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트비히 (1174?~1243)

Hedw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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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트비히 성녀.

헤트비히 성녀.


성녀. 폴란드의 슐레지엔(Schlesien) 공작 부인. 슐레 지엔의 수호 성인이며 축일은 10월 16일. 1174년경 바이에른(Bayem)의 안데흐스(Andechs) 성에서 베르톨트(Berthold) 공작의 여덟 자녀 중 하나로 태 어났다. 네 명의 남자 형제들 중 두 사람, 즉 밤베르크 (Bamberg)의 에크베르트(Ekber)와 아퀼레이아(Aquileia)의 베르톨트는 훗날 주교가 되었으며, 오토(Otto)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현재 크로아티아에 있는 달마치야 (Dalmacija)의 공작이 되었고, 하인리히(Heinich)는 현재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로 분리되어 있는 이스트라 (Istra)의 후작이 되었다. 세 자매들 중 아네스(Agnes)는 1196년 6월 프랑스 왕 필리프 2세(1179~1223)와 결혼 하였으나, 왕의 전처인 잉게보르크(Ingeborg)가 이의를 제기하여 교황 철레스티노 3세(1191~1198)에 의해 혼인 무효를 선언받았다. 필리프 2세는 이를 거부하다가 교황 인노첸시오 3세(1198~1216)가 1200년 1월 프랑스에 성 무 집행 정지를 선언하자 결국 승복하였으며, 2명의 아 이를 낳은 아네스는 1201년에 세상을 떠났다. 헝가리의 왕비가 된 또 다른 자매 제르트루다(Gertruda)는 성녀 엘 리사벳(Elisabeth Hungariae, 1207~1231)의 어머니이며, 메 흐틸드(Mechtilde)는 키칭겐(Kitzingen)의 수녀원장이 되었다. 전기에 따르면 헤트비히는 어렸을 때 키칭겐의 수도원 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교육을 받았고, 12살이 되던 1186년 슐레지엔의 하인리히 1세와 결혼하였다고 한다. 어머니가 독일인이었던 하인리히 1세는 스스로 독일에 가서 공부를 하였고, 헤트비히와 결혼하여 독일과 더욱 가까운 관계가 되었다. 1202년 아버지 볼레수아프(Boleslraw)의 뒤를 이어 슐레지엔의 공작이 된 하인리히 1세 는 영토를 확장하고 권력의 기반을 확고히 다졌으며, 자기 영토를 문명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열정적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독일의 발전된 문화를 공국에 접목시키려고 심혈을 기울여, 슐레지엔의 언어와 관습을 독일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헤트비히는 남편의 선정에 많은 내조를 하였다. 그녀 의 신중함과 강인함, 그리고 경건함은 통치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새로운 수도원들의 건립과 기존 수도원들의 유지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 독일의 문화 가 슐레지엔에 전파되는 주된 경로가 수도원들이었던 것이다. 하인히리 1세와 헤트비히는 로이부스(Leubus)의 시토회 수도원, 프레몽트레(Prémontré) 수도원, 브로추아 프(Wrocław, Breslau)의 성 아우구스티노 참사 수도회의 설립을 아낌없이 후원하였으며, 남부르크(Namburg) 아 우구스티노회 수도원(1217), 하인리샤우(Heinrichau)의 시토회 수도원(1227), 카멘츠(Kamenz)의 아우구스티노 참사 수도회(1210) 등도 뒤이어 설립되었다. 헤트비히는 도미니코회 회원들을 분츨라우(Bunzlau)와 브로추아프 에 받아들였고, 후에 크로센(Krossen)으로 옮겨간 프란 치스코회 회원들을 골트베르크(Goldberg)에 받아들였으 며, 성전 기사 수도회는 클라인-오엘스(Klein-Oels)에 공 동체를 세웠다. 노이마르트(Neumart)의 병원에서 나환 자 여성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아내의 활동에 감동을 받은 하인리히 1세는 트레브니츠(Tebniz)에 있는 자신 의 땅에 시토회 수녀원을 지어 기부하였다(1202). 이 수 녀원은 슐레지엔에 세워진 첫 번째 수녀원으로, 초대 원 장은 페트루사(Petrussa)였고 그 뒤를 이은 사람은 하인 리히 1세와 헤트비히 사이에서 태어난 제르트루다였다. 제르트루다는 어린 나이에 비텔스바흐(Wittelsbach)의 오 토(Otto)와 정혼하였으나 그가 독일 호엔슈타우펜 가문 의 왕인 슈바벤의 필리프(Philipp von Schwaben, 1196~ 1208)를 살해하자, 파혼하고 트레브니츠의 수녀원에 입 회하여 훗날 원장이 되었다. 1227년 포메른(Pomorze)의 공작 스반토폴크(Swantopolk)가 하인리히 1세와 산도미르(Sandomir)의 레스코 (Lesko) 공작을 공격하여, 레스코 공작은 죽고 하인리히 1세는 중상을 입었다. 이 사건으로 크라쿠프(Kraków)에 대한 소유권을 둘러싸고 하인리히와 마조프세(Mazowsze)의 콘라트가 전쟁을 벌이게 되었는데, 싸움에서 패 한 콘라트는 하인리히가 미사에 참석하고 있는 동안 쳐 들어와 그를 플록(Plock)으로 잡아갔다. 이에 헤트비히는 남편을 돕기 위해 콘라트를 찾아갔고, 그녀의 행동에 감동한 콘라트는 하인리히를 석방하였다. 헤트비히는 결혼 후 거의 브로추아프에서 살았다. 일 곱 명의 자녀 중 1남 2녀(브레슬라프, 소피아, 아네스)는 어린 나이에 사망하고, 남은 자녀들 중 하인히리는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았고 제르트루다는 수도 생활을 택하였으며, 콘라트(Conrad)는 말에서 떨어져 요절하였다 (1214). 1208년에 막내 아들이 세례를 받은 이후, 헤트비히의 제의로 그들 부부는 동정을 지키며 살기로 결심하고 이듬해에 브로추아프의 주교 앞에서 정결 서약을 하였다. 하인리히 1세는 시토회의 평신도 회원들처럼 삭 발례를 하고 수염을 길렀으며, 헤트비히는 대다수의 시간을 트레브니츠의 수녀원에서 보냈다. 그러다가 1238 년 하인리히 1세가 사망하자 유산으로 받은 샤보이네 (Schawoine) 지역을 수녀원에 기부하고 거처를 완전히 옮겨서 금욕과 기도와 자선 활동에 전념하였다. 일곱 자 녀 중에 헤트비히보다 오래 산 것은 제르트루다뿐이었다. 아들 하인리히 2세는 1241년 타타르족(tatar)과의 전 쟁 중에 레그니차(Legnica, Wahlstatt)에서 전사하였다. 남편이 죽은 후 헤트비히는 시토회의 회색 수도복을 입었지만, 수도회에 입회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수입으 로 자선 사업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극도의 금욕 생활을 하면서 병자와 가난한 이들을 돌보 는 그녀의 열심한 신앙 생활과 사랑에, 살아 있는 동안 이미 성인으로 불렸으며, 1243년 10월 15일 트레브니츠의 수녀원에서 세상을 떠나 수녀원의 성당에 안치되었다. 1267년 3월 26일 교황 글레멘스 4세(1265~1268)에 의해 시성되었다. 1814년 스피스케(R. Spiske, 1821~1888) 신부는 헤트비히를 주보 성인으로, 고아와 버려진 아이들의 교육을 목표로 하는 여성과 소녀들의 신심 단체를 만들었다. 이 단체는 이후 1859년 아우구스티노 수도 규칙을 따르는 성 헤트비히 수녀회가 되었다. (→ 엘리사벳, 헝가리의) ※ 참고문헌  M.-B. Brard, 《Cath》 5, p. 559/ D. Farmer, Oxford Dictionary of Saints, Oxford Univ. Press, 1996, p. 2251 W. Marschall, 《LThK》, 1995, pp. 1237~1238. 〔宋炯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