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종교구

軍宗教區

〔라〕ordinariatus militaris · 〔영〕military ordinari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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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과 군속의 신앙 생활 전반을 사목하는 속인적(屬 人的) 교구. 군 사목은 1950년 6 · 25 동란 중 시작되었 으며, 1958년 3월에 '군종 신부단' 으로 창설되었다. 1961년 교회법적 근거를 가진 '가톨릭 군종 신부단'(military curia)으로 인준되었고, 1977년 군종 대목구(軍 宗代牧區, military vicariate)로 승격되었으며, 1989년 10 월 23일 군종교구(military ordinariate)로 설정되었다. I . 전사(前史) 우리 나라의 군종 활동은 해군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 었다. 1948년 9월 15일, 해군의 창설자이며 초대 해군 참모총장인 손원일 제독의 초청으로 정달빈(鄭達斌) 목 사가 종군 목사(從軍牧師)로 해군에 초대되었다. 정달빈 목사는 중위 계급을 부여받고 정훈실(政訓室)에서 비공 식적으로 약 3개월 동안 군종 업무를 수행한 후 1949년 1월 정훈 장교(政訓將校)로 임명되었다. 〈국군 조직법> 에 군종 제도에 관한 법이 없었기에 군목(軍牧)으로는 임명될 수 없었다. 군종 제도는 1950년 12월 21일 육군에서 먼저 창설 되었다. 그런데 한국의 군종 제도는 정부에서 자의로 창 설한 것이 아니라 성직자들의 종군(從軍)의 필요성을 느 낀 각 종교 단체에서 거듭 요청하여 이루어졌다. 한국군 내의 군종 제도 창설 추진 작업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 트 측이 유대를 맺으면서 급진전되었다. 당시 미 8군 군 종이며 평양교구장 서리였던 캐롤(Geor- ge Carroll, 安) 몬시놀과 감리교 선교사 인 쇼우(William Show) 박사, 그리고 극 동 사령부 군목과장 이반 엘 베넷(Ivan L. Bennett) 군목이 중심이 되어 군종 제 도 창설을 위한 노력들이 진행되었다.그리하여 1950년 12월 21일, "종군 목 사가 다 군에 들어가서 일하고 있는 줄로 알고 있었는데 아직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면 하루 속히 사람을 택해 들어가서 일하도록 하라"는 대통령 비서실 지시 제29호가 국방부에 하달되어 각 부대에 군종의 영입이 실현되었다.이어 1951년 2월 7일 육본 일반 명령 제31호로 육군 본부 인사국에 군승과 (軍僧課)가 설치됨으로써 국군의 군종제도가 창설되었다. 그리고 1954년 1월 21일 육본 일반 명령 제9호에 따라 육본 인사국에 속해 있던 군목과는 군종감실(軍宗監室) 로 개칭, 승격되어 참모총장의 특별 참모부로서 종교에 관한 제반 업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한편 해병대도 1951년 4월 1일 군종 제도를 창설하여 독자적으로 운영 해 오다가 1951년 11월 1일 해군의 통제를 받게 되면서 해군 본부 군종감실에서 업무를 지원하였고, 1952년 8 월 7일에는 육군 군종에 의해 공군 군종 업무도 시작되었다.

〔6 · 25 동란과 가톨릭의 군종 활동〕 한국 가톨릭의 군종 활동은 6 · 25 동란 중에 시작되었다. 1950년 8월 중순 부산 범일동 본당에서 피난 생활을 하고 있던 김동 한(金東漢, 가롤로) · 허창덕(許昌德, 치릴로) 외 10여 명의 신부들은 국민들과 더불어 구국 전선에 보조를 맞 춘다는 목적 아래 젊은 신부들과 신학생, 교우 청년 3천 명을 규합하여 1개 연대 규모의 '가톨릭 청년 결사대' 의 조직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현역 군인에게도 충분한 무 기를 공급할 수 없다는 정부측 설명으로 이 뜻은 좌절되 었다. 그 대신 후방에서의 봉사 활동이 시작되었다. 1951년 2월 7일 육군 본부 인사국에 군승과를 설치한 육군은 각 종단에 군종 후보생 모집을 통보하였다. 이에 가톨릭에서는 1951년 2월 28일 11명의 신부들이 프로 테스탄트 목사들과 함께 제1기 육군 군종으로 입대하여 4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무보수 촉탁 문관(囑託 文官)의 신분으로 임관되어 전후방 각 부대에 배치되었다. 이어 5월 1일 제2기 육군 군종으로 7명의 신부가, 8월 10일 에는 제1기 해군 군종으로 1명의 신부가, 그리고 10월 에는 제3기 육군 군종으로 3명의 신부가 입대하여 한 해 동안 22명의 군종 신부가 탄생되었다. 한편 군승과라는 명칭은 가톨릭 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51년 4월 14 일자로 군목과(軍牧課)로 개칭되었다. 무보수 촉탁 신분으로 군종 활동을 시작한 육군 군종 신부들은 1952년 6월 16일부터 국인명(國人命) 제58호 로 유급(有給) 문관의 신분으로 바뀌어 민간 교회의 경 력에 따라 각각 2급 4호에서 3급 8호로의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1952년 3월 30일에는 공군 군종 신부가 탄생되었다. 한편 1952년부터 1953년 2년 동안은 성직 자 외에도 많은 신학생과 전교 회장(傳敎會長)이 군종으 로 입대하였는데(補助軍牧) 육군에서 필요로 하는 군종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가톨릭에서는 육 · 해 · 공군 군종 신부를 탄 생시키고 각 군 및 포로 수용소에서 활발한 군종 활동을 전개해 나갔으며, '종군 신부 전교 사업 후원회' 를 결성 하여 군종 신부들의 활동에 도움을 주고자 했다.
II . 군종 신부단의 결성

전쟁이 끝나자 가톨릭의 군종 활동은 지속성을 상실한 채 쇠퇴의 내리막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군종 활동의 중 심이 되는 군종 신부들의 제대는 속출하였지만 새로운 입대자는 없었기 때문이다. 1954년 12월 13일자로 육 군의 문관 군종들에게 민간 교회의 경력에 따라 중령에 서 대령까지의 계급이 부여되는 군종 현역 시대의 막이 올랐지만 가톨릭의 군종 사목은 침체의 높에 빠지기 시 작하였다. 이에 종군 신부단의 제2대 총재로 선출된 노 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는 군종 신부단의 창단이 시 급하다고 느껴 1958년 3월 당시 서울교구 경리부장으로 부임한 박희봉(朴喜奉, 이시도로) 신부를 육 · 해 · 공군 을 통합한 군종 신부단 초대 단장으로 임명함으로써 군 종 신부단을 창단시켰다. 그러나 군종 활동은 크게 나아 지지 못했다. 이에 1959년 주교 회의는 연중 1월의 첫 째 주일을 '군목 사업 주일' 로 제정하고 이날 전국의 본 당에서 군종 신부들로 하여금 강론케 하고, 군종 신부 활 동 지원을 위한 특별 헌금도 바치도록 결정하였다. 이어 1961년 11월의 주교 회의는 군종 신부단의 거듭된 요청 으로 한국 천주교회의 군종 주교(ordinarius militaris)의 임 명을 교황청에 신청하였다. 이로써 군에 신부를 파견한 지 10년 만에 합법적인 절차를 마친 한국 군종 신부단이 탄생하였다. 이어 1961년 12월 26일자로 유봉구(柳) 九,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2대 단장으로 부임하였고, 단 의 명칭도 '한국 가톨릭 군종 신부단' 으로 확정되었다. 군종 신부단의 정식 인준으로 교회법적 근거를 지닌 한 국 가톨릭 군종 신부단은 그 창설을 보게 되었지만 군종 신부의 충원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던 중 1961년 11월 18명의 신부들이 육군 군종 14기로 대거 입대, 군종 사목은 활로를 되찾으면서 전환기를 맞이했 다. 이들은 13주의 교육 과정을 마치고 1962년 1월 27 일 육군 군종 중위로 임관되어 전후방 각 부대에 배속되 었다.

1962년 9월, 3대 군종 신부단장으로 박성종(朴成鍾, 프란치스코) 신부(서울대교구 가톨릭 노동 청년회 지도 신부) 가 임명되었다. 그런데 계속된 단장 겸임제는 과도기적 인 임시 방편일 뿐 군종 신부단의 발전을 위해서는 바람 직하지 못했다. 1963년 9월 군종 신부단 총회는 군종 신부단 규약을 제정하고 전임 단장 임명 문제를 비롯한 기구 확립 방안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1964년 9월 3일 1년 동안 공석 중이던 4대 전임 군종 신부단장으로 장병 롱(張丙龍, 요한) 신부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군종단사 신축 부지 문제의 후유증, 타의에 의한 장기 복무에의 불 만, 전방 기피 등의 보직 문제, 전국 교회의 공동체적 협 조 부족 등으로 군종 신부단은 혼란과 반목이 계속되었 다. 이런 중에 군 사목자로서의 자각과 자세를 바로잡기 위한 조용한 정신 혁명이 제1 야전군 신부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야전군 신부 회의' 를 조직한 6명의 야전군 신부들은 군종 신부 상호간 이해 증진과 자질 향상, 단합 된 분발을 조용히 시도하여 후일 군종 신부단이 와해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하였다. 1967년 4월 지학순(池學淳, 다니엘) 주교가 3대 군종 신부단 총재 주교로 취임하였고, 1967년 12월 18일에 는 군종 신부 · 군인 · 군속에 대한 관면이 허락되었으며, 1968년 주교 회의에서는 10월 첫째 주일을 군인 주일로 제정하였다. 그리고 1968년 2월 1일에는 김치삼(金熾 參, 스데파노) 신부가 3대 공군 군종감으로 임명되었는 데 3군 중 가톨릭으로서는 처음이었다. 한편 1965년 9 월 17일 최창정(崔昌鼎, 요아킴) 군종 신부의 파월(派 越)을 시작으로 1973년 3월까지 33명의 군종 신부가 월남(현 베트남)에 파견되어 군종 활동 및 대민 지원 활동 을 전개하였다. 한국군 군종 제도 창설 이래의 첫 해외 종군인 월남에서의 군종 신부들은 그들에게 부여된 정규 군종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의 소득을 얻었 다. 첫째는 6 · 25 동란과 같은 국내에서의 전투 때 종군 경험이 없는 군종 신부들이 처음으로 야전에서 군종 활 동의 체험을 쌓았다는 점이다. 둘째는 월남전에 종군한 외국 군종 신부들과의 접촉을 통하여 군 사목에 대한 식 견을 넓힐 수 있었다는 점이다.
Ⅲ . 준교구 체제 개편

1970년대의 시작은 한국 가톨릭 군종사에 있어서 새 시대, 새 국면의 전개를 의미하였다. 월남 종군에서 돌아 온 육군 군종 14기 및 15기의 신부들의 군 복무 8~9년 경력을 바탕으로 군종 신부단의 중심을 이루면서 군 사 목은 교회와 군에서 인정받고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특 히 1970년대에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난 군종 후원회(軍 宗後援會) 활동은 군종 활동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해 주 었을 뿐만 아니라 군 사목에 대한 교회의 호응 내지는 협 조 기운을 크게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 1970년 1월 13 일 개최된 군종 신부단 임시 총회는 군종 신부단 조직을 교구에 준하는 기구로 개편하고 장기 복무자 우대 방안 을 마련하였으며, 7월 13일 개최된 정기 총회에서는 군 종단 운영에 관한 내규를 제정하였다. 또한 매년 진통을 겪는 군종 신부 충원의 제도적 해결책으로 1970년부터 군종 장교 후보생 제도를 채택하였다. 그리고 준교구(準 敎區)로의 체제 변경과 함께 명문화되지 않아 일부 지역 본당과 혼선을 빚고 있던 현역 군인과 군용지(軍用地)에 거주하는 군인 가족과 군속에 대한 군종 신부의 사목 관 할권을 1972년 추계 주교 회의로부터 승인받았다. 한편 군종 신부단 해체까지 거론되던 1960년대 말 군 특수 사목에 대한 범교회적인 협조 체제 확립을 목표로 '한국 가톨릭 군종 후원회' 와 '가톨릭 장교회' 가 발족되 었다. 1960년 1월의 군종 신부단 총회에서 그 결성이 만장 일치로 가결된 군종 후원회는 그해 10월 주교 회의 에서 초교구적인 전국 단체로서 인준을 받았으며, 1970 년 1월 13일자로 정식 발족되었다. 군종 활동의 중요성 을 널리 알리기 위한 회보 매월 발간, 업무량에 비해 경 제적으로 어려운 사정에 있는 군종 신부 지원, 장병들의 건전한 신앙과 정신 생활을 북돋우는 데 필요한 적극적 인 활동 추진, 그리고 이러한 사업의 추진을 위해 전국적 인 회원 모집을 결성 취지문으로 하였다. 결성 1년 후 원 주 지부의 결성을 시작으로 지부를 결성해 나갔으며, 서 적 지원 등을 통하여 군종 활동을 보조해 나갔다. 후원회가 결성되던 해 시작된 전군 신자화 운동을 계 기로 군 사목은 활발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또 문서(文 書) 전교 활동을 위해 군인의 특수성을 고려한 군인 교 리서 편찬을 목적으로 '군인 교리 편찬위원회' 를 조직하 여 1972년 11월 《군인 기도서》, 1973년 3월 20일에는 가톨릭 안내서 《왜 믿어야 합니까?》와 군인용 교리서 《믿음의 길》을 발간하여 전후방 부대에 배부했다. 또한 전례를 군 사목에 알맞는 방식으로 개편, 검토할 방침으 로 '군 전례 연구위원회' 도 구성하였다. 그리고 1974년 부터 차량 지원을 시작하여 군종 신부들의 기동력 확보 에 노력하였다.

군종 후원회 못지않게 군종 업무 수행에 큰 역할을 담 당해 오고 있는 것이 '가톨릭 장교회' 이다. 군종 후원회 가 군대 밖 민간인 신자들의 사도직 수행이었다면 가톨 릭 장교회는 군대 현역 장교 신자들에 의한 사도직 수행 이었다. 즉 군종 후원회와 가톨릭 장교회는 1970년부터 군종 활동을 후원해 준 양대 산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군종 활동이 시작되면서 각 지역에 가톨릭 신자 장교들 로 '가톨릭 장교단' 이 설립되기 시작했으며, 그 숫자가 증가됨에 따라 연합회의 결성이 요구되었다. 그리하여 1970년 3월 7일 육 · 해 · 공군 및 해병대 장군들이 모여 '가톨릭 장교 연합회' 와 '중앙회' 의 조직을 결의하였다. 장교들은 병사들에 대한 영향력이 많기 때문에 수적으로 부족하고 계급적으로 낮은 신부들 대신 군 사목에 평신 도 사도직을 실천함으로써 열악한 가톨릭 군종 업무에 활력을 줄 수 있었다. 두 단체의 적극적인 협력에 힘입은 군종 신부단은 1970년에 시작되어 1973년까지 3년 동 안 절정에 달했던 전군 신자화 운동 기간에 연평균 1,220명의 영세자를 탄생시켰다. 〔군종 대목구(軍宗代牧區)〕 1961년 정식 출범한 한국 가톨릭 군종 신부단은 1970년에 교구 체제로 조직 기구 를 개편한 이후 1977년 다시 한 차례의 조직 기구 개편 을 단행하여 군종 사목의 활성화를 도모하였다. 교회법 상 단순한 사제 단체로 되어 있는 군종 신부단을 교구 체 제로 바꾼 것이다. 그 동안 군종 신부 충원으로 매년 어 려움을 겪었지만 군종 신부단 나름의 노력, 전군 신자화 운동에 의한 신자 증가, 군종 활동을 지원하고자 조직된 군종 후원회와 가톨릭 장교 연합회의 조력으로 1974년 전방 사단 지역에 군종 신부 배치를 완료하였고,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해 나갔으며, 기동력도 보급하였다. 또한 매년 진통을 겪는 군종 신부 충원의 제도적 해결책으로 1969년부터 시행한 군종 후보생이 1976년부터 임관되 어 큰 도움이 되었으며, 연장 내지 장기 복무자 획득에 힘쓴 결과 상당수의 장기 복무자를 보유, 전체적으로 계 급이 높아져 안정 기반이 한층 강화되어 군종 대목구 체 제로의 전환이 가능했다. 사목구 체제로의 전환과 함께 비정책 회의이던 '장기 복무자 회의' 를 정책 결정 기구 로 격상시키고, 군 교육 기관 사목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교육 부대 담당 신부 회의' 를 신설하였으며, 군 사목 문 제 전반에 걸친 연구 기구로 '군 사목 연구위원회' 도 신 설하였다. 또한 12월 2일에는 서울 관악구 상도동에 독 립된 군종 신부단사(軍宗神父團舍)를 마련하였다. 대목구로서의 군종 신부단은 교세 확장을 목표로 1980년 군인용 《천주교 입문 교리서》를, 1982년 《군인 용 성가집》을 각각 발행했고, 1986년 9월 15일자로 군 종 신부단 사상 처음으로 현역 군종 신부가 아닌 민간인 김계춘(金啓春, 도미니코) 신부가 총대리로 임명되어 군 사목의 효율화를 위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민간인 신부의 총대리 영입은 총대리로 하여금 본연의 업무에만 전념하게 함으로써 군종 신부단 업무의 효율화를 극대화 하고자 한 것이었으며, 특히 교구 체제로 구성, 운영해 온 군종 신부단으로서는 군종교구 설정을 위한 포석이었다.
Ⅳ. 군종교구의 설립

1986년 10월의 주교 회의는 <군인 사목에 관한 교황 헌장>(Sprituali Militum Curae, 1986. 4. 21)의 정신에 따라 군 종교구 창설을 지지 · 의결하였다. 그리하여 1986년 11 월 25일, 군종 신부단에서는 당시 군종단의 총재 주교였 던 경갑룡 주교의 명의로 <군종교구 설정 요청서>를 교 황청 인류 복음화성에 제출하였고, 1987년 11월에는 <군종교구 정관>(Statuta)을 주교 회의에 검토 · 의뢰하였 으며 주교 회의는 이를 수정하여 통과시킨 후 12월 5일 인류 복음화성에 승인을 요청하였다. 한국 군종교구의 정관안을 접수한 인류 복음화성은 그것의 수정을 요구하 였으며 1차로 수정된 정관안이 1988년 10월의 주교 회 의에서 검토 후 통과되었다. 이렇게 하여 수정 통과된 군 종교구 정관안은 1988년 11월 한국 주교단 의장 김남수 주교의 명의로 인류 복음화성으로 송부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89년 10월 23일 한국 군종교 구가 설정되었다. 동시에 초대 군종교구장으로 정명조(鄭明祚,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임명되었고, 투불바카 (Tubulbaca)의 명의 주교로 성성되었다. 이로써 군 사목 을 시작한 지 39년, 군종단이 창설된 지 29년 만에 군종 교구가 설립되었다. 1993년 말 군종교구의 교세는 다음 과 같다. 군인 성당 67개소, 공소 130개소, 군종 신부 65명(육군 47, 해군 8, 공군 10), 군종 수녀 57명, 군인 신 자 82,645명이다. (→ 군인 주일 ; 노기남 ; 정명조 ; 지 학순 ; 한국 가톨릭 군종 후원회) 〔尹善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