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 (1569~1618)
許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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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
조선 중기의 문신. 우리 나라 최초의 국문 소설인 《홍 길동전》의 작가. 조선 시대 여류 문인으로 유명한 허난 설헌(許蘭雪軒, 1563~1589)의 동생.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 성소(惺所) 등 몇 가 지를 사용하였다. 학자, 문장가로 이름 높던 허엽(許曄)의 3남 2녀 가운 데 막내 아들로 26세인 1594년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합격하고, 1597년에는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으로 합 격하였다. 이듬해 황해도 도사(都事)로 임명된 이후 내 외의 관직을 지냈고, 삼척 부사 공주 목사를 지낼 무렵 부터 서자(庶子)들과 교류하여 물의를 많이 빚었다. 《홍 길동전》을 쓰게 된 것 역시 그의 뛰어난 문필적 재능과 함께 당시의 교유를 통해 양반 중심 사회의 모순을 민감 하게 느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명나라 칙사 (勅使)를 맞이하는 관직인 원접사종사관(遠接使從事官) 을 세 차례(1602, 1604, 1609) 지내며 국제적 안목을 키 웠고, 1614년 천추사(千秋使)로, 1616년에는 동지겸진 주부사(冬至兼陳奏副使)로 두 차례에 걸쳐 중국을 방문 하여 중국의 관료 학자들과 교류하며 국제적 견문을 넓 힐 수 있었다. 이때 《태평광기》(太平廣記)를 비롯하여 다방면에 걸친 중국 서적을 대량으로 유입하여 물의를 빚고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사회적으로 반골 기질이 강하고 《홍길동전》을 쓸 정도 로 사회 개혁 의지 또한 강하였으며, 자유분방하게 서자 들과 친교를 맺은 인물이었기에 반대파 인사들도 많았 다. 결국 허균은 1618년 남대문 괘서(南大門掛書) 사건 으로 역모를 도모하였다는 죄명하에 동료들과 함께 능지 처참형(凌遲處斬刑)이란 극형으로 파란 많았던 생애를 끝맺었다. 허균은 유학에서 출발하여 불교와 도교를 넘나들며 여 러 종교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가졌던 인물이었고 한때 는 출가 입산을 생각할 정도로 종교에 심취하기도 하였 다. 그와 같은 시기의 학자인 유몽인(柳夢寅, 1559~ 1623)은 자신의 문집인 《어유야담》(於于野談)에 허균이 중국에 가서 '서양인이 만든 지도와 《게십이장》(偈十二 章)을 얻어 가지고 귀국하였다' 고 적어 놓고 있다. 그런 데 이 《게십이장》을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천주교의 기 도문 모음인 《십이단》(十二端)으로 이해하여 허균이 조 선 최초의 천주교 신봉자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 다. 안정복(安鼎福, 1712~1791) 역시 그의 저서 <천학문 답>(天學問答)에서 허균을 '천주학 하는 사람' 으로 지 목하고 있고, 또 북학론자인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은 '지금 사교(천주교)를 믿는 자들은 허균의 뒤를 좇는 무리' 라며 허균을 '조선 최초의 천주교도' 로 기록해 놓았다. 근대에 들어 허균의 천주 신앙 봉행 여부 문제를 제일 먼저 검토한 학자는 한말 일제기의 계몽사가인 이능화 (李能和, 1869~1945)였다. 그는 이규경(李圭景, 1788~?) 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行文長箋散稿)에서 이식(李 植, 1584~1647)이 지은 《택당집》(澤堂集)에 허균이 조선 인으로서 처음으로 천주교 서적을 읽고 천주교의 가르침 을 따랐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는 내용을 보고, 자신이 직 접 《택당집》을 조사하였으나 선 · 불교 서적을 섭렵하였 다는 기록만 보일 뿐 천주교 서적을 보았다는 내용은 없 었다며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러면서도 허균이 조선인으 로 서교(西敎, 천주교)를 믿게 된 '사상적 효시' 를 이루 는 인물이라고 규정하였다. 이후 가톨릭 사학자 유홍렬 (柳洪烈, 1911~1995)은 '허균이 명나라로부터 《게십이 장》을 들여온 것이 기록으로 확실하니, 허균은 조선 최 초의 천주교 신앙인임이 확실하다' 고 단언하였다. 일부 연구자들은 앵베르(L-J-M. Imbert, 范世亨) 주교가 조선 신자들을 위하여 천주교의 기본적이고 중요한 기도문 열 두 가지를 추려 엮어 낸 《십이단》을 《게십이장》으로 단 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허균 자신의 기록 중에는 어디에도 《게십이장》 을 중국으로부터 도입하였다는 내용이 없다. 사실 '게' (偈)는 불교적인 문체의 하나이기에 《게십이장》이 《십이 단》이라는 주장은 착오나 과잉된 의식의 오류라고 밖에 는 볼 수 없다. 즉 《게십이장》이라는 이름의 한역 천주교 서는 존재하는 않으며, 그렇기에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한국 천주교회의 기도서 《십이단》이 《게십이장》일 리 없다는 것이다. 동시대를 산 지인이나 그의 사후 실학 자들의 기록을 보면, 그가 중국에 드나들면서 한역 서학 서를 가까이하였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다만 일부의 기 록과 같이, 그의 천주 신앙을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거나 그가 정식으로 입교 절차를 받은 교인이었다는 것은 사 실이 아니다. 허균이 그저 홀로 천주교 서적을 열람하고 천주를 믿고 살았을지도 모른다고 추정할 수 있을 뿐이 다. 그렇다 하더라도 혼자만의 믿음이었으며 역모죄로 처형됨으로써 사회에 이어지지 못하고 끝났기 때문에, 허균은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을 이루는 인물일 수 없다 는 것이 오늘날의 일반적인 이해이다. ※ 참고문헌 이능화, 《朝鮮基督敎及外交史》, 기독교창문사, 1929/ 柳洪烈,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과 그의 신앙 생활>, 《가톨릭 청년》 74호(1955. 4)/ 李離和, <허균의 사상과 천주교>, 《교회와 역 사》 63호, 1980/ 李丙泳, <천주학에 공명한 혁명아 허균>, 《가톨릭 청년》 18권(1964. 8)/ 李元淳, <한국 천주교회 기원에 관한 검토>, 《최석우 신부 수품 기념 논총 제2집 - 한국 천주교회의 성찰》, 한 국교회사연구소, 2000. 〔李元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