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주의
虛無主義
〔라〕nihilismus · 〔영〕nihi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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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
인식과 윤리 문제에 대하여 객관적 토대가 될 수 있는 어떤 존재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철학적 태도. 허무주의 라는 표현은 역사 속에서 다양한 철학적 입장들, 예를 들 어 인식론적 개인주의(獨我論, Egoismus)나 유아론(唯我 論, Solipsismus), 관념론, 무신론, 범신론, 유물론과 염세 주의뿐만 아니라, 이러한 것들과 관련된 종교적 · 정치 적 · 문학적 사조들을 나타내는 말이 되었으며, 이런 다 양한 용례에도 불구하고 차츰 공통점을 갖게 되었다. 형 이상학적이고 윤리적인 질문과 연관하여, 허무주의는 다 음의 입장을 드러낸다. 첫째, 가치나 윤리적 규범은 어떤 객관적 유효성도 갖지 않는다. 윤리적 가치를 정당화할 수 있는 종교적 · 형이상학적 양식의 사실은 없다. 둘째, '모든 것이 허용되었다' 라는 원리에 따라 인간은 스스로 의 쾌락과 기호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어 원〕 허무주의를 뜻하는 라틴어 '니힐리스무스'(nihilismus)의 어원은 '아무것도 아니, 무(無)' 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니힐' (nihil)이다. 18세기 말엽에 이 용어 는 실제론자와 관념론자 사이의 논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야코비(F.H. Jacobi, 1743~1819)가 1799년 피히 테(J.G. Fichte, 1762~1814)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말을 처 음 사용하였다. 피히테의 관념론이, 자아(Ich)의 설정 (setzen)으로 인해 자아와 무관한 모든 것을 무(無)로 규 정하는 한, 허무주의라는 것이었다. 칸트(I. Kant, 1724~ 1804)와 피히테의 철학이 일상 경험의 대상을 인식 주체 의 구성 행위에 종속시키기 때문에 곧 그 대상을 '없애 는 것이며, 이를 통해 '절대적 자아' 로 신격화되는 인간 속에서 다른 모든 것은 차츰 스스로의 무(無)로 용해되 어 버리는 것이다. 나중에 바더(F.X. von Baader, 1765~ 1841)는 하느님과 계시 등을 부정하며 그리스도교의 본질 을 허무는 '파괴적 · 과학적 허무주의' 에 대해 언급하였 다. 그러나 허무주의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문학가 투르게네프(I.S. Turgenev, 1818~1883)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Osti i deti, 1862)을 통해서였다. 1860년대 러시아 젊은 지성인의 전형적인 인물로 등장하는 주인공 바자로프는 허무주의자로서, 극 단적인 합리주의 입장에서 기존의 도덕, 전통 종교, 습관, 제도 등 일체의 권위와 원칙을 거부하고 파괴하려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용 례〕 내용에 따라 살펴보면 허무주의는 진리, 가치 혹은 사회적 질서가 종국적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無)이라고 하든지, '아무것도 아닌 것' 으로 붕괴되어 버렸다고 보는 태도이다. 이는 다양한 영역과 기준을 받 아들일 수 있고,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관을 표방할 수도 있으며, 혹은 부지불식간에 해체 작업을 수행하는 숨겨 진 과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사회 · 정치적 허무주의 : 19세기 중엽 러시아에서는 황제의 폭정에 대한 반동으로 사회 · 정치적 허무주의가 등장하였다. 이는 현재의 사회나 국가의 질서 혹은 모든 사회나 국가의 질서를 제거하려는 태도로서, 가장 극단 적인 경우는 혁명적 무정부주의(Anarchismus)이다. 존재론 · 인식론적 허무주의 : 대표적인 경우는 그리스 의 소피스트 고르기아스(Gorgias, 기원전 483?~376)였다.그에 따르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 하자면 첫째, 무(無)가 있을 뿐이며 둘째, 가령 무엇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인간은 그것을 인식할 수 없으며 셋 째, 설사 그것을 인식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전달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식적 허무주의 : 그리스의 소피스트였던 프로타고라 스(Protagoras, 기원전 485?~410?)의 경우에서 볼 수 있었 던 회의주의와 절대적 상대주의에서도 최소한 인식적 허 무주의를 찾을 수 있다. 인간론적 허무주의 : 무신론적 실존주의자 사르트르(J.-P. Sartre, 1905~1980)의 경우는 '인간론적 허무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실존은 아무런 존재 이유나 의미 가 없는 것으로, 미리 주어져 있는 어떤 본질이나 가치의 질서, 혹은 신에 매여 있지 않다. 구속되거나 강요받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본질이나 가치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고, 그래서 인간은 자유롭다. 자유의 이름으로 신은 제거되었다. 그러나 이 것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품위를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 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실존의 우연성과 무상성을 극복할 수 없어서 텅 비어 있는 자기 자신, 그래서 무 (無)라고 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뿐이다. 자 기 자신을 가득 채워 스스로 모든 것이 되려는, 즉 존재 를 확보해 보려는 인간 실존의 기본 행위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특히 이런 현존재의 무의미성은 죽음에서 극명 하게 드러난다. 사르트르는 나름대로 윤리학을 세워 보 려 하였지만 이런 허무주의적 배경이 달라지지는 않았 다. 사르트르는 도스토예프스키(F.M. Dostoevsky, 1821~ 1881)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있어 서 허무주의는 현대인이 직면하고 있는 공허감을 뜻하는 것이었다. 당시 러시아의 허무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사상 적 지주로 삼았던 합리주의와 과학적 인식마저 부정하 고, 또 신을 부정하려고 하면서도 부정하지 못하고 있는 정신적 모순 속에서 허무주의를 발견하려고 한 것이다. 카뮈(A. Camus, 1913~1960)도 자신의 문학 작품 속에서 유사한 길을 지향하였다. 적극적 허무주의 : 니체(F. Nietzsche, 1844~1900)에게 있어서 허무주의는 멈출 수 없는 '역사적 과정' 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유럽 최초의 완벽한 허무주의자' 로 평가 하면서, 허무주의의 출현을 종래의 가치들이 종국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 데에서 찾고 있다. 그래서 신에 대한 믿음이나 본질적 · 윤리적 질서라는 것은 약자 나 '삶을 부정하는 자 들의 투사이거나 피조물의 가치에 불과하므로 지켜질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기존의 것 이 파괴되는 것을 고통스러워하는 '소극적 허무주의' 에 대항해서 니체는 적극적 허무주의' 를 주장하였다. 이는 파괴적인 힘이며 동시에 새로운 가치들이 필요하다는 것 을 아는 것이다. 새로운 가치 설정의 원칙은 '힘에로의 의지' (der Wille Zur Macht)로서, 삶을 강하게 하고 상승시 키는 것이면 무엇이든 긍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단순히 약자와 타락한 자의 퇴락한 도덕에 반대한다는 원칙을 천명함으로써 모든 가치를 전복시킬 것을 주장하 였을 뿐, 보편적인 도덕 원칙을 새로이 제시하지는 못하 였다. 의미와 목적이 없이 영원한 무(無)를 설정하는 영 원한 회귀 속에서 그의 주장은 첨예화되었고, 허무주의 의 가장 극단적 형태를 띠었다. 니체 이전에 이미 보들레르(C. Baudelaire, 1821~1867), 랭보(J-N.-A. Rimbaud, 1854~1891), 플로베르(G. Flaubert, 1821~1880) 등의 문필가들이 위기에 처해 있던 유럽 문 명 속에서 시민 사회의 분열과 인간의 존엄과 가치 상실 등을 자각하며 절망하고 있었다. 더욱 직접적으로는 삶 을 의지로 파악하고 부정적으로 보았던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 1788~1860)나 창조적 허무를 주장한 독일 의 반국가주의 철학자 슈티르너(M. Stirner, 1806~1856) 같은 인물들이 니체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존재 망각 : 하이데거(M. Heidegger, 1889~1976)는 허 무주의를 '존재 망각'(Seinsvergessenheit)으로 환원시켜 설명하였다. 존재 망각은 서양 역사에서 생긴 가장 포괄 적이고도 광범위한 사건으로 '형이상학 사건' 과도 일치 하는데, 니체는 그것을 '완성' 하였다는 것이다. 전통적 인 형이상학과 허무주의를 극복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 고 니체의 사상은 궁극적으로는 허무주의적 형이상학적 인 전통에 의해 규정되고 있으므로, 그의 철학은 형이상 학과 허무주의의 종국점이며 완성이지 그 극복이 아니 다. 이처럼 하이데거는 니체의 허무주의를 비판하면서 , 니체에 있어서는 존재가 하나의 가치로 끌어내려졌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힘에로의 의지' 를 확고하게 하는 조건으로 끌어내려져서 존재 자체를 경험할 수 있는 모 든 길이 차단되어 버렸고, '신의 죽음' 도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으로, 신도 여기서는 '최상의' 가치 로 전락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 니체 ; 사르트르 ; 사 신 신학 ; 피히테 ; 하이데거) ※ 참고문헌 D. Arendt Hg., Nihilismus. Die Anfiinge von Jacobi bis Nietzsche, Köln, 1970/ E. Severino, Vom Wesen des Nihilismus, Stuttgart, 1983/ M. Heidegger, Zur Seinsfrage, Frankfurt am M., 19771 一, Nietzsche : Der europäische Nihilismus, Pfullingen, 1967(박찬국 역, 《니체와 니힐리즘》, 지성의 샘, 1996)/ J.P. Sartre, Das Sein und das Nichts, Hamburg, 1952/ E. Mayer, Kritik des Nihilismus, Miinchen, 1958/ W. Weischedel, Der Gott der Philosophen, Darmstadt, 1983(최 상욱 역, 《철학자들의 신》, 동문선, 2003). 〔李敬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