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로데 (기원전 70~4)

[그]'Ηρώδης · [라]Herodes Magnus · [영]Herod the Gr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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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탄생을 두려워한 헤로데가 일으킨,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프라 안젤리코 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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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탄생을 두려워한 헤로데가 일으킨,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프라 안젤리코 작) .


로마 제국이 임명한 유대 왕국의 왕(기원전37~4). 기원전 70년경 이두매아의 귀족 가문에서 4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헤로데의 주된 세력 기반은 로마 제국 으로, 당시 삼두 정치에 수반된 권력 다툼으로 로마의 최 고 통치자가 바뀔 때마다 원만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여 오랜 기간 동안 유대를 다스릴 수 있었다. 유대인들의 왕 통을 이어받기 위하여 하스모네 왕조의 합법적인 최후의 통치자인 요한 히르카누스 2세(John Hyrcanus Ⅱ, 기원전 63~40)의 손녀인 마리암네 1세(Mariamne I, 기원전 57?~29?)와 결혼하였으나, 무자비한 통치 방식 때문에 유대인들의 존경을 받지는 못하였다. 그가 다스리던 동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났으며, 무죄한 아이들의 학 살 이야기(마태 2, 16)는 그의 평판에 들어맞는다. 〔집권 배경〕 에돔인이 유대 백성으로 편입된 것은 영 토 팽창 정책을 펼쳤던 요한 히르카누스 1세(John Hyrcanus I, 기원전 134~104)가 에돔인들에게 강제로 할 례를 베푼 후였다. 그 후 알렉산데르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 기원전 103~76)와 살로메 알렉산드라(기원전 76~67)가 다스리던 시기에, 헤로데의 아버지인 안티파테 르(Antipater)가 이두매아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된 기록 으로 보아 헤로데 가문은 지방의 호족이었다. 헤로데 가문은 알렉산드라의 두 아들인 아리스토불루 스 2세(Aristobulus Ⅱ, 기원전 67~63)와 히르카누스 2세 사이에서 벌어진 권력 다툼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부상하 였다. 알렉산드라가 죽은 후 대제사장이었던 히르카누스 2세가 왕위에 오르자, 동쪽 국경 지대의 병권을 장악하 고 있던 아리스토불루스 2세가 쳐들어와 히르카누스 2 세의 군대를 예리고에서 격파하였다. 이에 안티파테르는 히르카누스 2세를 복위시키는 일에 협조하는 것이 유리 하다고 판단하고, 이웃 나라인 나바테아(Nabatea)의 군 대를 끌어들여 아리스토불루스 2세의 군대를 대파해 예 루살렘으로 쫓아냈다. 그러자 아리스토불루스 2세가 예 루살렘을 포위한 나바테아군을 몰아내기 위해 로마군의 개입을 요청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다마스커스(Damascus)에 와 있던 폼페이우스(G. Pompeius, 기원전 106~48)는 기원전 64년 양 진영의 입장을 들은 후 결정을 연기하였다. 하지만 곧 아리스토불루스 2세의 군사 행동을 문제 삼아 진군하여 예루살렘을 함락 시키고, 그를 로마로 압송하였다(기원전 63). 이후 그와 그의 장남인 알렉산데르가 일으킨 세 차례 반란(기원전 57~55)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안티파테르는 후에 삼두 정치가의 한 사람이 되는 안토니우스(M. Antonius, 기원 전 82/81~30)에게 협력하여 예루살렘의 로마 총독이 되 었다. 그 후 폼페이우스를 꺾고 새로운 실력자가 된 체사 르(Julius Caesar, 기원전 100~44)가 알렉산드리아 전쟁 (기원전 48~47)에서 곤란을 겪을 때 3,000명의 지원병 을 보낸 공으로, 유대 지역을 다스리는 로마 공화국의 행 정관이 되었다. 외형상 권력을 공유하게 된 민족 영주 히 르카누스 2세는 정치적으로 무능한 자였기 때문에, 안티 파테르는 치안을 강화한다는 목적을 내세워 그의 두 아들인 파사엘(Phasael)과 헤로데를 각자 유다와 갈릴래 아의 영주로 임명하여 통치력을 강화 해 나갔다. 〔영주 시기〕 헤로데는 갈릴래아의 영주가 된 직후, 아리스토불루스 2세 의 잔당들이 주축이 되어 약탈을 자행 해 오던 에제키야(Ezekias) 일당을 체 포해 처형함으로써 이름을 날렸다(기 원전 47). 이 일로 고소당해 히르카누 스 2세의 법정에 서게 되었으나, 왕권 을 시사하는 자색 옷을 차려 입고 수 행원으로 군인들을 동반하는 등 무언 의 압력을 행사하다가 유죄 판정이 나 기 전날 밤에 다마스커스로 도망쳤다. 거기서 시리아의 로마 총독 섹스투스 체사르(Sextus Caesar)의 환심을 사 코 엘레 시리아(Coele-Syria, 현 레바논)의 로마 총독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곧바 로 진군해 무력 시위를 벌였다(기원 전 46) . 기원전 44년에 체사르가 브루투스 (Marcus Junius Brutus, 기원전 85~42) 와 카시우스(Gaius Cassius Longinus, ?~기원전 42)에 의해 살해되면서 정 국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전쟁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시리아로 온 카시우스 는 헤로데를 시리아 전 지역의 총독으로 재임명하고, 세 금 징수를 명하였다.전쟁이 끝나면 그를 유대의 왕으로 임명한다는 이면 계약이 체결되었다는 소문이 돌자 히르 카누스 2세의 심복 말리쿠스(Malichus)는 안티파테르를 독살하였으며, 유대와 갈릴래아 일대에서 폭동이 일어났 다(기원전 43) . 더구나 헤로데가 세금을 모아 주었던 카 시우스와 브루투스의 군대가 필립비(Philippi) 전투에서 대패함으로써(기원전 42), 헤로데는 동방의 새 패권자로 등장한 안토니우스 앞에서 자신을 고발하는 백성의 대표 들에 맞서 자신을 방어해야만 하였다. 헤로데는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아버지인 안티파테르 와 친분이 있었다는 사실과, 히르카누스 2세의 손녀인 마리암네 1세와 약혼함으로써 히르카누스 가문과 결합 한다는 사실을 내세워 안토니우스의 인정을 받아 형 파 사엘과 함께 유대의 분봉 영주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가 이집트로 물러간 직후 아리스토불루스 2 세의 아들 안티고누스(Antigous)가 파르티아군을 동원 해 쳐들어왔다. 헤로데는 마사다로 후퇴하였다가 나바테 아에 군사적인 도움을 청하였으나 거절당해 로마로 망명 길에 올랐다(기원전 40). 로마에서 헤로데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Gaius Octavianus, 기원전 63~서기 14)의 적극적인 지지로 원로 원의 동의를 받아 유대의 왕으로 임명되었다. 이듬해에 그는 시리아로 가서 로마의 대군을 이끌고 파르티아군의 포위 공격을 받고 있던 마사다를 구해내고 예루살렘을 함락하였다. 안티고누스에게 동조하였던 45명과 갈릴래 아 영주 시절에 헤로데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려 하였던 판관들은 모두 살해되었고, 안티고누스는 생포되어 로마 군에 넘겨져 참수되었다. 이렇게 하스모네 왕조가 끝남 과 동시에, 헤로데는 예루살렘이 함락하기 직전에 마리 암네 1세를 두 번째 아내로 맞음으로써 유대 왕국을 다 스리는 실질적인 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기원전 37). 〔유대의 왕 재임 시기〕 헤로데는 유대인들로부터 왕권 을 인정받기 위해 서둘러 마리암네 1세와 결혼하였으나, 그의 왕권을 위협하는 구왕조의 인물은 4명이나 생존해 있었다. 나이든 히르카누스 2세, 그의 딸이자 헤로데의 장모인 알렉산드라, 부인 마리암네 1세, 그리고 처남인 아리스토불루스 3세는 헤로데가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 기 위해 늘 경계해야 할 요주의 인물이었다. 따라서 헤로 데는 왕이 되자마자 16세인 아리스토불루스 3세가 유대 인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될 수 없도록, 바빌론 출신의 아 나넬루스(Ananellus, 기원전 37~36, 34~?)를 대사제로 임 명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알렉산드라가 클레오파트라 7세(Cleopatra VII Thea Philopator, 기원전 51~30)에게 간 청해서 안토니우스가 대사제 임명에 관여하도록 압력을 가하여, 기원전 35년 아리스토불루스 3세가 대사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해 초막절 축제에 참여한 군중들이 아 리스토불루스 3세에게 보내는 환호와 갈채가 엄청나자, 이에 경계심을 품은 헤로데는 예리고의 궁전에서 물놀이 를 핑계로 그를 익사시켜 제거해 버렸다. 이 사건으로 헤 로데는 안토니우스에게 불려 갔으나 유창한 말솜씨와 뇌 물로 무마할 수 있었다. 기원전 32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에 내 전이 벌어져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이 악티 움(Actium) 해전에서 패배하자(기원전 31), 헤로데는 위 기에 직면하였다. 그는 옥타비아누스 앞에 출두하기에 앞서, 적국인 나바테아 왕과 내통했다는 죄목을 씌워 히 르카누스 2세를 살해함으로써(기원전 30), 그가 유대 왕 국을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한 인물임을 역설해서 왕의 지 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어 귀국한 후에 아내 마리암네 1세와 장모 알렉산드라마저 처형해(기원전 29~28) 자신 의 왕권을 위협하는 내적인 요인을 완전히 제거하고 번 영기(기원전 25~13)를 맞았다. 헤로데 왕국은 집권 말기에 다시 흔들리기 시작하였 다. 열 명이나 되는 아내에게서 태어난 후계자들이 또한 열 명이나 되었으므로, 차기 왕권을 계승하기 위한 암투 와 갈등으로 불화가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가장 유력한 후계자는 로마 왕족과 친분을 갖기 위해 로마로 유학을 떠난, 하스모네 왕가의 혈통을 받은 마리암네 1세의 아 들들인 알렉산데르와 아리스토불루스였다. 그러나 마리 암네 1세가 처형된 후 헤로데의 애정을 되찾은 에돔 출 신인 첫 번째 아내 도리스(Doris)의 아들 안티파테르 3세 의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알렉산데르와 아리스토 불루스는 모반 혐의로 로마의 관리들이 입회한 가운데 재판에 회부되어 기원전 7년에 사형되었다. 그러나 경쟁 자를 제거한 안티파테르 3세도 헤로데의 의혹에서 벗어 나지 못해, 부왕이 숨지기 5일 전에 사형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헤로데 왕국은 최후에 작성된 유언장에 따라 세 아들에게 분배되었다. 사마리아 출신의 네 번째 아내 말타케(Malthace)게서 태어난 아르켈라오(Archelaus)와 헤로데 안티파스(Herod Antipas, 기원전 4~서 기 39)는 각각 유다와 사마리아, 갈릴래아와 베레아 지 역을 차지하였으며, 예루살렘 출신의 다섯 번째 아내 클 레오파트라에게서 태어난 필립보(Philip)는 북부 트랜스 요르단 지역을 차지하였다. 〔업 적〕 헤로데는 '로마의 친구이자 동료' 라는 칭호에 부합될 만큼 친로마적인 성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대 대적으로 건축 사업을 펼쳤다. 예루살렘에는 로마의 실 력자 안토니우스를 기념하는 안토니아(Antonia) 요새를 세우고, 형 파사엘과 친구 힙피쿠스와 아내 마리암네 1 세를 기념하는 세 개의 탑으로 둘러싸인 왕궁을 건설하 였다. 아울러 유대인들의 정신적인 중심지인 예루살렘 성전을 헬레니즘풍으로 증축하여 솔로몬 성전의 2배 규 모로 탈바꿈시키는 엄청난 공사를 추진하였다. 서기 63 년이 되어서야 완공된 이 성전은 사제의 뜰, 남자의 뜰, 여인의 뜰, 이방인의 뜰로 구분된 호화로운 건축물로, 헬 레니즘과 헤로데에 대한 적개심을 가라앉히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하였다. 그리고 북왕국의 옛 수도 사마리아 터에 아우구스투스 를 기념하는 신전을 비롯하여 도로와 광장을 재건하여 세바스테(Sebaste)란 이름으로 아우구스투스에게 헌정하 였다(기원전 27). 그리고 그 북서쪽 해변에 가이사리아 (Caesarea) 항구를 만들어 마찬가지로 그에게 봉헌하였 다. 이 항구 도시에는 다른 헬레니즘 도시와 마찬가지로 아우구스투스 신전을 비롯하여 원형 극장, 경기장, 전차 경주장이 갖추어져 있어, 훗날 로마 총독의 거주지로 활 용되었다. 예루살렘과 세바스테와 같은 교통의 요충지만이 아니 라, 접근하기는 쉽지 않으나 전략상 요충지인 광야에도 11개의 거대한 요새를 건설하였다. 사해 동쪽에 세워진 마케루스(Machaerus), 사해 서쪽에 세워진 마사다(Masada), 예루살렘과 사해 중간 위치에 세워진 히르카니아 (Hyrcania), 베들레헴의 남쪽에 세워진 헤로디움(Herodium), 예리고 가까이 세워진 키프로스(Cyprus) , 예리고 북쪽으로 어느 정도 떨어져 요르단 강 가까이 세워진 알 렉산드리움(Alexandrium)은 서로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 어 예루살렘에 긴박한 군사 정보를 신속하게 전할 수 있 게끔 설계되었다. 그 외에도 팔레스티나와 페니키아 해 변에 세워진 아스칼론, 프톨레마이스, 시돈, 비블로스, 트리폴리스, 시리아의 주요 도시 다마스커스와 안티오키 아 등의 헬레니즘 도시들에도 공개적으로 지원금을 희사 하였다. 또한 로두스 섬에 아폴로 신전을 세우고 아테네 와 스파르타에 기념물을 찬조하는 등 소아시아와 그리스 에까지 문화 사업을 지원함으로써 로마 제국 어디에서나 문화의 후견자라는 명성을 얻었다. 이로 말미암아 로마 제국 전역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어디에 서나 환영받았으며, 자체 회당을 갖고 장사하는 데 아무 런 장애를 받지 않았다. (→ 가이사리아 ; 마사다 ; 성전 (聖殿) ; 이스라엘 ; 헤로데 아그리빠 ; 헤로데 안티파 스) ※ 참고문헌  Bo Reicke, Neuststamentliche Zeitgeschichte : Die biblische Welt 500v.-10n. Chr., Walter der Gruyter & Co., Berlin, 1968(번역실 역, 《신약성서시대사》, 한국신학연구소, 1986)/ E. Mary Smallwood, The Jews under Roman Rule :from Pompey to Diocletian, E.J. Brill, Leiden, 1981/ Ehud Netzer, Herd's Building Program, 《ABD》 Ⅲ, pp. 169~172/ Francois Castel, The History of Israel and Judah in old Testament Times(허성균 역, 《이스라엘과 유 다의 역사》, 대 한예 수교장로회 총회 출판국, 1992)/ James D. Newsome, Greeks, Romans, Jews : Currents ofCulture and Beliefin the New Testament World, Trinity Press International, 1992/ L.I. Levine, Herod The Great, 《ABD》 Ⅲ, pp. 161~169/ Yekutiel Friedner, E. Eliezer td.,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 The Second Temple Era, Mesorah Publications Ltd., 1982/ 정태현, 《성서 입문 상권 : 성서의 배경과 이스라엘의 역사》, 일과 놀이, 2000. 〔李禹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