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Händel, Georg Friedrich(1685~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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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델.

헨델.


독일 출신의 영국 작곡가. 바흐(J.S. Bach, 1685~1750)와 함께 바로크 시대 최고의 작곡가로 꼽힌다. 〔생 애〕 초기 생애 : 1685년 2월 23일 독일 중부 작센 지방의 할레(Halle)에서 태어났다. 바이센펠스(Weissenfels) 궁정 아돌프 백작의 전속 의사인 게오르크 헨델 (Georg Händel, 1622~1697)이 첫 부인과 사별하고 29세 연하인 목사의 딸 도로테아(Dorothea Taust, 1651~1730)와 재혼하여 낳은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기에 아버지는 아들이 법학을 공부하기를 원하였으나, 음악가였던 백작이 헨델의 음악적 재능을 확인하고 그에게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 시킬 것을 권고하여 할레의 마리아 교회 오 르간 연주자였던 차코브(F.W. Zachow)에게 음악 교육을 부탁하였다. 차코브는 대위법과 화성학 등 기초적인 작 곡 이론은 물론, 프로베르거(J.J. Froberger, 1616~1667) , 크리거(J.P. Krieger, 1649~1725), 케를(J.C. von Kerll, 1627~1693), 슈트룽크(N.A. Strunck, 1640~1700) 등 독일 작곡가들과 유명 외국 작곡가들의 작품들을 두루 소개하며 헨델의 음악적 소양을 탄탄하게 다져 주었다. 헨델은 11세 때부터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였고 공식 행사에서 스승 대신 오르간을 연주하기도 하였다. 헨델은 아버지를 잃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1702년 아버지의 유지대로 법학 공부를 시작하기도 하였지만, 곧 주교좌 성당(Domkirch)의 오르간 연주자로 본격적인 음악가로서의 삶을 시작하였다. 텔레만(G.P. Telemann, 1681~1767)과 음악사가 마테존(J. Mattheson, 1681~1764) 은 이 시기를 돌아보며 헨델이 "라이프치히(Leipzig)의 노대가(老大家) 쿠나우(J. Kuhnau, 1660~1722)보다 오르간을 더 잘 연주하고···그의 푸가와 대위법, 특히 즉흥 연 주는 대단했다" 라고 하면서 "나는 이때에 이미 작곡의 모든 것을 터득하였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마치 귀신 처럼 작곡하였다"는 헨델의 회고담도 전해준다. 헨델은 돔 교회의 수습 기간이 끝난 후 계약이 갱신되지 않자 1703년 베를린으로 가서 프러시아 궁정의 오페라 작곡가 보논치니(G. Bononcini, 1670~1747)와 아리오스티 (O.A. Ariosti, 1666~1740)를 만났다. 이탈리아인인 아리 오스티는 헨델에게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최신 음악을 소개해 주었다. 헨델의 전기 작가들은 오페라 작곡에 대한 헨델의 관심이 이때 처음 싹텄다고 본다. 1703년 여름에 헨델은 마테존, 텔레만과 함께 북스테 후데(D. Buxtehude, 1637~1707)를 만나러 뤼베크(Liibeck)의 마리아 교회를 방문하였으나, 후임 오르간 연주자가 되어 달라는 요청은 거절하였다. 무엇보다 한 직장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고, 후임자는 현재 오르간 연주자의 자녀이거나 사위여야 하므로 북스테후데의 과년한 딸과 결혼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헨델은 독신으로 살고자 하였고, 실제로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같은 해에 헨델은, 1678년 첫 시민 오페라 극장이 설립된 이래 독일 오페라를 선도하던 함부르크(Hambug)로 이주 하여 카이저(R. Keiser, 1674~1739)가 이끄는 오페라 극장 관현악단의 바이올린 연주자로, 이듬해부터는 첨발로 연 주자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704년 극장의 총감독을 겸한 오페라 작곡가 카이저와의 경합 차원에서 첫 오페 라 <알미라>(Almira, HWV〔헨델 작품 번호〕 1), 이어 <네로> (Nero, HWV 2, 1706), <플로린도>(Florindo, 1706), <다프 네>(Dafne, 1706)를 연달아 발표하며 오페라 작곡가로의 변신에 성공하였으나, 곧 한계에 부딪혔다. 훗날 그는 이 때를 회상하며 "나는 당시 선율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벨칸토(belcanto) 선율을 배우기 위하여 이탈리아로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진술하였다. 1706~1710년까지 헨델은 피렌체(Firenze) 로마 (Roma), 나폴리(Napoli), 베네치아 (Venezia) 등을 잇달아 방문하여 넓은 세계를 섭렵하고 스카를라티(A. Scarlatti, 1660~1725), 코렐리(A. Corelli, 1653~1713) 등의 이탈리아 음악가들과 폭넓게 교류하면서 이탈리아 극(劇) 음악의 요소와 벨칸토 선율을 고루 익히고 기악 음악에 대한 이해의 폭도 크게 넓혔다. 여기서 그는 몇 개의 칸타타와 이탈리아 오페라 <로드리고>(Rodrigo, 1707), <아그 리피나〉(Agrippina, 1709)를 발표하였다. 이탈리아 오페라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영웅 신화나 보통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를 여러 개의 이탈리아어 아리아들로 만들고 이것을 고리 형식' 으로 묶어 3~4명의 주역 성악가들 이 노래하던 일종의 극 음악이었다. 그러나 당대의 유럽을 주도하던 이 극 음악은, 엄격한 의미에서 대본이나 연극적 줄거리보다 음악이 더 강조되는 '오페라 세리아 였 다. 헨델의 <아그리피나>는 베네치아 사람들에게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마테존은 건강하고 꽉 찬 울림의 독일 화성과 밝고 화려한 이탈리아 선율을 이상적으로 조화시킨 이 오페라를 "화성과 선율이 완전하게 일치를 이룬" 걸작이라고 평가하였다(1761). 런던에서의 오페라(1710~1741) : 1710년에 헨델은 할 레로 귀국하여 여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한 후, 뒤셀도르 프(Düsseldorf)를 거쳐 영국의 런던(London)으로 갔다. 그리고 이듬해 2월 오페라 <리날도>(Rinaldo, HWV 7a)를 공연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런던 사람들은 막 사이에 화려한 즉흥 첨발로 연주를 하던 그를 "첨발로를 연주하 는 우리 시대의 오르페오" 라며 극찬하였다. <리날도>는 그 해 시즌이 끝날 때까지 15번이나 상연되었다. 그리고 아리아 내 사랑하는 아내여' (Cara sposa)와 '나를 울게 버려두오' (Lascia ch'io pianga)는 별도의 책자로 출판될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누렸기에, 헨델이 런던에서 오페 라 작곡가로서의 운명을 걸기로 결심한 것은 일견 너무나 당연해 보였다. 헨델은 1712년 가을에 런던으로 완전 이주하고,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시작한 '준비된' 작 곡가로서 본격적인 오페라 창작에 돌입하였다. 이때가 오페라 작곡가와 지휘자, 그리고 오페라 경영자로서 그의 첫 절정기였다. 헨델은 처음부터 특정 가수를 선정하고 그의 성악적 역량에 맞추어, 가수로서의 능력을 최대치로 발휘할 수 있도록 오페라를 제작하였다. 이러한 '맞춤식 오페라' 의 특이함 때문에, 유명 성악가들은 헨 델의 오페라에 기꺼이 동참하였고 관객들은 대가 헨델이 '공인한' 성악가들의 '화려한' 노래를 즐겼다. 더구나 헨델의 아리아는 동시대 다른 작곡가들의 것보다 훨씬 더 선율적이었기 때문에 오페라는 거의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주로 퀸 극장과 킹 극장에서 공연된 그의 오페라 들은 대단히 장식적이고 화려한 소프라노 콜로라투라 (soprano coloratura), 민요적 선율의 유니즌(unison, 같은 음높이) 연주 그리고 아리아에 춤곡의 리듬을 삽입하는 방식 등을 통해 관객들에게 새로운 긴장과 흥미를 불러 일으키는, 친관객적 성향에 충실한 것들이었다. 1719년 헨델은 하이데거(J.J. Heidegger, 1666~1749)와 함께 합자 회사 형태로 '왕실 음악 아카데미' 를 설립하 며 본격적인 오페라 사업에 투신하였다. 하이데거는 재 정을, 헨델은 예술을 책임졌다. 헨델은 여기서 양성한 빼어난 가수들을 동원하여 <라다미스토>(Radamisto, 1720) , <무치오 셰볼라>(Muzio Scevola, 1721), <줄리오 체사레> (Giulio Cesare in Egitto, 1724), <톨로메오>(Tolomeo, 1728) 등 많은 오페라를 런던 무대에 올리고, 요청을 받으면 파 견 형식의 공연도 하며 자신의 오페라를 전 유럽에 보급하였다. 그러나 1700년대 초에 오페라 공연은 상류 계 급을 대상으로 한 예약제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동업종 간에 치열한 경쟁을 치뤄야 하였다. 헨델의 '왕실 음악 아카데미' 와 보논치니 그리고 아리오스티의 '오페라 아 카데미' 는 서로 최고의 가수를 영입하기 위해 과열 경쟁 에 휘말렸다. 더구나 게이(J. Gay, 1685~1732)의 영어 대본에 따라 페푸슈(J.C. Pepusch, 1667~1752)가 작곡해 1728년 런던에서 상연한 <거지 오페라>(Beggar's Opera) 에 치명타를 입었다. 거지, 창녀, 강도들의 익살, 풍자, 패러디로 꾸며진 이 발라드 오페라의 사회 비판적 성격과 특히 영국의 민속적 선율 그리고 영어 대본이 주효하 여, 이탈리아 오페라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던 것이다. 1728년에 헨델은 '왕립 음악 아카데미' 를 해산하고 새로운 아카데미를 결성하였다. 그는 나폴리까지 가서 새로운 가수와 계약을 체결하고 <로타리오>(Lotario, 1729), <포로>(Poro, 1731), <오를란도>(Orlando, 1733) 등 매년 한두 편의 이탈리아 오페라를 작곡 · 발표하였다. 한편, 보논치니도 아리고니(C. Arrigoni, 1697~1744), 포 르포라(N. Porpora, 1686~1768)와 함께 다른 오페라 회사를 설립하여 당시 최고의 카스트라토 파리넬리(Farinelli) 를 기용하여 오페라를 대성공으로 이끌었다. 헨델이 보다 질 높은 음악적 내용과 친관객적 오페라 운영에 기대를 걸었던 것은 헛된 일이었음이 드러나 결국 빚에 쪼들려 아카데미는 파산하였으며, 하이데거는 헤이마켓 (Haymarket) 극장을 처분하였다. 그러나 헨델은 작품의 질적 향상을 통해 다시 한 번 이 난국을 극복하고자 하였 다. 그래서 그는 코벤트 가든 극장을 빌려 프랑스적 분위기가 짙은 오페라 <알치나>(Alcina, 1735) , <아탈란타> (Atalanta, 1736), <아르미니오>(Arminio, 1737), <베레니 체>(Berenice, 1737) 등을 독자적으로 공연하였다. <데보 라>(Deborah, 1733), <아탈리아>(Athalia, 1733), <알렉산 더의 향연>(Alexander's Feast, 1736) 등도 이 때에 쓰여졌다. 그러나 과로로 지병인 심장 질환이 도지고 뇌졸중을 일으켜 독일 아헨(Aachen)으로 요양을 떠나야 하였기에, 헨델의 오페라의 꿈은 좌절되고 말았다. 하지만 경쟁 오페라단도 얼마 더 버티지 못하고 해체되었다. 이는 반세기 가까이 상류 계급의 전유물로 그들의 '이국적' 취향에 맞추었던 바로크 시대의 오페라 세리아가, 새로이 급 부상한 중산 계층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다가 급기야 1740년대에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1738년 영국으로 돌아온 헨델은 옛 동업자 하이데거 를 위해 <파라몬도>(Faramomdo, 1738), <세르세>(Serse, 1738), <이메네오>(Imeneo, 1740)를 작곡하는 등 이탈리 아 오페라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않은 듯하였으나, 마 지막 오페라 <데이다미아>(Deidamia, 1741)를 독자적으로 공연한 후 오페라에서 손을 떴다. 그가 남긴 이탈리아 오페라는 모두 41곡이다. 헨델의 오페라 언어는 레치타 티보(recitaivo)와 아리아(aria)의 단순한 구성을 넘어, 아리아의 자리에 자주 앙상블과 특히 합창을 삽입함으로써 독창과 합창을 균형적으로 대조시키며 극적인 효과를 성공적으로 표출하였다. 또한 화성과 선율의 착상에서 이탈리아 작곡가들을 능가하였던 헨델의 극 음악 언어는 소박하면서도 폭넓은 선율, 대범한 움직임, 깊은 내면성 과 뚜렷한 표현력으로 낭만주의적 요소를 암시하며 모차 르트(W.A. Mozart, 1756~1791)를 비롯한 후배 음악가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오페라 발전에 기여하였다. 런던에서의 오라토리오(1741~1759) : 오라토리오는 바로크적인 왕성한 표현 욕구의 산물이다. 오페라를 비 롯한 세속 양식을 과감하게 수용한 오라토리오는 독창, 합창, 오케스트라를 위한 '비전례적' 교회작품으로, 무대 연기 없이 음악회 방식으로 공연된다. 헨델이 본격적으로 오라토리오를 작곡한 것은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을 포기한 1741년부터 생이 끝날 때까지의 11년 동안이었 으나, 이 작업은 1700년대 초부터 준비된 것이었다. <시 간과 참됨의 승리>(II trionfo del tempo e del disinganno, 로 마, 1707, 개작 1737, 1757)와 코렐리에 의해 로마에서 초 연된 <부활>(La Resurrezione, 로마, 1708) 등 헨델의 첫 이탈리아어 오라토리오들에서는 그가 이탈리아 여행에 서 받은 스카를라티와 나폴리 악파의 영향이 극명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1726년 영국 시민으로 귀화한 헨델은 1730년대에 영어 오라토리오에 대한 큰 관심을 새롭게 표현하였다. 첫 영어 오라토리오 <에스더>(Edher, 1718, 수정 1732), 그리고 <드보라>(1733), <알렉산더의 향연> (1736), 구약성서에 입각한 서사시적 드라마 <사울> (Saul), <이집트의 이스라엘인>(israel in Egypt, 1739) 등은 영어를 사용하여 더 이상 상류 계급만이 아닌 불특정 다수의 중산층 시민들을 관객으로, 특히 사순 시기 동안에 헤이마켓 극장에서 상연되었다. 1735년부터 헨델은 오라토리오의 막간에 오르간 즉흥 연주를 하거나 다른 음악가들과 다양한 콘체르토를 연주하면서 새로운 청중 친화적 길을 모색하였다. 1741년, 56세의 헨델은 8월 22일부터 불과 24일 만에 <메시아>(The Messiah, HWV 56)를 완성하였다. 이 헨델의 대표적 오라토리오는 1742년 4월 아일랜드 (Ireland)의 수도 더블린(Dublin)에서 성공적으로 초연되었지만, 이듬해 런던 코벤트 가든 공연은 반대파의 방해를 받았다. 그러나 1750년 런던 공연은 대성황을 이루었다. '알렐루야' 합창 부분에서 감격한 국왕 조지 2세 (1727~1760)가 기립하자 모두가 따라 일어섰으며, 이처 럼 작곡가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메시아>는 그의 다른 오라토리오처럼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부분은 메시아의 약속과 탄생을 장엄함과 불안감 그리고 신비스러움으로 표출한다. 불안감 은 메시아의 약속이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희망일 수 없다는 데서 비롯된다. 메시아는 그의 오심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큰 두려움일 수 있기 때문이다. 탄생의 음악은 신비스럽고 극적이다. 두 번째 부분은 어둡고 슬픈 수난에서 시작하지만, 곧 구원을 완성한 승리자 메시아를 향한 찬미와 감사의 '알렐루야' 합창으로 전곡의 절정을 이룬다. 마지막 부분은 메시아에게 하는 신앙 고백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인류의 감사를 대규모 의 '아멘 푸가' (Amen Fuga)로 합창하며 마지막 절정을 구가한다. <메시아>는 16곡의 아리아와 19곡의 대규모 합창곡으로 구성된 합창 중심의 오라토리오이다. 이 합 창곡들은 영국의 장엄한 합창 전통과 프랑스의 감정 표현 방식, 그리고 독일의 진지한 대위법을 결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메시아>는 인간의 구원을 완성한 승리자, 영웅, 절대적 권력의 왕이라는 '계몽주의적' 메시아로 보던 18세기 영국의 메시아관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바흐의 '경건주의적' 수난곡과 달리, 메시아의 수난과 죽음은 짧게 묘사되고(레치타티보 32번) 곧 승리의 찬미가들이 이어진다(아리아 33번). <메시아>의 대본은,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친구인 제넨스(C. Jennens)가 아니라 헨델과 그의 조교 풀리가 성서를 바탕으로 공동 으로 작성한 것이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민요적-교회적 선율의 단순성과 대중성이 뛰어나 질높은 서정적 찬가로 남아 많은 사랑을 받았다. 헨델은 <메시아> 이후에 <삼손>(Samson, 1743), <세멜 레>(Semele), <요셉과 형제들>(Joseph and his brethren, 1744), <해라클레스>(Hercules), <벨사살>(Belshazzar, 1745), <유다 마카베오>(Judas Maccabaeus, 1747), <여호 수아>(Joshua), <알렉산더 발루스>(Alexander Balus, 1748), <수산나>(Susanna) <솔로몬>(Solomon, 1749), <테 오도라>(Theodora, 1750), <헤라클레스의 선택>(Choice of Hercules, 1751), <에프타>(Jephtha, 1752) 등 새로운 오라 토리오들을 쏟아냈다. 런던의 코벤트 가든 극장에서 초 연된 이 오라토리오들이 상류 계급층의 선호 여부와 무관하게 지속적인 인기를 누리자, 헨델은 1747년 <유다 스 마카베우스>의 성공 이후 과열 경쟁의 원인이었던 예약제 연주회 형식을 폐지하였다. 그 후, 헨델의 오라토리오 극장은 새로운 시민 계층으로 채워졌다. 헨델은 <6 오르간 콘체르토)(Organ concerti, 1738), <6 콘체르티 그로시>(Concerti Grossi, 1733), <12 콘체르티 그로시>(1739), <9 클라비어 모음곡>(1733), <6 푸가> (1735), <6 콘체르토>(1738) 그리고 두 바이올린과 독일 플루트를 위한 <7 트리오 소나타>(1739) 등 기악곡들도 많이 남겼다. 특히 1714년 조지 1세(1714~1727)의 테임 즈강 선박 축제를 위한 <수상 음악>(Water Music)과, 1749년 아헨의 평화 협정을 기념하는 그린 파크 시민 축제를 위한 <불꽃 음악>(Music for Royal Fireworks)은 걸작들로 평가된다. 1753년부터 시력이 급격하게 떨어지자, 헨델은 작은 규모의 기악 작품들을 쓰면서 첫 오라토리오 <시간과 정의의 승리>(1757)를 보완하거나 가끔 콘체르토를 지휘하고 오르간 콘체르토에서 오르간을 연주하면서,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접었다. 1757년 결국 백내장이 악화되어 실명하였고, 1759년 4월 6일 코벤트 가든 극장에서의 메시아 연주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대중을 떠났다. 같은 해 4월 14일, 런던에서 74세의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였으며 시신은 4월 20일 시민들의 애도 속에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교회 음악 작품〕 헨델의 교회 음악 작품에는 22개의 오라토리오 외에도, 라틴어와 영어 합창 음악이 있다. 이 작품들은 1707년 로마에서 발표한 <주님께서 말씀하셨다>(Dixit Dominus, 시편 109), <살베 레지나>(Salve Regina) 등 6개의 라틴어 합창곡과 6개의 <짧은 알렐루야아멘>을 제외하면 대부분 런던에서 영국 성공회를 위해 작곡한 것들이다. 1713년 헨델은 위트레흐트 평화 조약 (Peace ofUtrecht)을 기념하기 위해 <위트레흐트 테 데움> (Utrecht Te Deum et Jubilate)을 작곡하였다. 퍼셀(H. Purcell, 1659?~1695)의 영국 합창 전통을 잇는 이 라틴어 '감사의 노래' 는 1714년(D장조), 1719년(B장조), 1727 년(A장조, 1719년의 <테 데움>을 줄인 것) 그리고 1743년 (Dettingen Te Deum)에 새로 작곡되었다. 헨델은 또한 송 가(Ode)와 특히 많은 영어 앤덤(Anthem, 영어 가사로 된 영국 성공회의 합창 음악)을 작곡하였다. 시편 등 교회 가 사에 의한 모테트 형식의 대표적인 앤덤 작품들로는 찬 도스(Chandos) 공작을 위한 10곡의 앤덤(1717~ 1720), 조지 2세의 즉위식을 위한 대관식 앤덤(1727), 자신이 음악을 가르치던 앤 공주와 웨일즈 왕자를 위한 두 곡의 결혼 앤덤(1734/1736), 아헨 요양 후 캐롤라인 왕비를 위 한 장송 앤덤(1743),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 데팅 겐(Dettingen)에서 조지 2세가 프랑스에 승리한 것을 축하하기 위한 데팅겐 앤덤(1743) 등이 있다. 그리고 한 명 의 독창자와 계속 저음을 위한 63개의 실내 칸타타가 있다. 〔평 가〕 헨델은 바흐와 함께 바로크 시대를 마감하는 마지막 대가로, 앞선 시대의 음악 양식들을 종합하며 나아가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었다. 그가 작곡한 이른바 '영국 오라토리오' 들은 명쾌한 어법, 극적인 표현력, 영 국의 민요적 요소와 이탈리아의 성악적 요소의 결합, 이 탈리아 오페라의 귀족적 섬세 취향과 힘차고 건강한 시민 정신의 조화를 통해 영국의 음악 전통에 새 생명력을 부여하며 직접적으로는 하이든(F.J. Haydn, 1732~1809)부 터 여타 수많은 음악가들에게 모범적 전형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또한 시민 청중의 수준을 높이며 시민 음악 문화의 창달을 이끌었던 헨델의 오라토리오들은 선택받 은 이스라엘이자 새로운 세계의 중심 국가로서의 영국 제국을 과시하려는 강한 의지를 담고 있다. 또한 헨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품위와 고상함, 종교적 · 정치 적 사고의 자유를 피력하였다. "누가 만일 내 오라토리오를 그냥 즐기기만 한다면, 분명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내 오라토리오로 더 나은 세상을 지향한다" 라는 헨델의 언급은 오늘날에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헨델은 근대화가 빠르게 진행되던 전환기를 살았다. 새로 출현한 자본주의적 시민 사회는 절대적 봉건주의를 붕괴 시키고 음악 문화를 교회 · 궁정 중심에서 시민 중심으로 변화시켰다. 음악도 교회 음악에서 근대적 기악 음악과 극 음악으로 대체되었다. 헨델이 조국을 떠나 영국으로 이주한 것은, 영국이 보다 앞서 근대화를 이루고 있다는 확신 때문에서였다. 독일은 30년 전쟁(1618~1648)의 후유증으로 전근대적 봉건 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백성들 은 최소한의 생활도 보장받지 못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음악 문화는 여전히 상류 계급의 전유물이었다. 자영 농 민과 중류 시민 계급 등 영국의 신흥 부르주아 계층은 음 악 문화의 새로운 주체로 귀족적이 아닌,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 밝고 건강한 음악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변화의 한가운데에서 헨델은 이탈리아어 오페라 사업에서 실패하고 영어 오라토리오로 크게 성공하였다. 헨델은 오페 라에서 얻은 모든 음악적 표현 가능성을 오라토리오에 쏟아 넣었다. 그리고 자신의 오라토리오를 특정 계급만을 위한 예약제가 아닌, 공개 연주회 형식으로 공연하였다. 오늘날까지 그가 '민중적 작곡가로 추앙받는 것은 시민 계층의 열망을 충족시킨 그의 앞선 정신과, 특히 세 속 음악과 교회 음악의 경계에 위치한 그의 탁월한 오라토리오 때문이다. 헨델의 작품 전집은 세 종류가 있다. 첫 전집은 아놀드 (S. Arnold)가 1787~1797년까지 런던에서 편찬 · 출판 한 36권이고, 두 번째 전집은 크리산더(F. Chrysander)가 1858 1902년까지 라이프치히에서 출판한 99권이다. 그리고 새로운 《비판적 헨델 전집》은 1955년에 설립된 헨델 협회 주관으로 할레에서 발간되었다. 헨델의 작품 번호(HWV) 책은 바셀트(B. Baselt)가 1978년부터 라이프치히에서 출판하였다. (→ 바로크 예술 ; 오라토리오) ※ 참고문헌  조선우 · 홍정수, 《음악은이》 2, 음악춘추사, 2000, pp. 287. 293. 333. 355. 3971 T. Georgiades, 조선우 · 권오연 역, 《음악과 언어》, 세종출판사, 2000/ W. Dean, 《NGDMM》 8, pp. 83~140/ J. Miller-Blattau, 5, pp. 1229~1706/ W. Gurlitt ed., Riemann Musik Lexikon, Personenteil 1, Schott's Soehne, 1959, pp. 712~717/C Dahlhaus ed., Neues Handbuch der Musikwissenschaft, Bd. 5, Laaber Verlag, 1985, pp. 89~98. 108~121. 188~199. [趙善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