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8세 - 八世 Henry VIII(1491~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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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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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


영국의 국왕(1509~1547). . 영국 지역의 교회를 가톨릭 교회에서 분리하여 영국 국왕을 교회의 최고 통치자로 하는 영국 성공회(Ecclesia Anglicana)를 세운 인물. 〔생 애〕 헨리 7세(1485~1509)의 둘째 아들로, 1491년 6월 28일 런던(London) 인근의 그리니치(Greenwich)에 서 태어났으며, 1502년 형인 아서(Arthur)가 사망하자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튜더 왕조의 왕들 중에서 왕위 계 승을 기다리며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 이었다. 1509년 4월 2일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을 때에는 국민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훌륭한 교육을 받았으며 특히 신학, 음악, 시 그리고 운동에 탁월한 능 력을 보였고, 위엄과 의로움에 대한 확신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왕위에 오른 후, 교황 율리오 2세 (1503~1513)의 관면을 받아(1503. 12. 26) 여섯 살 연상인 형수 아라곤의 카타리나(Catharina de Aragon, 1485~1536) 와 결혼하였다. 초기 통치 시기 : 헨리 8세는 왕실의 장관들 및 선왕의 고문들을 백성들을 약탈하는 자들로 고발하여 제거하고, 새로운 인물들을 기용하였다. 특히 1511년에 국왕의 개인적 자문 기관인 추밀원(樞密院)의 고문이 되었다가 1515년에는 대법관, 이어 추기경으로 서임된 울지(Thomas Wolsey, 1475?~1530)에게 1512~1529년까지 국정 에 관한 전권을 맡겼다. 그러나 울지 추기경은 왕에게 적대적이었으며 새로운 시대에도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예를 들면 그는 해양 정책이나 탐험에 무지하였으나 헨리 8세는 해양 군단을 설립하고 왕성한 탐험욕을 발휘하여 당시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 그러나 왕은 그 외의 정책들은 관료들이 추진하도록 하였으 며, 간혹 일관성이 없는 모습을 보였지만 영국인다운 균형 감각을 지니고 행동하였다. 국왕이 사치스러운 연회를 자주 열어 국고를 탕진하였 기 때문에 의회가 재정적인 부담에 허덕이는 와중에, 헨 리 8세가 헌신적으로 존경한 교황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터졌다. 프랑스가 강브레(Cambrai) 동맹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베네치아(Venezia)에 간섭한 것이 그 이유였다. 신성 로마 제국과 스페인의 아라곤은 교황 편에 참전 하였지만 영국이 참전할 이유는 전혀 없었기에 의회의 의원들과 추밀원의 고문들은 반대하였으나, 프랑스의 패 권주의에 대항하려는 헨리 8세의 결심을 바꿀 수 없었 다. 당시 프랑스는 스코틀랜드(Scotland)와 동맹을 맺고 영국을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1513년 스코틀 랜드와의 전쟁이 선포되었고, 헨리 8세는 플로든에서 승 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스코틀랜드의 왕이자 헨리 8세의 매형인 제임스 4세(1488~1513)가 전사하였다. 영 국이 얻은 재정적인 이득은 전혀 없었지만, 불만을 품고 있던 의회와 국민들의 마음을 녹여 줄 수는 있었다. 하지만 1519년 카를 5세(1519~1556)가 신성 로마 제 국의 황제가 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스페인, 부르고뉴, 오스트리아의 전 지역에 이르는 막대한 영토와 재산, 그리고 막강한 권한까지 갖게 된 카를 5세에 맞설 수 있는 국가는 프랑스뿐이었다. 반면 유럽 대륙에서 영국의 세 력은 점차 미미한 상태로 전락하였고, 국내에서도 헨리 8세는 인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1521년부터 헨리 8세는 카를 5세의 황제권 행사를 위한 첨병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카를 5세가 1525년 파비아(Pavia)에서 프랑스 군 을 물리치고 승리하여 이탈리아와 교황령에 대해 더욱 세력을 떨치게 되자, 이를 경계한 영국과 베네치아, 교황 글레멘스 7세(1523~1534)는 프랑스의 국왕인 프랑수아 1세(1515~1547) 편에 가담하였다. 이러한 이중적 정책으로 헨리 8세는 관료들의 신뢰를 잃었다. 지지의 상실 : 헨리 8세는 전제적(專制的) 성격의 소 유자였기 때문에 자신을 견제하는 의회 세력에 불만을 품고 의회를 거의 14년 동안 연속적으로 중단시켰으며, 여러 상황을 통하여 불만을 품고 있던 성직자들이 자신 에게 복종심을 갖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신학과 전례 문제에 있어서는 극도로 보수 적이었다. 즉 교황의 권위에 반대하는 루터(M. Luther, 1483~1546)로부터 시작된 프로테스탄트와는 전혀 다른 입장이었기에, 1521년에 《마르틴 루터에 반대하는 7성 사의 옹호》(Assertio septem Sacramentorum contra Martinum Lutherum)를 저술하여 교황 레오 10세(1513~1521)로부 터 '신앙의 옹호자 (Defensor Fidei)라는 칭호까지 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헨리 8세는 본인뿐 아니라 영국의 명예를 손상 시킬 정도로 큰 문제를 일으켰다. 즉 아라곤의 카타리나와의 혼인을 부정하며 불법적인 이혼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형수였던 카타리나와의 혼인은 교황 율리오 2세로 부터 관면받아 성립된 것이었지만 그는 이것이 구약성서 (레위 18, 16 : 20, 21)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특히 궁녀인 앤 불린(Amn Boleyn, 1507?~1536)과 가 까워지기 시작한 1527년부터 첫 번째 결혼을 무효화시 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는 이 문제를 카타리나의 조 카이자 당시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카를 5세에게 정 치적으로 제기해 달라고 교황 글레멘스 7세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헨리 8세가 카타리나와 이혼하려는 이유 중에 결정적인 것은, 18년 동안 지속된 결혼 생활에서 7남매가 태어났으나 모두 죽고 메리 공주(1553~1558)만 살아 남았으며, 카타리나에게는 더 이상 자녀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딸에게 왕위를 계승하였을 경우 정치적으로 발생할지도 모르는 문제들이 염려되는데다 정부(情婦)인 앤 불린에게서 왕자의 출산을 기대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1531년에 글레멘스 7세는 의회를 비롯 한 그 밖의 어떤 법정도 왕의 결혼을 해소하거나 무효로 선언하는 것을 파문벌로 금지하였다. 이에 헨리 8세는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이혼을 반대하던 대법관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7~1535)가 1532년 5월 사표를 제출하자 이를 수리하고, 1533년 보레인 가의 담당 사제인 크랜머(T. Cranmer, 1489~1556)를 캔터베리 의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크랜머는 그해 1월 헨리 8세와 앤을 비밀리에 결혼시킨 후, 형식적인 심리를 통해 헨리 8세의 첫 번째 결혼을 무효로 선언하였다. 교황은 격분하여 카타리나를 다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파문하겠다 고 위협하다가 결국 이듬해 7월 헨리 8세와 앤 불린, 크 랜머를 정식으로 파문하였다. 영국 성공회의 설립 : 카타리나와의 혼인 무효 선언이 계속 지체되고 재판이 유보되자, 헨리 8세는 교황과 가 톨릭 교회와의 결별을 결심하였다. 파문 이후 영국에서 는 반교황적인 선전이 계속 전개되었고, 의회는 다섯 개의 법령-초년 수입령(Act of Annates, 1532), 항소령(Act of Appeals, 1533), 제1차 왕위 계승령(First Act of Succession, 1534), 반역령(Treasons Act, 1534), 반교황령(Act against the Pope's Authority, 1536)-으로 로마와의 단절을 준비하였다. 1534년 11월 3일 당시 반교황, 반성직자 노선을 견지하고 있던 국회는 '수장령' (首長令, Act of Royal Supremacy)을 공표하였다. 이 조치로 560개의 수도원이 해산되어, 그 재산의 일부는 국가에 귀속되고 나 머지는 대부분 경매인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또한 헨리 8세를 영국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왕의 새로운 혼인과 이 혼인에서 태어난 적자의 왕위 계 승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반역자로 처벌을 받게 되었다. 결국 영국 교회에 대해 교황이 지녔던 수위권이 국왕 인 헨리 8세에게 넘어갔고, 결정적으로 교황권과의 절교가 이루어진 것이다. 교회법을 가르치는 것은 금지되었으며 성인의 유해와 성화상 공경 또한 금지되었다. 이에 따라 당시까지 영국의 주요 순례지였던 토마스 베켓 (Thomas Becket, 1118~1170)의 묘지 순례가 금지되었으 며, 그의 무덤 또한 파괴되고 유해는 불태워 강에 뿌려졌다. 전례 언어인 라틴어의 사용도 금지되고 영어 성서가 도입되었다. 영국의 모든 권력은 헨리 8세에게 집중되었으며, 로체스터의 주교인 피셔(John Fisher, 1469~1535)와 모어를 비롯하여 그에게 저항하던 성직자들은 참수형에 처해졌다. 요크(York)와 링컨(Lincoln)의 백작들과 이에 합세한 남부 지방 및 런던의 백작들의 세속적인 저항 또 한 유혈로 진압되었다. 반면 헨리 8세는 반성직자 및 반 로마 정책을 지지하는 도시에는 큰 호의를 베풀었다. 1534년, 국회와 유약한 재속 성직자들은 앤 불린과의 결혼이 합법적임을 승인하였으며, 이로써 후에 그 딸 엘 리자베스(1558~1603) 여왕의 즉위 또한 인정되었다. 헨리 8세는 점차 의심이 많고 이기적인 인물로 변해갔 으며, 냉소적인 성격으로 주변의 인물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울지 추기경의 실각 이후 실세가 된 크롬웰(Thomas Cromwll, 1485~1540)은 1532년부터 수도원을 해산시키는 등 일련의 개혁 정책을 수행하여 왕실의 재정을 튼튼히 하였지만, 결국 1540년 7월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또한 헨리 8세는 6명의 부인들 중에 무려 2명을 처형하였다. 즉 1536년에는 아들을 낳지 못한 앤 불린 을 처형하고, 1542년에는 남자 관계가 복잡하였다는 이유로 다섯 번째 부인 캐서린 하워드(Catherine Howard)를 처형하였다. 세 번째 부인 제인 시모어(Jane Seymour)는 헨리 8세가 그토록 원하던 아들 에드워드(1547~1553)를 낳았으나 출산 중에 사망하였으며(1537), 네 번째 부인 인 클리브스의 앤(Anne of Cleves, 1515~1557)과는 유럽 대륙에서 동맹을 얻으려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결혼하였 다가 이혼하였다. 1540년에 마지막 여섯 번째 부인 캐서린 파(Catherine Parr, 1512~1548)와 결혼하였을 때 헨리 8세는 육체적 · 정신적으로 완전히 지쳐 있었으며, 그녀 는 헨리 8세를 잘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에 죽음을 면하고 그보다 훨씬 오래 살았다. 말년의 쇠퇴 : 1542년에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 사 이에 전쟁이 다시 시작되자 헨리 8세는 카를 5세 편에 가담하였고, 그로 인해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있던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이 불가피해졌다. 헨리 8세의 명으로 스코틀랜드를 침공한 노팩(Norfolk) 공작 하워드(Thomas Howard, 1473~1554)가 솔웨이모스(Solway Moss) 전투에 서 승리한 후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스코틀랜드의 왕인 제임스 5세(1513~1542)가 서거하고 생후 6일 된 메리 스 튜어트(Mary Stuart, 1542~1567)가 스코틀랜드 여왕좌에 앉자, 헨리 8세는 그리니치 조약을 체결해 그의 아들 에 드워드가 장래에 메리 스튜어트와 결혼하도록 함으로써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합병을 꾀하였다. 하지만 스코틀랜 드에서 선불리 억압적인 정책을 추진하자 결과적으로 친 프랑스파가 득세하게 되어 그리니치 조약은 파기되고,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관계는 다시금 험악해졌다. 1543 년에는 스페인과 동맹을 맺어 프랑스를 협공하기로 하였으나 불로뉴(Boulogne)를 점령하였을 뿐(1544~1550), 카를 5세가 프랑스와 단독으로 강화 조약을 맺음으로써 전쟁은 큰 소득 없이 끝났다. 헨리 8세는 1547년 1월 28 일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다. 〔평 가〕 헨리 8세는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무자비한 사람이었다. 로마 교회와 영국 국민들의 세속적인 관계 를 단절하고 루터파를 비롯한 다른 프로테스탄트들과 협력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나, 이와는 별개로 자국 내에서 종교로서의 프로테스탄트는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로마에 순명하기를 바라는 가톨릭 신자들 못지 않게 프로테스탄트를 이단자들로 박해하였다. 이는 그가 교리와 교회법적으로는 가톨릭에 머물렀음을 보여 주는 반증이다. 예를 들면 1539년 발표한 '신앙 6조항' (Six Articles Act)에서는 미사 중 성체의 실체 변화, 단형 영성체, 연 미사, 비밀 고해, 사제의 독신제, 수도 서약 등을 부인하 면 사형에 처하는 것을 인정하였다. 1538년 교황 바오로 3세(1534~1549)가 헨리 8세를 파문한 것은, 이단자로서가 아니라 열교자(裂敎者)로서였다. → 모어, 토마스 ; 수장령 ; 영국 ; 영국 성공회 ; 카를 5세 ; 피셔, 존) ※ 참고문헌  A.F. Pollard, Henry VIII, London, 1905/ F. Hackett, Henry VIII, London, 1929/ G. Constant, La réforme en Angleterre I Le schisme anglica : Henri VIII, Paris, 1930/ F. Chamberlin, The private character of Henry VIII, London, 1932/ H. Simpson, Henry VIII, London, 1934/ K. Pickthorn, Early Tudor goverment ; Henry VII and Henry VIII, London, 1934/ C. Fatta, Henry VIII, vol. 2, Firenze, 1938/ H.M. Smith, Henry VIII and the Reformation, London. 1948/ J.J. Scarisbrick, 《NCE》 6, pp. 738~742/ A. 프란츤, 최석우 역, 《세계 교회사》, 분도출판사, 2001/ 이형기, 《세계 교회사》, vol. Ⅱ, 한국장로 교출판사, 1998. [全壽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