, 閔德孝) 주교에 의해 2개월간의 성무 집행 정지 처분을 받았다. 결국 빌렘 신부는 1910년을 전후로 자신의 개인적 · 지역적인 문제를 고려하여, 공소 개설 이후 날로 교세가 발전하고 있던 해주로 진출하기 로 결정하였다. 또한 당시 해주 읍내에는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이 활발한 전교 활동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견제하고 천주교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서라도 본 당의 설정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1912년 9월 8일 해주 본당이 설정되고 초대 주임으로 빌렘 신부가 임명되었다. 빌렘 신부는 본당 설정과 함께 종 축성식을 거행하였으며, 공소 강당으로 쓰던 남욱정 (南旭町) 김영석의 초가집을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빌렘 신부는 장차 성당을 신축할 목적으로 남문 밖 남산 밑 서영정(西榮町, 장춘동) 299번지의 토지 1,300여 평 을 매입하였지만 건축 자금이 없어서 공사를 시작하지 못한 채 1914년 본국인 프랑스로 떠나게 되었다. 그 후 해주 본당은 신부가 파견되지 않아 장연 본당의 관할 공 소로 격하되었다. 장연 본당의 5대 주임 김명제(金命濟, 베드로) 신부는 1920년 해주 공소에 유치학교라는 이름 의 유치원을 설립하고 보통학교 진학 전의 어린이들을 모집하여 한글과 교리 등을 가르쳤다. 공소 청년 신자들 의 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지며 본당 승격을 위해 전 신 자들이 힘을 기울여, 해주 공소는 본당 폐지 13년 만인 1926년 5월 다시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이순성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남욱정에 거처하던 이 신부는 서영정의 교회 부지에 사제관을 짓고 이사하였다. 당시 평일 미사는 서영정, 주일 미사는 남욱정에서 했기에 매 우 번거로웠다. 이에 이 신부는 전교를 위해서라도 신속 히 성당을 신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하고 성당 건립 준비에 전력을 기울였으며 신자들의 신앙심을 돋우기 위 하여 주일마다 특별 강론을, 공소에서는 교리 강의를 하 였다. 그 결과 냉담자들이 다시 신앙을 찾게 되었으며 신 입 교우의 수도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본당 활성화 에 전력을 기울이던 이순성 신부는 끝내 성당 건축을 하 지 못한 채 1928년 5월 은율 본당으로 전임되었다. 3대 주임 서기창 신부는 부임 직후 소년 소녀회를 조직하고 이듬해 부인회를 조직하는 등 신심 단체 설립에 많은 노 력을 기울였다. 또한 그는 전임 이순성 신부가 이루지 못 한 성당 건축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를 위해 우선 서영정 사제관 뒤편을 증축하여 이를 성당으로 활용하고 남욱정 성당집은 완전히 폐쇄하였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벽돌 성당 건축 공사를 시작하여 성당 건축에 경험이 많은 중 국인들을 서울에서 불러와 고용하였다. 하지만 서 신부 는 1929년 5월 서울 백동(현 혜화동) 본당으로 전임되었 고, 성당과 사제관 공사는 1931년 5월 4대 주임 구천우 신부가 부임해서야 마무리될 수 있었다. 〔본당의 발전 및 폐쇄〕 5대 주임 신성우 신부는 본당 의 기반이 어느 정도 잡히자 본당 조직의 활성화를 위하 여 노력하였으며, 특히 프로테스탄트의 찬양대 활동에 자극을 받아 해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성가 대를 발족시켰다. 6대 주임 양덕환 신부는 당시 한국 교 회 신심 운동의 하나이던 가톨릭 소년단을 1934년 1월 결성하였으며, 2월 6일에는 황해도 감목 대리 김명제 신 부의 집전으로 신축 성당 봉헌 미사를 거행하였다. 그리 고 1936년에는 대대적인 성당 보수 공사를 진행하였고, <편신>(片信)이라는 제호로 주보를 발간하였다. 7대 주 임 방유룡 신부는 재임 중 성가대를 크게 발전시켰으며, 이 시기 많은 청년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청년회도 활성화되었다. 교세도 점차 확장되어 1937년에는 연안 본당이, 1939년에는 옹진 본당이 각각 분리되었다. 또 한 1920년 설립되었다가 폐지되었던 유치원이 1938년 다시 개원되어 해주 사회의 이목을 끌었다. 9대 주임 김철규 신부는 부임 이후 중단되었던 주일학 교를 다시 시작하였으며 발간이 중단되었던 주보도 재발 행하였다. 김 신부는 8 · 15 해방 이후 노동당 간부들로 부터 공산당에 입당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이를 거절하 고, 끈질지게 이어지는 회유를 견디다 못해 1946년 8월 월남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여 해주 형무소에 수감되었 다. 수감 중에도 노동당의 설득이 계속되자 그는 거짓으 로 협조할 것을 약속하고 42일 만에 석방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9월 낚시꾼으로 가장하고 38선 접경인 용당포 (龍塘浦)에서 배를 타고 월남하는 데 성공하였다. 김 신 부의 월남으로 주임 신부가 공석이 되자 인근 사리원 본 당의 박우철(朴遇哲, 바오로) 신부와 전덕표(全德杓, 안 드레아) 신부가 교대로 찾아와 미사를 집전하였다. 김철규 신부의 월남을 전후한 시기에는 신앙의 자유를 찾고자 월남을 시도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38선과 가까 운 해주는 월남자들이 보편적으로 거쳐가는 길목이었기 에 10대 주임 한윤승 신부는 월남을 시도하던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 일로 북한 당국의 철저한 감시를 받게 되었고, 결국에 는 공산주의자들이 꾸민 반공 삐라 사건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1949년 5월 20일 체포되었으며 해주 본당은 폐쇄되었다. 한 신부는 15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신의주 방면으로 끌려갔다는 풍문이 있다. (→ 빌렘 ; 청계동 본 당 ; 침묵의 교회 ; 황해도 감목 대리구)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황해도 천 주교회사》, 황해도 천주교회사 간행사업회, 1984. 〔洪延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