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革命

革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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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혁명 이후 혁명을 바라보는 교회의 입장은 크게 변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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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혁명 이후 혁명을 바라보는 교회의 입장은 크게 변화되었다.


정치학에서 국가의 기초, 사회 제도, 경제 조직 등과 같은 기존 질서를 근본에서부터 급격하게 변화시키는 일을 가리키는 용어. '정보 통신 혁명' , '의식 혁명' 등과 같이 기존의 관습 · 양식 · 이념 등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에도 '혁명' 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유교에서는 이전의 왕통(王統)을 뒤엎고 새로운 왕통을 세우는 일을 혁명이라고 불렀으며, 이성계(李成桂, 1335~1408)가 조선(朝 鮮)을 개국한 것을 '역성(易姓) 혁명' 이라고 하는 것이 그 예이다. 〔교회의 혁명관〕 교회의 초기 혁명관은 근대적 의미의 사회 체제 변혁보다 폭군 살해(tyrannicidium, tyrannicide) 를 가리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초기 교회에서는 통치 권을 당시 스토아주의자들처럼 자연법과 신법에 따른 것 이며 본질적인 정의를 집행하는 것으로 간주된 법과 통 치권에 대한 복종의 의무, 그리고 하느님의 눈에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이에 대한 교회의 주된 입장은 신약성서에 잘 드러나며, 시대 상황에 따라 다소 변화하기는 했지만 교회의 권리와 신앙의 자 유를 세속 권력이 문제삼지 않는 한 세속 통치권에 대한 견해는 기존 입장을 고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성서의 혁명관 : 교회는 합법적인 권위에 복종해야 할 의무에 대한 근거를 복음에서 찾는다. 마태오 복음 22장 15-21절까지의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 (마르 12, 13-17 ; 루가 20, 20-26)에서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려드려라"(마태 22, 21)라는 말씀을 마치 예수가 현세의 권위를 인정하고 복종해야 한다는 뜻으로 말하였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사실 이 구절은 당시 바리사이파들과 헤로데 당원들도 로마 화폐인 데나리온을 사용함으로써 황제의 통치권을 간접적으로 시인하고 있으니 황제에게 세금을 납부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세속 권력의 자율성은 인정하지만 그 권력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에게 종속된 상대적인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으며, 그렇기에 예수가 통치권을 무조건 인정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복음서의 관점은 베드로와 요한이 최고 의회 의원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사도 4, 19)라고 한 말에서도 이어진다. 이 말은 세속법이 신법에 종속되어 있음을, 그리고 신법에 어긋나는 세속법에 대해서는 불복종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신약성서에서 가장 유명한 초대 교회의 견해는 사도 바오로의 편지에서 나타난다. "사람은 누구나 위에서 다스리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오지 않는 권위란 있을 수 없고, 현재의 권위들도 하느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권위에 맞서는 자는 하느님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고, 그렇게 거스르는 자들은 스스로 심판을 불러오게 됩니다. 사실 지배자들이란 악행을 할 때에나 두렵지, 선행을 할 때에는 두렵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모든 이에게 자기가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조세를 내야 할 사람에게는 조세를 내고 관세를 내야 할 사람에게는 관세를 내며,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두려워하고 존경해야 할 사람은 존경하십시오"(로마 13, 1-7). 사도 바오로는 통치권이란 선과 죄를 구분하고 결정하는 기준을 하느님에게서 부여받아 집행하는 것이기에 통치권자를 하느님의 심부름꾼으로 볼 수 있고, 인간은 보편 타당한 윤리 규범을 제시하는 양심 때문에 선한 이를 포상하고 죄인을 벌하는 통치권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존 권력에 합법적으로 불복종하는 문제나 백성들의 권익에 대한 권력의 책임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 구절은 이후 교회기 공권력, 혁명, 폭 력에 대한 입장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묵시록에서는 바다에서 나온 짐승을 하느님과 하느님의 교회에 반하여 일어난 사탄의 대리자로, 새로운 신앙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며 스스로 신격화한 로마 제국으로 상징화하고 있다(묵시 13, 1-8). 신적인 권한을 부여받았으나 신법을 거슬러 집행되는 세속 권력을 사탄으로 간주한 것이다. 이처럼 신약성서는 권력에 대한 복종이 하느님이 부여한 의무라는 견해를 강조하고 있다. 교회의 이러한 고유한 견해는, 통치자의 권력은 백성에게서 비롯 된다는 로마의 헌정 이론과 강조점을 달리하고 있다. 교부들의 혁명관 : 교부들은 자연법, 인간의 평등, 국가에서 정의의 필요성 등에 관해서는 치체로(M.T. Cicero, 기원전 106~43), 세네카(L.A. Seneca, 기원전 4?~ 서기 65) 등의 입장을 따르면서도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통치권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앞세웠다. 교부들의 저술에는 권위와 합법적 권위에 복종할 책임이 강조되어 있다. 초기 순교자들에게는 로마의 일부 법에 대하여 거역할 것을 권장한 경우도 있었으나, 그것은 하느님의 법에 명백하게 반대되는 불의한 법일 경우만으로 한정하였다. 교부 들은 "사람들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사도 5, 29)라는 말씀도 종종 인용하 였지만, 로마서 13장 1-2절을 더 많이 강조하였다. 중세 교회의 혁명관 : 중세에 교회는 폭군에게 저항하는 경우일 때에는 혁명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교항이 사전에 폭군을 파면하였기 때문에 교회가 주도한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교황권이 혁명을 사전에 예방한 셈이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25~ 1274)는 합법적인 권력을 전복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 다 야기되는 소요나 난동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본 반면, 폭군이 손쉽게 통치할 목적으로 백성들 가운데에 소요와 갈등을 조장하는 경우에 이에 대항하는 혁명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폭군이 백성들과 맺은 계약을 충실하게 지키지 않는 것은 통치자에게 요구되는 직무에 충실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여, 정당한 혁명은 공동체에 훨씬 피해를 덜 입힌다고 보았다. 솔즈베리의 요한(John of Salisbury, 1115/1120~1180)은 토마스 아퀴나스 이전에 이미 백성들 스스로 폭군을 제거할 권리가 있다는 급진적 견해를 주장하였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군주는 사랑받고 존중받고 영예를 얻어야 하지만, 공동선에 위배되고 왕과 백성의 유대를 와해 시킨다는 전제하에 사악한 폭군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본 것이다. 실제로 이 시대에는 반란, 혁명을 옹호하는 대부분의 이론들이 통치자와 백성 사이의 계약 개념에 바탕을 두었다. 만일 통치자가 공동선을 벗어나거나 이를 거슬러 행동하면, 계약을 위반한 것이므로 백성들이 그에게 복종할 의무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근대의 전개 : 중세 정치 질서의 와해와 르네상스 체제의 붕괴로 말미암아 폭군을 제거하는 일이 자연스러워 졌는데, 이 시대에 정적(政敵)을 살해한 사례들이 많았던 것은 이러한 분위기를 잘 보여 준다. 심지어 시민과 교회 권위가 정적 살해를 축복하고 인정하는 경우도 흔 하였다. 교회가 폭군 살해를 공식적으로 제재하기 시작한 것은, 1415년에 부르고뉴 (Bourggne)의 새 공작인 장(Jean sans Peur, 1371~1419)이 오를레앙 공(Duc d'Orleans) 루이(Louis)를 암살한 행위를 옹호한 프란치스코회의 수사 프티(Jean Petit)의 주장을 콘스탄츠 공의회(1414~ 1418)가 거부하면서부터였다. 수아레스(F. Suárez, 1548~ 1617)와 벨라르미노(R.F.R. Bellarminus, 1542~1621)는 백 성들이 개별적으로 폭군을 살해하는 것과 모든 백성 혹은 다수가 결정하여 폭군을 살해하는 경우를 구별하여, 두 가지 경우 모두 혁명의 정당성을 인정하기는 하였으나 개인이 폭군을 살해하는 것은 환영하지 않았다. 종교 개혁 이후 역사적 조건과 종교적 신념은 혁명관에 영향을 주었다. 루터(M. Luther, 1483~1546)는 "백성들이 옳은 일을 하는 것보다 군주가 잘못하는 것을 지지한다" 라고 하며 신약성서의 입장에 따라 당대에 유행하였던 혁명의 당위성을 문제삼았고, 루터의 사상을 따르던 지역에서는 그의 입장이 사실상 지침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인 통치자들이 다스리던 지역에 살고 있던 칼뱅주의자들은 루터와는 반대로 합법적인 저항론을 전개하였으며, 이 시기 이후 아메리카 신대륙에서는 구대륙의 폭력에 맞서 혁명을 용인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세속의 통치권이 교황권을 직접 공격하지는 않았다. 예외적인 경우가 있기는 했어도 그리스도교는 세속 통치권에 복종의 의무를 강조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이후 이러한 교회의 입장은 크게 변화되었다. 혁명 세력이 왕권은 물론 교회도 타도의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1793년 6월에 선포된 '혁명 의회' 의 선언에 이러한 혁명 주도 세력의 의도가 잘 드 러나 있다. "정부(국가 권력)가 백성들의 권리를 침해하면 백성과 백성들의 생활 모든 영역에서 폭동은 가장 신성한 권리이자 불가결한 권리이다." 이 급진적인 선언 이후 교회는 혁명과 혁명의 개념에 대하여 새로이 대응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으나, 이러한 인식이 바로 행동에 옮겨진 것은 아니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16세(1831~ 1846)는 회칙 <미라리 보스>(Mirari vos, 1832. 8. 15)에서 폭동과 소요에 반대한다고 하였고, 1864년 교황 비오 9 세(1846~1878)는 합법적인 왕권에 도전 혹은 저항하는 것을 단죄하였다. 교황 레오 13세(1878~1903)는 <세속 정부에 대하여> (Diuturnum illud, 1881. 6. 29)에서 이를 다소 변화시켜, 자 연법과 신법에 명백하게 위배되는 경우에만 혁명이 정당화되며 그 경우에도 수동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20세기 초 교회 입장에 변화를 초래할 만한 도전들, 예를 들어 전체주의 같은 것이 등장하였을 때조차도 교회는 전통적인 견해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입장 특히 가톨릭 교회의 입장이 모호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마르크스(K.H. Marx, 1818~1883)의 혁명관에 대한 가톨릭의 반대 입장은 강경하여,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자본주의 국가 안에서는 합법적 권력에 대한 복종을 인정하지만 사회주의 혁명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마르크스의 혁명관과 가톨릭 교회의 입장] 근대 이후 혁명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입장을 결정한 가장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가 마르크스주의이다. 프랑스 혁명의 영향도 지대하였지만, 19세기 이후 가톨릭교회에 실질적인 영향을 행사한 것은 마르크스주의였다. 이 때문에 마르크스의 혁명론과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마르크스 주의 계열의 혁명론은 가톨릭 교회의 직접적인 비판 대 상이 되었다. 마르크스의 혁명관 : 마르크스의 혁명관은 계급 투쟁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계급 투쟁은 역사 안에서 실제로 나타나는 계급 간의 갈등을 기술하는 차원을 넘어 불평등한 신분 구조가 존재하는 한 역사에서 계급 간의 적대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필연이고, 이 관계는 대립적인 두 기본 계급 간의 투쟁으로 모이는 경향을 보이게 마련이며, 이 투쟁은 역사 발전의원 동력이 된다는 생각으로 귀결된다. "자유민과 노예, 귀족과 평민, 영주와 농노, 동업 조합의 장인과 직인, 간단히 말해서 서로 영원한 적대 관계에 처해 있는 억압자와 피억압자가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공공연하게 끊임없는 투쟁을 전개해 왔다. 그리고 이 투쟁은 항상 사회 전체가 혁명적으로 개조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싸우는 제 계급이 함께 몰락하는 것으로 끝났다. 과거 역사의 어느 시기, 어느 장소에서나, 사회는 각 종 신분으로 세분되어 있고, 각 신분에는 사회적 지위에 따라 엄격한 등급이 매겨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고대 로마에는 귀족, 기사, 평민, 노예가 있었고, 중세에는 봉건 영주, 가신, 동업 조합의 장인, 직인, 농노가 있었으며, 그뿐만이 아니라 이 계급들 하나하나가 다 특수한 계층들로 나뉘어져 있었다. 봉건 사회의 폐허 위에 생겨난 현대 부르주아 사회 또한 계급적 모순을 폐기하지 못하였다. 이 사회는 다만 억압의 새로운 조건들과 투쟁의 새 로운 형태들을 낡은 것을 대체하고, 새로운 계급들을 출 현시킨 데 지나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당대에 프랑스 역사가들이 밝혀낸 역사 안의 계급 투쟁 사실들을 토대로 다분히 필연적인 미래를 전제로 하는 역사적 유물론을 전개하였고, 이 이론을 통하여 계급 투쟁이 궁극에는 계급 없는 사회로 이끄는 필연적인 과정이 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의 계급 투쟁론을 이해하고자 할 때 역사적 유물론은 필수적인 조건이다. 마르크스는 공동체 제도가 생산력의 발달에 조응하는 형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사적 소유와 사회적 분업 및 공동체적 경영의 필요성이 사라졌다고 하였다. 사적 소유의 발생이 곧 계급의 탄생을 뜻하는 것이며, 이로 인하여 생산 수단의 소유자와 비소유자 간의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후로 생산력의 발전은 이에 알맞는 생산 관계를 요구하게 되어 끝내는 계급이 없는 사회로 진전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처럼 변증법적 유물론을 역사에 적용하여 전개한 것이 바로 역사적 유물론이다. 역사적 유물론에 입각하여 그는 자본주의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거쳐 공산주의로, 공산 주의는 다시 사회주의로 전개된다고 하였다.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Die Deutsche Ideologie, 1846)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공산주의 혁명은 지금까지의 모든 활동 양식을 반대하며 노동을 제거하고 계급 자체와 동시에 모든 계급에 의한 지배를 폐지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사회에서 더 이상 계급으로 여겨지지 않고 또 계급으로 인정되지 않음으로 인해 그 스스로 현 사회 안의 다른 계급들의 해체를 표현하는 그 계급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배 계급은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타도될 수 없기 때문에 혁명이 필요할 뿐 아니라, 타도를 수행하는 계급은 혁명으로써만 모든 오물을 제거하고 새로운 사회 건설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혁명이 필요하다.' 이처럼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단순히 착취할 수 있는 권력의 대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착취를 말살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처럼 마르크스는 사회 변동의 추진력을 투쟁으로, 최후의 결정적 요인은 권력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투쟁은 민족 간이 아닌 사회 계급 간에 일어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였으며, 권력도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것으로 보았다. 마르크스는 헤겔(G.W.F. Hegel, 1770~ 1831)과 같이 사회 세력들의 행동을 수정할 수 있는 인간의 예지 능력이나 선한 의도에 대하여 회의를 가졌고, 사회 철학의 논리로 볼 때도 경제적 폐해를 입법으로 고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계급 투쟁에 입각한 이러한 프롤레타리아 혁명론이 교회의 직접적인 반발을 사는 주된 이유는 아니었다. 교회가 그의 혁명론을 거부하는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종교를 아편으로 간주하는 그의 입장 때문이었다. 그는 아편의 중독 기능처럼 종교도 피지배 계급의 저항 의지를 약화시키는 기능을 갖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당연히 타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에게 종교란 그리스도교를 의미하였고 이후 사회주의 혁명 과정에서 실제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리스도교를 탄압하였으므로, 마르크스의 혁명론과 그 중심 원리인 계급 투쟁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불안감과 적대감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가톨릭 교회의 입장 : 교황 비오 11세(1922~1939)는 회칙 <사십 주년>(Quadragessimo Anno, 1931. 5. 15)에서 사회주의는 그것이 어떠한 형태라도 교회와 양립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것은 당연히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반대 입장이기도 하다. "모든 오류가 다 그러하듯이 사회 주의가 진리의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하더라도, 사회 주의는 진정한 그리스도교에 상반되는 고유한 인간 사회관에 기초하고 있다. '종교적 사회주의' , '그리스도교 사회주의' 라는 표현은 자체 모순을 안고 있다. 아무도 진정한 가톨릭 신자이면서 동시에 진정한 사회주의자일 수 는 없기 때문이다" (49항). 사회주의 혁명을 거쳤거나 거치지 않았거나, 사회주의는 근본 철학에서부터 교회와 양립할 수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교황 비오 12세(1939~1958)는 사회주의 혁명의 폐해 를 어느 정도 경험하고 난 뒤였기에 비판의 수위를 더 높였다. "구원과 정의는 혁명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고, 잘 계획된 발전의 원리에 의해 실현된다. 폭력은 모 든 것을 때려 부수는 반면에 아무것도 건설하지 않는다. 그리고 증오와 파괴를 축적시키고, 논쟁자들이 화합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불목의 늪 위에서 고통을 겪은 후에 서서히 이전 상태를 복구하려는 강요에 의해 더욱 강하게 인간들과 정치적 정당들을 뒤흔든다"(성령 강 림 대축일에 모라에서 이탈리아 노동자들에게 한 훈화, 1943. 6. 13). 이 시기 유럽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을 거쳐 나타난 현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진영 안에서 노동 운동 형태 로 확산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가 현실적인 위협으로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에 교황들의 입장은 강경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이후 냉전이 시작되고 제3 세계가 세계 정치 무대에 등장하면서, 혁명과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폭력에 대해 전통적인 입장으로 회귀하였다. 일차적으로는 지정학적으로 사회주의 진영이 분리되어 교회의 영역이 자본주의 진영, 그리고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으나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제3 세계 진영에 국한되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독립 운동, 해방 운동, 또는 독립과 해방을 위한 투쟁 과정에서 극도의 혼란이 야기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50년대 이후에 가톨릭 교회는 마르크스주의 혁명에 대한 반대 기조를 유지하면서 자본주의와 제3 세계 진영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혼란에 대하여서는 전통적 입장을 고수하였다. 물론 이 전통적 입장 안에는 중세 때 혁명을 정당화한 입장도 포함된다.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의 회칙 <민족들의 발전> (Populorum Progressio, 1967. 3. 26)이 이러한 사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인간의 기본권을 유린하고 국가의 공동 선을 극도로 해치는 명백한 폭군적 압제가 오래 지속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혁명과 폭동은 새로운 부정과 새로운 불균형을 초래하며 인간을 파멸로 이끌어간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아무도 현실의 악을 거슬러 투쟁함으로써 더 큰 불행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 (31항). 폭정의 종식 가능성을 인정하였다는 면에서 진일보한 것이지만, 공동선의 측면에서 더 큰 혼란과 피해를 초래하는 경우 라면 정당한 경우라 하더라도 찬성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견해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다소 진일보한 이 입장은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 운동이 마르크스주의와 유대를 강화하면서, 특히 가톨릭 교회의 해방 신학자들이 이에 경도되는 것을 보면서 마르 크스주의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폭력과 계급 투쟁, 혁명 일반에 대하여 가졌던 전통적인 입장을 재확인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78~2005)의 <자 유의 전갈>(Libertatis Nuntius, 1984. 8. 6)에 표현되어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논리에 따르자면 '분석' 은 '실천' (praxis)과 불가분한 것이며, 또한 그 분석은 이러한 실천과 연결된 역사 개념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분석은 또한 비판의 도구이며, 비판은 오직 혁명 투쟁의 한 단계이다. 혁명 투쟁은 역사적 사명을 부여받은 무산 계급의 투쟁이다"(8장 2절). 이어 <자유의 자각>(Libertatis Conscientia, 1986. 3. 22)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 다. "중대한 불의의 상황은 광범위한 개혁을 실천하고 부당한 특권을 배제할 수 있는 용기를 요구하고 있다. 개혁의 길을 불신하고 혁명의 신화를 선호하는 자들은 죄악 상황의 철폐 그 자체가 더욱 인간다운 사회의 창조를 위해 충분하다는 환상을 심화시킬 뿐 아니라 전체주의적 체제의 설정을 조장한다. 정의의 요구에 일치하는 새로운 사회적 · 정치적 질서를 건설한다는 관점에서 불의에 대한 투쟁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그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이 새로운 질서 건설의 모든 단계에서 이미 정의가 두드러져야 한다. 거기에 수단의 윤리성이 있다" (78항). "교회의 교도권은 개인의 기본권과 공동선을 심대하게 손상시키는 명백하고도 장기화된 폭정을 종식시키는 최후의 수단으로서 무력 투쟁을 용인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수단의 구체적인 적용은 극히 엄정한 상황 분석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고려할 수 있다. 사실 지속적인 폭력 기술의 발달과 폭력 사용에 따르는 심각한 위험의 증대로 인하여 오늘날 소극적 저항이라고 말하는 바가 도 덕 원리에 더욱더 부합되는 길이며, 바로 성공의 전망을 보여 주고 있다. 기존의 권력자들이나 반대자들이나 어느 누가 자행하든, 일반 국민들에 대한 보복, 고문이나 테러 수단 그리고 민중 시위 중에 사망자들이 나오도록 하는 계획적인 도발과 같은 범죄는 용납될 수 없다. 마찬 가지로 심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한 개인을 파멸시킬 수 있는 가증할 비방, 선전 또한 용인될 수 없다" (79항)라고 함으로써 전통적인 입장을 재확인하였다. 가톨릭 교회가 혁명을 반대하는 이유를 벨기에의 루뱅 가톨릭대학교 교수인 호세 콤블린(José Comblin, 1923~ ) 은 세 가지로 설명하였다. 첫 번째는 가톨릭 교회가 반혁 명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역대 교황 문헌이나 주장을 그 예로 들고 있다.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교회가 "최상 권위의 모든 권리들을 전복하고 파 괴하려고 하는 모든 것을 감행하는 자유"를 단죄한다고 하였다. 또한 "양심의 자유는 착란이며 언론의 자유는 가장 불길한 자유, 지독한 자유"(〈미라리 보스>)라고도 주장하였다. 교황 비오 9세도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선전을 비판하면서 그것이 "종교적 질서와 사회적 질서를 전복하려고 신법과 인정법을 폐지하려는 이들의 소행" (〈Quanta Cura〉)이라고 하였고, 교황 레오 13세(1878~ 1903)는 사회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허무주의자들을 열거하면서 야만스러운 이름들이라고 하였다. 두 번째 이유는 신약성서에서 드러난 전통적인 입장 때문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세속 권력에 대한 복종 의무로 요약할 수 있다. 콤블린은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회칙에 대한 군주에 대한 충성을 전복하고 그들을 권좌 에서 몰아내는 폭동이나 내란에 반대하는 것이었다고 평가하였다. 군주들이 권력을 무모하게 행사할 때도 가톨 릭 교회의 가르침은 안정과 질서를 더 중시하여 군주들 에 대항해서 폭동을 일으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극한 상황에 도달해도 "그리스도교적 인내는 공덕과 간곡한 기도로써 하느님 앞에 그 구제책을 찾는 법을 배운다"()라고 주장하였을 뿐이다. 세 번째 이유로는 마르크스, 혹은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이 이단이기 때문이다. 혁명의 자유는 거짓 자유이며, 진 정한 자유의 타락을 전제하고 있다. 이미 프랑스 혁명이나 사회 혁명 선언이 교회의 이단으로 취급된 전례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혁명은 초현세적 차원에서나 실현될 수 있다고 여겨지는 교회의 주제들을 현세적 차원으로 옮겨 놓기 때문에 이단이라는 것이다. 콤블린의 주장은 다소 비판적이기는 하지만 교회가 마르크스,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을 반대하는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다. 해방 신학에서의 혁명 : 가톨릭 교회의 공식 가르침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해방 신학에서 마르크스주의 혁명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그러나 해방 신학자들이 혁명에 대하여 직접 언급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들은 혁명론보다는 사회 분석 도구로써의 마르크스주의, 이른바 역사적 유물론에 대한 방법론적 수용만을 주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톨릭계 해방 신학자들도 이러한 입장에서 예외가 아니다. 이렇게 해방 신학이 마르크스주의를 방법론적으로 수용하면서, 가톨릭 교회 내에서는 이를 혁명 신학, 폭력 신학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해방 신학자 누구도 마르크스주의와 가톨리시즘, 즉 인간 해방과 그리스도교적 구원을 같은 차원으로 보지 않는다. 해방 신학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공식 입장은 <자유의 전갈>, <자유의 자각>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해방 신학의 혁명에 대한 입장은 일부 신학자들의 제한적인 의견에서 유추할 수밖에 없다. 이들의 입장을 변증법적 으로 보면 대체로 마르크스주의의 혁명관을 정(正), 가 톨릭 교회의 입장을 반(反)으로 볼 때 합(合)으로 평가할 수 있다. 대표적인 해방 신학자 구티에레스(G. Gutiérrez)는 "현 상태의 근본적 분쇄, 사유 재산 제도의 근본적 변혁, 피 착취 계급의 권력 장악과 사회 혁명만이 종속 상태를 종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것들만이 다른 종류 즉 사회주의적 사회를 향한 발전을 도모하거나 또는 가능하도록 영향을 줄 것"이라고 하여 혁명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아스만(Hugo Assman)은 제3 세계 혁명이 물질적 재화의 부족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부유한 사회에 사는 인간의 새로운 소외도 반대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혁명은 반제국주의적이고 반기술주의적이며 반발전이데올로 기적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의식의 변화, 이른바 비판적 반성을 통한 의식적 자각 없이 혁명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사회 질서를 영구 불변의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혁명적 생각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정치적 혁명 의식은 오랜 역사적 준비 과정을 거쳐야만 생겨난다 고 여긴 것이다. 한편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 노선은 혁명 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M. 스쿠얀 스) 중남미에서 혁명은 무엇보다 좀 더 인간다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근본적이고 신속하게 제도를 변화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콤블린은 억압 그 자체만으로는 반향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보았고, 폭동이 혁명으로 변하려면 정 치적 의식이 개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정치적 의식은 인간이 투쟁을 통하여 자신을 창조 하고 사회를 건설한다는 역사 의식을 가리킨다. 콤블린은 기존 사회와 모든 제도의 단순한 거절인 항거는 대안 없이 사회를 파괴하려는 것인 반면, 혁명은 건설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안에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혁명은 "모든 제도를 다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 체제를 거절하여 제도적으로 새로운 체제에 도달하는 것이다. 권위를 전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질서를 만드려는 것이다." 〔평 가〕 교회의 혁명관은 시대 상황에 따라 강조점을 달리하였다. 전체 교회사 안에서 보면 초대 교회와 교부 시대를 제외하고 모든 시대에 교회는 혁명에 대하여 부분적으로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과 마르크스 혁명에 맞닥뜨리면서 이전 시대와 다른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현대에 들어와서 혁명은 거의 대부분 마르크스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일어났고 또 조장되었기 때문에, 교회는 혁명에 대한 반대 입장을 강하게 표현하였지만, 동시에 직접 영향을 받는 경우도 늘어났다. 가톨릭 교회는 자유주의 · 민주주의 · 자본주의 혁명에 . 대해서는 비판적 지지를, 사회주의 · 공산주의 혁명에 대해서는 근본적 부정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교회는 특 정 정치 이념을 지지하지 않고 모두 비판한다. 자유주의 · 민주주의 · 자본주의 체제에서 나타나는 과도한 빈부 격차와 노동자 · 소외 계층의 비참함을 비판한다. 이러한 폐단을 치유하려는 사회주의 · 공산주의는 소유를 거부함으로써 인간 존엄성을 침해하고 교회 정신에 위배되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한 민족 문화의 고유 한 가치를 살리려는 민족주의 혁명이 극단적으로 진행되어 나치즘이나 파시즘으로 변질되는 경우도 인간 존엄성, 공동선의 추구라는 입장에서 우려를 표시한다. 동시에 가톨릭 교회는 폭력 혁명을 거부한다. 자기 보전의 최후 수단으로써 정당한 폭력의 사용은 허용하지만, "자기 권리를 보호할 경우라도 폭력의 사용은 삼가야 된다"(<노동 헌장> 14항, <지상의 평화> 162항, <사목 헌 장> 78, 83항, <팔십 주년> 43항, <자유의 전갈> 11장 7~11항, <자유의 자각> 76항)라고 하여 비폭력을 장려하고 있다. 따라서 폭력을 기본 수단으로 하는 사회주의 · 공산주의 혁명은 거부될 수밖에 없다. 공산주의 혁명은 폭력과 살육으로 전 인류 사회를 파괴하려는 혁명이며 인간 해방을 명분으로 하는 폭력과 혁명은 배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이다(〈사십 주년> 45항, <현대의 복음 선 교> 37항, <자유의 전갈> 11장 7항). 사실 교회는 콤블린이 지적한 대로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한 모든 혁명론이 구원의 수단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이념에 불과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는 구원과 해방을 혼동하지 않는다. 따라서 앞으로도 가톨릭 교회는 혁명에 대하여 비판적 입장을 고수하게 될 것이라 여겨진다. (-> 가톨릭 사회 교리 ; 공권력 ; 공동선 ; 교회와 국가 ; 마르크스주의 ; <미라리 보스> ; 사회 회칙 ; 폭력 ; 해방 신학) ※ 참고문헌  Jean-Yves Calvez, S.J., The Social Church and Social Justice-The Social Teaching of the Popes from Leo 13 to Pius 12(1878~1958), Henry Regenery Company, Chicago, 1961/ Julio Lois, Teologia de la liberacion : Opcion por los pobres(김수복 역, 《해방 신학의 구조와 논리》, 한국신학연구소, 1988)/ J. Larrain, The Concept ofldeology, London, Hutchinson, 1982/ G.H. Sabine et al., A History of Political Theory(성유보 . 차남희 역, 《정치사상사》, 한길사, 1983)/ 200주년 신약성서 번역위원회,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 판사, 2001/ 김춘호, 《사회 주의와 가톨릭 사회 교시》, 분도출판사, 1991/ 一, 《가톨릭 교회와 사회 변혁》, 분도출판사, 1998/ 한국 천주교 북한 선교위원회, 《마르크스주의와 가톨리시즘》, 분도출 판사, 1988/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교회와 사회》, 한국천주교중 앙협의회, 1994. [朴文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