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로데 아그리빠 (기원전 10~서기 44)

[그]'Ηρώδης · [라]Herodes Agrippa I · [영]Herod Agrippa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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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리빠 왕' 이라고 새겨진 동전 앞면(헤로데 아그리빠 시대).

'아그리빠 왕' 이라고 새겨진 동전 앞면(헤로데 아그리빠 시대).


헤로데 대왕(Herodes Magnus, 기원전 37~4)의 손자. 서 기 37~44년에 팔레스티나 일대를 다스린 로마 제국의 영주(領主, Tetrarcha). 사도 행전 12장 1절의 기록을 바 탕으로 '헤로데 아그리빠' 라고 불리지만, 그의 아들 아 그리빠 2세의 이름으로 미루어 보자면 본명은 '마르쿠스 율리우스 아그리빠' (Marcus Julius Agrippa)로 보인다. 어 린 시절 로마에서 성장하면서 훗날 황제가 되는 칼리굴 라(37~41) 그리고 클라우디우스(41~54)와 맺은 친분을 바탕으로, 헤로데 대왕이 죽은 후 셋으로 분할 · 상속된 영토를 점차 회복해 하나로 만드는 위업을 달성하였다. 〔집권 배경〕 하스모네 왕가의 핏줄을 이어받은 아버지 아리스토불루스(Amisobulus)가 역모의 의혹을 받고 처형 된 후, 아그리빠는 로마에서 성장하였다. 외할머니인 살 로메(Salome)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기원전 27~서기 14)의 부인인 리비아와 친분이 있었고 어머니 베르니게(Bemice)는 클라우디우스의 어머니 안 토니아의 친구였다. 아그리빠는 훗날 황제가 되는 클라 우디우스와는 동갑이었고, 2대 황제인 티베리우스 (14~37)의 외아들인 드루수스(Drusus)와는 3살 차이였 기 때문에 그들과 같이 교육을 받으며 매우 가까운 사이 가 되었다. 그러나 친구들에게 값비싼 선물을 하는 등 사 치스러운 생활을 하다가 어머니 베르니게가 죽은 후 엄 청난 빚을 지게 되었다. 그래서 더 이상 로마에서 생활할 수 없는 재정적인 위기를 맞았으나, 23년에 드루수스가 죽자 티베리우스가 황궁에서 아들의 친구들을 서둘러 내 보내는 바람에 부채를 갚지도 않고 팔레스티나로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생활비를 마련할 방법이 여 의치 않자, 이두매아의 한 요새에서 자살을 생각할 정도 로 우울 상태에 젖어 들었다. 그 무렵 그의 아내, 파사엘(Phasael)의 딸 키프로스 (Cypros)가 올케 헤로디아(Herodias)를 통해 헤로데 안티 파스(Herodes Antipas, 기원전 4~서기 39)에게서 티베리 아(Tiberiadis)의 시장(市場) 관리직을 주선해 주었다. 그 러나 문화 시설이라고는 거의 없는 작은 도시 티베리아 는 로마의 세련된 도시 문화에 익숙한 그에게는 따분하 기만 했기에 곧 그만두고, 로마에서 절친하게 지냈던 폼 포니우스 플라쿠스(L. Pomponius Flaccus)가 시리아 총독 으로 부임하자 32(또는 33)년에 시리아로 향하였다. 2 년 동안 플라쿠스의 울타리 안에서 생활하였으나, 총독 과의 친분을 빌미로 시돈 지역 분쟁에 간여하여 뇌물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들 사이의 오랜 우정은 끝나고 말았다. 결국 그는 자신의 운을 다시 시험해 보기 위해서 로마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다. 드루수스가 죽은 후 오랜 시일이 흘렀으므로 티베리우스도 지금쯤이면 아 들의 죽음을 이겨 내고 그 친구들을 환대해 주리라고 판 단하였던 것이다. 그는 먼저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 가서 유대인 철학자 필론(Philon Alexandrinus, 기원전 20?~서기 50?)의 형 가이우스 알렉산데르(Gaius Alexander)에게 돈을 빌려 36년에 로마로 돌아갔다. 예상대로 티베리우스는 그를 환대하면서, 칼리굴라와 함께 제국의 후계자로 지명된 티베리우스의 손자 게멜루스(Gemellus) 에게 소개해 주었다. 아그리빠는 클라우디우스의 어머니 안토니아와 사마리아 출신의 자유민들로부터 차례로 돈 을 빌려 이전에 진 빚을 청산하는 한편, 45세라는 자신 의 나이를 감안하여 10대인 게멜루스보다는 23세인 칼 리굴라의 편에 서기로 작정하고 그와 더욱 친분을 다졌 다. 칼리굴라의 부관이 된 후에는 그가 티베리우스의 뒤 를 이어 제국을 다스렸으면 좋겠다는 아부성 발언을 하 여, 역모 혐의로 근위병사에 6개월 동안 감금되기도 하 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티베리우스가 서기 37년에 서거하고 칼리굴라가 황위에 오름으로써, 아그 리빠는 티베리우스의 장례식이 끝난 후 곧바로 풀려날 수 있었다. 나아가 새로 즉위한 칼리굴라로부터 삼촌 헤 로데 필립보(Herodes Phillip)가 생전에 다스리던 영지(이 두래아와 트라코니티스)와 리사니아스(Lysanias)를 인수받 고 '왕' 의 칭호까지도 부여받았다. 그러나 영지로 즉시 부임하지 않고 로마에서 1년을 더 보내며 자신의 통치 기반을 다진 후, 서기 38년에야 호화롭게 차린 수행원들 을 이끌고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화려하게 귀환하였다. 〔집권 후의 행적〕 왕이 된 아그리빠는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주권을 과시하기 위해, 영지 에 부임하기에 앞서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하였다. 예루살 렘 성전이 있는 유다 지역은 로마 총독의 관할에 속해 있 었으므로, 그동안 해외 거주 유대인들에게 미쳤던 헤로 데 안티파스의 영향력에 제동을 걸고 하스모네 왕가의 피가 흐르는 자신의 위상을 드러내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 분봉 영주에 그친 헤로데 안티파스보다 더 높은 지위인 '왕' 에 걸맞게 수행원들까지 치장하였으니 해외 거주 유대인들이 그에게 관심을 보일 것이라는 점 은 명백하였다. 헤로디아가 남동생 아그리빠처럼 '왕' 의 칭호를 내려 달라고 로마 제국 황제에게 청원을 해보자 고 남편 헤로데 안티파스를 다그쳤던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아그리빠의 방문으로,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유 대인들과 이집트에 사는 그리스인들 사이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히르카누스 2세(Hyrcanus Ⅱ, 기원전 67~40) 와 안티파데르(Antipater)의 도움으로 체사르(Julius Caesar, 기원전 100~44)가 이집트를 정복한 이후 유대인 들은 특혜를 보장받고 있었는데, 왕의 행렬이라기에는 지나치게 화려한 아그리빠의 방문이 그리스인들의 반유 대적 경향을 더욱 고조시켜 결국 폭동이 일어난 것이다. 황제 제의를 위해 회당에 황제의 초상화를 걸어야 한다 는 그리스 측의 주장이 거부되자 로마 제국의 이집트 총 독 플라쿠스의 묵인 아래 그리스인들이 회당을 약탈하고 박해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이어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 위한 사절단을 각기 황제에게 보내는 등 일련의 어수선 한 사태는 아그리빠가 팔레스티나에 도착할 때까지도 계 속되었다. 황제령 암니아(Jammia)의 그리스인들이 세운 황제 칼리굴라의 제단을 유대인들이 무너뜨리자, 황제는 이 소식에 분노하여 39년에 시리아의 총독 페트로니우 스에게 예루살렘 성전에 황제의 초상화를 걸라는 명을 내렸다. 황제가 게르마니아 원정을 떠난 사이에 시돈에 서 이 초상화는 완성되었지만, 유대인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쳐 성전에 내거는 것은 계속 지연되고 있었다. 로마 에 돌아온 칼리굴라가 이 일을 채근하자, 아그리빠는 중 재에 나서 황제의 마음을 돌리는 데 성공하여 유대인들 의 환심을 샀다. 아울러 헤로데 안티파스가 무력을 증강 하고 있다는 의혹을 품도록 모의를 꾸며, 39년에 그를 추방하고 그의 영지(갈릴래아와 베레아)를 자신의 영토에 귀속시켰다. 아그리빠의 행운은 41년 칼리굴라가 암살된 후, 긴장 된 정국을 조정해 자신과 함께 수학한 클라우디우스가 왕위에 오르는 데 적극 개입함으로써 다시 찾아왔다. 그 는 이전에 칼리굴라로부터 받은 영토와 왕의 칭호를 재 인정받았을 뿐 아니라, 로마 총독이 다스리던 유다와 사 마리아 지역까지 영지를 넓혔다. 더구나 클라우디우스는 그의 형 헤로데 2세에게도 레바논 계곡에 위치한 칼키스 (Chalcis) 왕국을 맡기는 등 두터운 신임을 보여 줌으로 써 그의 노고에 보답해 주었다. 이로써 그는 44년에 숨 을 거둘 때까지 '위대한 왕이요 체사르의 친구이자 로마 의 친구' 라고 불린 헤로데 대왕보다 더 넓은 지역을 다 스렸다. 그의 치세는 칼리굴라 황제 아래서 필립보와 안 티파스의 영토를 다스린 4년과 클라우디우스 황제 아래 에서 헤로데 대왕의 나머지 영토까지 모두 다스린 3년으 로, 7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그쳤지만 여러 면에서 유대 인들이 국가로서 최고의 정점에 도달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업 적〕 아그리빠는 왕이 되기 이전에는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지만, 한 나라를 통치하는 데에는 탁 월한 솜씨를 보였다. 그는 대체적으로 유대인의 관습을 꼼꼼히 지키면서 그들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여, 서로 입장을 달리하는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 모두에게 호 감을 살 정도로 수완이 좋았다. 특히 유대인과 그리스인 이 뒤섞여 있는 백성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지 않도록, 친 유다 정책을 펼치면서도 유대인들의 거주지가 아닌 곳에 서는 그리스의 풍습을 그대로 시행하였다. 친유다 정책 의 일환으로, 그는 칼리굴라가 자신의 초상화를 예루살 렘 성전에 걸라고 지시하였을 때에 유대인들의 편에 서 서 황제의 마음을 돌렸으며 또한 경건한 유대인들의 반 발을 사지 않도록 예루살렘에서 주조한 동전에는 황제의 형상을 새기지 않았고, 여론을 주도하는 바리사이파의 환심을 사기 위해 42년경에는 사도 야고보를 처형하고 베드로를 잡아들이는 등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다(사 도 12, 1-19). 그런가 하면 예루살렘의 북쪽 경계를 방어 하기 위하여 베짜타(Bethsatha) 못에서부터 세 번째 성벽 을 쌓기 시작하였다. 이 공사로 유대인들의 애국심이 충 족되기는 하였지만, 시리아의 총독 마르수스의 보고를 받은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소요를 방지하기 위해 중지시켰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의 거주 지역이 아닌 곳에서는 헬레 니즘 문화를 옹호하는 정책을 폈다. 페니키아의 베리토 스(현 Bayrūt)에 세운 기념물을 장식하는 데 필요한 자금 을 아낌없이 지원하는가 하면, 가이사리아(Casarea)를 비롯한 몇몇 도시에서는 큰 검투 경기와 연극을 개최하 였다. 아울러 가이사리아와 티베리아에서 주조된 동전에 는 아무 거리낌 없이 왕이나 황제의 초상을 새겨 넣기도 하고, 자기 딸들의 상을 만들어 세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티레(Tyrus)와 시돈(Sydon)의 주민들이 그를 신이라고 외칠 정도로 통치자 제의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사도 12, 20-23). 또한 아그리빠는 자신처럼 로마 제국에 속한 동방의 왕들과 외교 관계를 맺어, 적극적으로 지역적인 이해 관 계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시리아와 소아시아의 왕들을 불러들여 회동을 갖다가 시리아의 총독 마르수스 의 제지를 받기도 하였다. 〔자 손〕 아그리빠는 아내 키프로스와의 사이에 여러 명의 아이를 두었는데, 유일한 아들인 아그리빠 2세 (28~93)는 17세의 어린 나이였기에 왕국의 후계자가 되 지 못하였다. 더구나 아그리빠가 펼친 민족주의 정책을 꺼려한 로마 관리들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나이가 찬 후 에도 유다의 인근 지역밖에 다스릴 수 없었다. 52년에는 50년에 상속받았던 헤로데 2세의 땅과 필립보의 영지를 맞바꾸고, 56년에는 네로 황제(54~68)로부터 티베리아 와 베레아 일부를 증여받았지만, 끝내 유다 영토를 다스 릴 수는 없었다. 아그리빠의 딸은 드루수스, 베르니게, 마리암메 (Mariamme), 드루실라(Drusilla) 등 4명이었는데, 드루수 스는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베르니게는 가이우스 알 렉산데르의 둘째 아들인 마르쿠스 율리우스 알렉산데르 (Marcus Julius Alexander)와 결혼하였다가 칼키스를 다스 리는 헤로데 2세와 재혼하였으나 미망인이 되어, 아그리 빠 2세와 함께 페스도(Festus)를 방문하였을 때 사도 바 오로의 증언을 경청하였다(사도 25, 13. 23 ; 26, 30). 그 리고 드루실라는 로마 행정관 펠릭스의 "유대인 아내"가 되었다(사도 24, 24). → 이스라엘 ; 헤로데 ; 헤로데 안 티파스) ※ 참고문헌  Bo Reicke, Neuststamentliche Zeitgeschichte : Die biblische Welt 500v.-100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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