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계흠 玄啓欽(1763~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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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

1797년 동래항에 정박한 영국 군함의 함장을 만나는 현계흠.
신유박해(辛酉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바오로. 일명 '사수' 혹은 '계온' . 1839년의 순교자 현경련(玄敬連, 베네딕다) 성녀와 1846년의 순교자 현석문(玄錫文, 가 롤로) 성인의 부친. 한양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약국을 운영하며 살았다.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얼마 안 되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1791년의 신 해박해(辛亥迫害) 때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후 더 욱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고, 1794년 말(음) 주문모 (周文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에는 동료 신자들과 함께 열심히 교회 일에 참여하였다. 또 동료들과 자주 신앙 집회를 갖거나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으며, 주문모 신부가 박해로 피신하게 되자 자신의 집을 피신처로 제공하기도 하였다. 당시 그의 집 은 명도회(明道會)의 하부 조직인 '6회' (六會)의 하나로 선정되어 있었다. 1797년 9월(음)에 현계흠은 아우가 살고 있는 경상도 남쪽의 동래 지방에 갔다가 영국 배를 보게 되었는데, 훗날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을 만나 그에게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1801년 신유박해로 교우들이 체포되자 현계흠은 기회를 틈타 다른 곳으로 피신 하였으나, 일가친척들이 시달림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는 4월(음)경에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포도청에 자수하 였고, 같은 달에 형조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9월(음)에 체포된 황사영의 문초 과정에서 그의 이름이 나오게 되자, 10월(음)에 의금부로 이송되어 다시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고 1801년 12월 10일(음력 11월 5일)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 38세였다. (-> 신유박해 ; 현경련 ; 현석문) ※ 참고문헌 St. A. Daveluy, vol. 4, Notes pour I'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1860년 필사 정리), M.E.P. 소장/ 《사학징의》 《추 안급국안》/ 《순조실록》/ 샤를르 달레,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 천주교회사》 상,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車基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