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마스 (?~?)

Her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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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교부. 헤르마스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의 유일한 저서인 《목자》(Pastor)의 내용과 다른 교부들의 증언에 따르면, 원래 노예였으나 해방되어 자유인이 된 후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고 장사를 하였고, 박해 시기에 모든 재산을 잃은 것 같다. <무라토리 단편> (Fragmentum Muratorianum)에 따르면 교황 비오 1세 (142~154/155?)의 동생이라고 한다. <목동>이라고도 번 역되었던 《목자》는, 다섯 번째 환시에서 계시자인 회개의 천사가 '목자' 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데에서 지어진 제목이다. 첫 4세기 동안 교회에서는 로마의 교황 글레멘스 1세(90/92~101?)나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Ignatius Antiochenus, 35?~107)를 비롯한 다른 사도 교부들의 작품 보다 더 큰 인기를 누렸으며, 일부 공동체에서는 공식적으로 낭독되고 경전으로 인정되기도 하였다. 〔필사본과 구성〕 《목자》의 필사본은 매우 오래되었다. 본문 전체가 실린 것은 200년경에 씌어진 불가타(Vulgata)와, 4~5세기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팔라티나 라틴어 역본' 뿐이다. 그리스어 필사본으로는 계명 2편부 터 비유 9편까지의 단편을 실은 미시건 파피루스(3세 기),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다음에 <바르나바의 편지>와 헤르마스의 《목자》를 덧붙인 시나이 사본, 아홉 번째 비유(Ⅸ 30, 3)로 끝나는 아토스 사본이 있다. 그 외에 에티 오피아 역본, 사히드어 단편, 콥트어, 중-페르시아 역본이 남아 있다. 《목자》를 다섯 편의 환시(visio, 이하 Vis.), 열두 편의 계명(mandatum, 이하 Man.), 열 편의 비유(similitudo, 이하 Sim.)로 분류한 가장 오래된 라틴어 전승의 전통적 분류 방식은 현재까지도 학자들 사이에 널리 통용되며, 최근 에 교부학자인 위타커(W. Whittaker)와 졸리(R. Joly)는 《목자》를 114장으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세 부분으로 나뉜 각 본문의 유형이 일정하지 않고 내용도 일관성이 없어서, 이 작품의 구성과 문학 유형에는 아직도 논란이 많다. 구성이 이처럼 복잡하기 때문에 《목자》의 저자가 한 명인지 여러 명인지에 대한 논의도 분분하였으나, 문 헌학적 연구와 여러 가지 문학적 특징, 주제 및 문체가 일치하는 점 등으로 오늘날에는 저자가 헤르마스 한 명 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저술 장소와 시기〕 《목자》의 저술 장소와 시기에 관해서는 믿을 만한 직 · 간접 보고들이 있다. 헤르마스는 자신을 로마 교회의 그리스도인으로 소개하였고, 후대의 그리스도교 문헌들에도 《목자》가 로마에서 집필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관해서는 오늘날 거의 모든 학자가 의견을 같이한다. 《목자》에는 저술 연대를 직접 산정할 수 있는 내용이 나오지 않지만, 다른 문헌이나 <목자> 의 개별 내용을 고려하여 상대적 · 연대기적 저술 시기를 추론할 수 있다. 이에 관한 가장 중요한 문헌이 <무라토리 단편>으로, 헤르마스는 "그의 형제인 비오 주교가 로 마 교회의 주교였을 때, 최근에···로마에서 《목자》를 저 술하였다" 라고 한다. 또한 354년 《리베리오 교황표》 (Catalogus Liberianus)도 이러한 연대기적 주장을 뒷받침 한다. 이와 함께 《목자》에 나타나는 교회 개념, 당시 로 마 교회에 단일 주교가 없었다는 점, 마르치온(Marcion, ?~160?)이나 발렌티누스(Valentinus, ?~?)와 같은 그노시 스주의자가 일으킨 로마 교회의 동요나 150년 이후 도 처에서 발생한 몬타누스주의(Montanismus)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은 점 등은 이 작품이 150년 이전에 저술되었음을 암시한다. 〔참고 문헌〕 당시 저술가들은 작품을 집필할 때 일반 적으로 다른 작품을 많이 인용하였으나, 《목자》에는 그리스도교나 유대교, 이교 문헌을 직접 인용한 흔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성서를 직접 인용하는 유일한 문장은 타르(תרגום)에서 언급되는 묵시록 <엘닷과 메닷>(Vis. Ⅱ, 3 ; 참조 : 민수 11, 26-29)이다. 계명 6~8편은 《열두 족장의 유언》, 《에티오피아어 에녹서》, 《제4 에즈라서》와 유사한 점이 있다. 그 밖에 쿰란 공동체 규칙과 비교해 보면, 유대계 그리스도교의 영향은 받았어도 에세네파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헤르마스가 《목자》를 집필할 당시 성서의 일부가 이미 라틴어로 번역되었기에 그 또한 복음서의 일부 내용들을 알고 있었지만, 이를 의 역하거나 간접적으로만 인용한 것 같다. 마태오 복음 5 장 28절의 "마음으로" 간음하는 것은 환시 1에서 여러 번 언급된다. 또한 악한 포도원 소작인에 관한 공관 복음 서의 비유(마태 21, 33-46)가 비유 5에서 착한 포도원 소작인에 관한 비유로 나오는데, 공관 복음 전승과 다르게 예수가 착한 포도원 소작인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이끌어 낸다. 사도 바오로의 편지 가운데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전제되며, 육과 영의 일치 (Sim. Ⅸ, 13)는 에페소서 4장 4절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특히 야고보서와의 상관 관계가 매우 밀접하다. 그 밖에 《디다케》(1, 5)와 계명 2(Man. Ⅱ, 4-6)의 유사성은 문학적으로도 관련이 있으며, 두 구절 모두 공통된 원전 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육체에 영이 거주하고 (Sim. V, 7),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하는 동료 그리스도인의 자아 도취(Sim. Ⅸ, 22)에 관한 언급은 그노시스주의(Gnosticism)와는 무관하다. 이교 문헌 가운데 헤르마스가 참고하였을 것으로 추정 되는 작품으로는 헤르메스(Hemes)의 <포이만드레스> (Poimandres)와 <체베스의 대화>(Tabula des Ps. Cebes)가 있다. 이교인 목자상, 덕과 악덕에 관한 목록, 이교인의 연애, 회개에 대한 서술 등 여러 가지가 유사하나, 이러 한 유사성 때문에 헤르마스가 이교인의 작품들에 의존하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포이만드레스>는 헤 르마스와 동시대이거나 약간 후대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체베스의 대화>와의 유사성은 다른 문헌에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주요 주제〕 회개 : 헤르마스가 주된 주제로 선포하는 회개는 교직의 형태도 전례적 형태도 아니다. 그가 제시 하는 고백은 개인적인 죄 고백을 뜻한다. 또한 개인적 회개는 고백하는 그 사람의 가족에 도움이 되고 궁극적으로 그들의 구원에 영향을 미치는 대리적(代理的)인 의미가 있다(Vis. I, 3, 1 ; Sim. VII, 2-3). 회개는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는 것이며, 그곳에서 죄인들의 회개에 관한 기쁨은 수많은 의인들에 관한 기쁨보다 더 크다. 이 점에서 헤르마스는 아직도 전적으로 원시 그리스도교 전통에 머 물러 있다. 헤르마스는 중죄(죽을 죄)에 대한 회개를 한 번으로 제한하고, 배타적으로 기한을 고정하였는데(Vis. Ⅱ, 2, 5 : Ⅲ, 5, 5 : Sim. IX, 14, 2), 이러한 내용은 그가 도입한 것 같다. 헤르마스가 반복할 수 있는 회개 관습을 한 번으로 강화하였는지, 아니면 세례로만 제한된 회개 관습을 완화한 것인지에 관해서는 아직도 논란 중이다. 회개 기한을 제한한 헤르마스에게서 회개 선포의 특징은 죄인들이 지체없이 회개하고 더 이상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사목 교육적 틀에서 이해해야 한다. 170년경 고린토(Corinthios)의 디오니시오(Dionysius, ?~?)도 회개에 대해 이와 같은 사목을 펄쳤다(에우세비오, 《교회사》, 6, 23, 6). 윤리적 입장 : 헤르마스는 윤리적 견해에서 매우 유연하다. 2세기에 세 가지 중죄로 여긴 우상 숭배와 간통(간음), 살인 중에서, 살인은 그리스도교인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기에 《목자》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구체적으로 배교라고 인정한 우상 숭배는 가장 중한 죄로, 용서받을 수도 없으며 영원한 죽음을 불러온다(Sim. Ⅵ, 2, 3-4 ; VIII, 6, 4 : IX, 19, 1). 이는 간통에도 적용된다 (Man. 12. 2). 이러한 원칙적 입장과 달리 다른 구절에서는, 진심으로 주님을 부인하지 않은 배교자, 이단자, 겉으로만 참회한 간통자들에게 회개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하지만 이들의 회개 기회는 한 번뿐이다(Sim. VIII, 6, 5 ; VIII, 8, 5 : Ⅸ, 26 : Man. IV). 헤르마스의 성 윤리는 금욕적이지만 그리 엄격하지는 않았다. 결혼 이외의 성적 욕구는 물리쳐야 하되(Man. IV ; VI, 명시적으로 결혼에서 절제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더욱이 과부들의 결혼도 허용한다(Man. IV, 4). 그의 사회 윤리관은 주로 사회 정의, 곧 가난한 이와 부자 사이의 갈등, 그리스도인과 소유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헤르마스는 재화의 궁극적 목표를 분명히 밝히면서-"너희가 주님께 이러한 봉사를 하도록 그분은 너희를 부유하게 만드셨다" (Sim. I, 9)-부자들 에게 재화를 올바로 사용하도록 권고하였다. 열매 맺지 못하는 느릅나무를 타고 오르는 포도나무 비유에서 헤르 마스는, 부자들에게만 일방적으로 가난한 이들의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도 부자들 이 필요로 하는 것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상호 보완적 인 긍정적 요소를 강조하여, 그리스도교에서 부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예고하고 있다. 이후의 저술 가들도 이러한 그의 입장을 받아들였다. 교회와 영 : 헤르마스의 작품을 통해서 130년경 로마 교회의 상황들을 추론할 수 있다. 그의 작품에서 부수적으로 언급되는 세례는, 도덕적 품행이 뒤따르지 않으면 구원을 보증해 주지 않는다(sim. VIII, 2 : Ⅸ, 13, 31). 교회 제도사적으로 볼 때 이 작품에 나오는 목자상은 주교로 규정되지 않으며, '예언자-순교자 교회' 와 '교직자 교회' 의 투쟁 조짐이 나타난다. 이냐시오가 주장한 단일 주교직은 나타나지 않으며, 오히려 헤르마스가 지향하는 교회는 회개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의 모임인 '예언적 영-교회' 이다.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요소는 영의 활동과 회개의 준비라는 점에서 헤르마스는 원시 그리스도교와 바오로 사상을 따랐지만, 교회와 그리스도를 동일시 하지 않는다. 그는 교회를 거룩한 영의 모습으로 묘사하 며(Sim. IX, 1), 영을 교회 개념 앞에 놓는다. 왜냐하면 영은 세계 창조 이전의 존재이고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였 기' (Sim. V, 6, 5) 때문이다. 따라서 헤르마스는 교회도 선 재(先在)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Vis. Ⅱ, 4, 1). 헤르마스는 《목자》에서 영의 개념을 의인화하며 대구적으로 표현하였다. 곧, 영은 선과 악, 선과 악덕, 인간 의 도덕적 장점과 결점에서 우의(寓意, allegory)로 등장한다. 특히 그리스도론적으로 표현된 영은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있는 영의 개념과 대조를 이룬다. 《목자》에는 그리스도론이 없다. 헤르마스는 어디에서도 예수와 그리 스도를 언급하지 않고, 대신 '주님의 이름' , '하느님 아들의 이름' ,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천사 라고 말하였다. 하느님 창조의 능력은 옛부터 영이다. 이 때문에 예수의 역사는 영론(靈論)으로만 이해된다. 이러한 영론에서 윤 리와 그리스도론은 일치한다. 곧 온 세상을 뒤덮은 버드 나무 표상에서, 영은 온 세상에 주어진 율법이고 세상 끝 까지 전파된 하느님의 아들이다(Sim. VIII, 3). 육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의 탄생, 특히 지상에서 살았던 예수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이러한 '영-그리스도론' 은 극단적으로 유대대계-그리스도론' 이라는 인상을 준다. 이는 '종-그리스도론' 에 관한 이해에도 적용된다. 하느님의 아들은 예수가 아니라 하느님의 선택된 종인 예수 안에 머무는 거룩한 영이다. 하느님의 종은 육체 안에서 영을 섬기고 서로 협력하면서 영과 공동 상속자가 된다(Sim. V, 5-6 : Ⅸ, 12). 그러나 하느님의 종이 영에 종속되거나 하느님의 양자로 받아들여진다는 그의 그리스도론, 곧 그리스도 양자설(adoptianismus)과 종속설은 교의사의 주류에서 벗어난 이단이다. 〔영향과 평가〕 헤르마스 바로 다음 세대의 인물로 로마에서 활동한 유스티노(Justinus, 100/110?~165)가 선재 로고스론으로 헬레니즘 그리스도론의 바탕을 놓은 뒤, 하느님의 종에 관한 유대계-그리스도론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없었다. 유스티노, 히폴리토(Hippolytus, 170~ 236), 특히 325년 니체아 공의회의 반(反)아리우스적 그 리스도론에 따르면 헤르마스의 그리스도론과 삼위 일체론은 위험한 것이었기에, <무라토리 경전>도 《목자》의 정경성을 부인하였다. 더불어 그노시스주의와 몬타누스 주의로 불거진 예언과 계시에 대한 부정적 분위기 탓에, 반그노시스적 · 반몬타누스주의적인 《목자》는 묵시 문학의 틀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이러한 공식적 견해에도 불구하고 《목자》는 개인 독서와 매우 유익한 교화 서로 통하였다. 또한 '무에서의 창조' 에 관한 가르침을 여러 차례 인용한 리용의 이레네오(Ireneus Lugdunensis, 130/140~202?)는 《목자》가 거의 정경적 명성을 지닌 작품이라고 평가하였다(《이단 논박》 4, 20, 2 : 1, 15, 5 ; 1, 22, 11 ; 2, 10, 2 : 2, 30, 9). 200년 뒤 예로니모 (Hieronymus, 347~419)가 《목자》를 '라틴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명인록》 10) 작품이라고 평가하였다고 해서, 그것이 서방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배제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루피노(Tyrannius Rufinus, 345~410), 가 시아노(Joannes Cassianus, 360?~432/435), 교황 그레고리 오 1세(590~604)도 이 작품을 아주 잘 알고 있었으며, 중세에도 때때로 인용되었고, 16세기에는 루터(M. Luther, 1483~1546)의 이원론적 사고 구조와 두 천사론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현대에는 심리학자인 융(C.G. Jung, 1875~1961)이 《목자》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반면, 동방 교회에 미친 헤르마스의 영향은 상당하다. 《목자》가 이집트에서 정경으로서의 명성을 지녔다는 내용이 기록된 파피루스 전승과 시나이 사본은 매우 많다. 알렉산드리아의 글레멘스(Clemens Alexandrinus, 150?~ 215)는 <목자》의 내용을 높이 평가하여 많이 인용하였으 며, 오리제네스(Origenes, 185~253)도 헤르마스가 '무에서의 창조' (Man. I, 1)에 관한 가장 오래된 교사라고 존경 하였다(《원리론》 I, 서언, 4 ; 1, 3, 3 : 2, 1, 5). 그는 헤르마스를 로마서 16장 14절에 등장하는 헤르마스와 동일시 하고(《로마서 주석》 10, 31) 많이 인용하였지만, 《목자》를 '거룩한 책' 으로 평가하지는 않았다(《마태오 복음 주석》 14, 21). 오리제네스의 제자인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 (Eusebius Caesariensis, 260/265?~339)도 《목자》가 세례 지원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책이며 공식 미사에서 낭독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이 작품을 외경으로 여겼다.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Athanasius Alexandrinus, 295?~373)는 이 작품의 유용성에 결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지만, 신약성서 목록에서 제외시킨 것 은 분명하다(367년 제39차 부활 대축일 서간). (→ 무라토리 ; 사도 교부) ※ 참고문헌  N. Brox, Der Hirt des Hermas, (KAV) 7, Göttingen 1991/ -, Hermas, Hirt des Hermas, 《LThK》 3, 1995, Pp. 1448~1449/ E. Dassmann, Kirchengeschichte 1, Stuttgart · Berlin · Köln, 1991/ C. Osiek, The Shepherd of Hermas, Fortress, 1999/ R. Staats, 《TRE》 15, 1981, PP. 100~108/ 하성수 역주, 《헤르마스의 목자》, 교부문헌총서 14, 분도출판사, 2002. [河聖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