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펠레, 카를 요제프 폰 Hefele, Karl Joseph von(1809~1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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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펠레.

헤펠레.


주교. 교회사가. 교황의 무류성(無謬性, infallibilitas) 교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지만, 교황 지상주의(UItramontanismus)에 있어 온건한 입장을 천명함으로써 제1 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 이후 독일에서 발생한 이단인 구가톨력교(Altkatholizismus)에 맞선 신학자. 〔생애와 활동〕 1809년 5월 15일에 독일 뷔르템베르크(Württemberg)의 운터코헨(Unterkochen)에서 태어났으며, 튀빙겐(Tübingen)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였 다(1827~1832) . 1833년 8월 10일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이듬해에는 튀빙겐의 빌헬름스티프트(Wilhelmsstift)에 서, 그 다음해에는 로트바일(Rottweil)의 김나지움에서 교직 활동을 하였다. 1835년 11월 11일에 튀빙겐 대학교 가톨릭 신학부의 교회사 강사가 되었으며, 1836년부 터 독일 가톨릭 튀빙겐 학파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될러 (J.A. Möhler, 1796~1838)를 이어 교회사, 교부학, 그리스 도교 고고학 등을 가르쳤다. 1838년 1월 24일에 교의 신학 조교수로 임명되었으며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듬해 12월 5일에 정교수 임명이 거부되었으나, 1840 년에 정교수가 되었다. 뷔르템베르크의 엘방겐(Ellwangen) 지방 의회 위원으로 활동하던 1842~1845년 당 시, 교회가 정부의 감독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켈러 (Johann Baptist von Keller, 1774~1845) 주교의 주장과 노력을 지지하였다. 1852~1853년에 튀빙겐 대학의 학장을 역임하였으며, 1868년 12월부터 1869년 4월까지는 로마로 가서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준비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발언권은 교황에게 위임하고, 공의회가 선출하는 24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네 개의 상임 위원회가 결의 사항들을 문서화하도록 한다는 공의회의 의사 규칙은 그의 주도로 마련되었다. 1869년 5월 3일에 립(Josef von Lipp) 주교 가 사망하자 7월 17일에 로텐부르크(Rottenburg)의 주교 로 선출되었다. 9월에 풀다(Fulda)에서 개최된 독일 주 교 회의에서 교황 무류성 교의에 대하여 강력하게 반대 입장을 천명하는 그의 주교 선임을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그해 11월 22일에 주교 서품을 받고 12월 29일 에 로텐부르크의 주교좌에 착좌하였다. 헤펠레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제기된 교황의 무 류성 문제에 반대하는 소수파였다. 그는 풍부한 교회사 지식을 바탕으로, 특히 교황 호노리오 1세(625~638)의 예를 들며 교황 무류성 정의를 반대하였으며, 이 문제를 공의회의 의제로 채택하는 것도 반대하였다. 반대파는 모두 교황청의 압력을 받았고, 특히 그는 지도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이었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그러나 그는 1870년 7월 13일 예비 투표에서 반대표를 냈으며, 교황 이 사회를 보는 회의에서 반대 의사를 표명하기 죄송스 러워 최종 투표에는 참가하지 않겠다며 7월 17일 로마 를 떠났다. 그는 신학자로서의 소신에 따라 행동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9월 중순에는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기를 권고하는 사목 교서를 발표하였으며, 이듬해 4월 10일에는 공의회의 헌장을 발행하였다. 이후 건강이 매우 악화되었으나, 헤펠레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특유의 신중한 성격으로 문화 투쟁(Kulturkampf)의 혼란 속에서도 교구를 보호하며 계속 활동하였다. 1893년 6월 5일에 세상을 떠나 로텐베르크 쉴헨 (Sülchen) 성당의 주교 묘지에 묻혔다. 〔사상과 저술〕 교회와 정치에 대한 입장 : 교회와 정치에 대한 헤펠레의 입장은 초기 튀빙겐 시기에 이미 결정 되었다. 당시 그는 가톨릭 신학부와의 긴밀한 관계를 상실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헤펠레는 이때 쟁론의 발기인 으로 지목되었다. 당시에는 일명 '계몽자들' (Aufklärer) 과, 그들의 주장에 맞서 교황청과 더욱 강한 결속력을 지니고 교회를 통제하는 국가로부터 더 많은 자유를 얻어 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묄러파' (Möhlerianer)가 있었다. 1837년 이래 소위 '청년 교회파' (Jungkirchler)와 '묄러 파' 는 학부를 장악하고 있었고, 이후 유럽에서 교황 지 상주의를 따르는 이들을 선도하였다. 뷔르템베르크의 성 직자들 중 일부는 정부 측과 공공연한 투쟁을 벌였으며, 튀빙겐의 교수 마크(Martin Joseph Mack)는 교회에 대한 국가적인 통제를 날카롭게 비난하였다. 이에 맞서 정부 측에서는 '계몽자들' 을 학부로 불러들여 '청년 교회파' 와 그들의 영향력에 반대하는 세력을 조성하였다. 한편 1841~1842년에 켈러 주교는 지방 의회에 가톨릭의 국 가적 보수파의 제한과 주교 관할권의 갱신을 요청하는 두 가지 제안을 하였다. 이때도 헤펠레는 쟁론의 발기인 으로 지목되었다. 켈러 주교가 사망한 후 1847년까지 후임자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군(J.E. Kuhn)과 헤펠 레가 교황청을 지지하는 입장에 있던 사람들의 후보자로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헤펠레는 1848년 이후 교회와 국가 관계의 새로운 질서에 관한 변론으로, 그때까지 유지되던 국가의 교회 종 속이나 날카로운 분리가 아닌 협력의 입장을 앞세웠다. 그는 정교 조약에 관한 변론을 통해서 교회법을 확장시켜 신학적 구조를 새롭게 형성하고자 하였다. 이것이 '청년 교회파' 내의 분열을 유도하였으며, 최종적으로는 당시의 영향력 있는 인물이던 케텔러(W.E. von Ketteler) 와 교황 대사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청년 교회파' 내 의 '온건파' 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궁정이나 정부 측과 친밀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주교직 : 헤펠레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시기부터 주교로 재임하였으나, 당시 공의회 활동과 결부된 그의 활약은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그는 로마에서 돌아온 후 마치 깊은 미몽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사실 헤펠레가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위원으로 임명된 것은 교황청에서 활동하는 예수회 측의 정치적 방책이었다. 그들은 공의회 위원회가 받게 될 비난의 화살을 모면하고자 하였 던 것이다. 그러나 헤펠레는 1870년 7월 17일 의사 표 명을 거부하고 로마를 떠나기로 한 자신의 결심에 대해, 이후 반복해서 회의를 표명하였다. 그는 교황청의 신임을 얻지 못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독일 주교좌에 완전히 고립되었으며, 교구 내의 교황 지상주의자들의 반대도 거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펠레는 매우 비관료적으로 주교 직무를 수행하였다. 스스로 많은 교령을 입안 하였던 그는, 온갖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자율적이었던 반면 엄격하였다. 또한 협력에의 의지와 자유로운 실용주의 정신으로, 뷔르템베르크 왕국이 문화 투쟁을 모면할 수 있도록 전력을 기울였다. 주요 저서 : 교회사가로서 헤펠레의 작품은 실로 방대하지만, 보통 쉽고 빠르게 글을 썼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면밀함과 비판이 결여되기도 하였다. 그는 1868~1869 년에 트리엔트 공의회를 설명하기 위해 인쇄되지 않은 자료들을 조사하였다. 헤펠레의 주요 저작은 《공의회사》(Konziliengeschichte, vols. 7, 1855~1874)이다. 이 작품은 단지 '보편 공의회' 의 전개 과정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회의도 언급하고 있으며, 18세기 공의회 우위설에 반대하는 호교적 인 경향이 강하다. 헤펠레는 '보편 공의회' 의 정의를 전 적으로 벨라르미노(R.F.R. Bellarminus, 1542~1621)의 견 해에 따라 확립한 듯하며, 이는 기존의 정의에 머무르며 역사 비판이라는 역사학적인 성취를 단념한 것이다. 기타 학술 활동 : 헤펠레는 튀빙겐 대학교에서 교회사, 교부학, 그리스도교 고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1848년에는 윤리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그리스도교 고고학의 개념을 확장하여, 17세기까지 그리스 도교 생활의 외적인 부분까지 다루고자 하였다. 그의 강의는 알기 쉽고 잘 짜여진 것이었기에 학생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유머가 풍부하고 기지 넘치는 인물로 인정을 받았다. 〔평 가〕 개성적인 자유 정신을 갖고 온건한 교황 지상 주의를 심화시키고자 하였던 헤펠레는, 교회사가로서 날 카로운 탐구자는 아니었다. 그는 당시의 지배적인 형태 를 그저 고정시켜 전달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1870년 이후 그의 영향으로 뷔르템베르크의 구가톨릭교는 소수 에 머물게 되었으나, 또한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황 무류성 결정으로 튀빙겐 대학교의 가톨릭 신학부는 물론 다른 대학 즉 뭔헨(München), 본(Bonn), 브레슬라우 (Breslau)의 학부들도 깊은 혼란 속으로 내몰렸다. 헤펠레는 1871년 4월의 훈령 공포 결정에 따라 이러한 상황에 대한 혹독한 대가를 짊어져야 하였으며, 이후 로텐베르크 교구의 후임 교구장들은 헤펠레의 정치적 노선을 포기하였다. (→ 묄러 ; 무류성 ; 바티칸 공의회, 제1차) ※ 참고문헌  V. Conzemius, 《NCE》 6, p. 704 1 Rudolf Reinhardt, 《TRE》 14, pp. 526~529/ H. Jedin, 최석우 역, <세계 공의회사》, 신학 텍스트 총서 2.3, 분도출판사, 2005. 〔편찬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