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교회사연구소

湖南敎會史研究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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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호 순교자 묘지 유해 발굴 현장(1983.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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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호 순교자 묘지 유해 발굴 현장(1983. 5) .


1983년 5월 16일에 전주교구 소속 김진소(金眞召, 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설립한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 단체. 전북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 천호 마을에 소재. 전주 교구사와 한국 천주교회사의 연구 및 순교자의 순교 정신을 드높이고, 신앙 유산을 연구 보존함으로써 전주 지방사와 한국 근현대사, 그리고 한국 문화의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전주교구사와 한국 천주교회 사의 연구 및 지원, 연구 자료의 수집 및 정리 보관, 연구 발표회 및 특별 연구 강좌의 개최, 연구지 발행 및 연구 자료의 편찬 간행, 순교자 현양 사업의 전개, 교회 문 화 발굴 보존 작업 등의 제반 사업을 펼치고 있다. [전 사] 호남교회사연구소를 설립한 김 신부는 사제 서품을 받은 다음해인 1973년 8월 광주 가톨릭대학 교수로 부임한 뒤, 한국 천주교회의 토착화에 깊은 관심을 갖고 구교우들이 살고 있는 교우촌을 답사하기 시작하였다. 틈나는 대로 교우촌의 구교우들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던 가운데, 또한 그들이 대대로 전해 내려온 천주가사 책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5~6 살 때부터 할머니나 어머니 무릎에서 배운 천주가사를 유창하게 들려 주었고, 이들이 부르는 천주가사를 들은 김 신부는 박해기 신자들의 신앙이 프랑스 선교사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단순히 맹목적이거나 깊이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아가 한국 교회가 프랑스 선교사들이 써 놓은 한국 천주교회사에 지나치게 의 존함으로써 한국인의 정서를 바탕으로 한 신심을 왜곡하고 있으며, 외국인의 시각으로 한국인을 이해하고 해석한 역사를 비판 없이 수용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를 서양 교회사화하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김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사를 제대로 정리하고 알리는 일을 하고자, 구교우들이 사는 산골 구석구석을 답사하며 사료를 수집하여 정리하고 연구하여 <신학 전 망》 24(1974)호와 28호(1975)에 <금침가>와 <피악수선가>를 각각 발표하였다. 1975년 1월 광주 가톨릭대학교 교수직을 그만두고 나바위 성당 주임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그가 한국 천주교회사 사료 수집과 연구 활동을 계속하자, 1976년 1월 전주교구장 김재덕(金在德, 아우 구스티노) 주교는 그를 교구사 자료 수집과 정리 작업을 담당하는 '교회사 사료 발굴 정리반' 의 책임자로 임명하 였다. 이어 교구장의 배려로 1977년 12월부터는 사료 수집이나 교회사 공부에 도움이 되는 대학생 지도 신부 겸 학생 회관 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또한 그는 《신학 전망》에 발표한 논문을 읽고 나바위 성당으로 직접 찾아온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최석우(崔 奭祐, 안드레아) 신부의 요청으로, 1977년 5월 한국교 회사연구소 제11회 월례 발표회에서 <천주가사의 기원과 역사>를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한국교회사연구소의 강연과 연구 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한국 천주교회사 전반에 대한 연구 역량을 꾸준히 축적하면서, 아울러 전 주교구사 관련 자료도 폭넓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설립 및 연혁] 1983년 2월 김 신부는 교회사 연구 전담 신부로 발령을 받고, 같은 해 5월 '정양소' (전주시 진 북동 1026-2)에 호남교회사연구소를 설립하였다. 1985년 5월 연구소를 가톨릭 센터(전주시 덕진구 서노송동 5606)로 이전하였고, 1986년 2월에는 사회복지회관(구 성모 병원, 전주시 전동 2가 76번지) 4층으로 다시 옮겼으며, 1988년 1월에는 천호 피정의 집 관장으로 발령을 받음 에 따라 천호 피정의 집(완주군 비봉면 내월리 산 905-1)으로 재차 이전하였다. 그러다가 1992년 1월 연구소 전담 신부로 발령을 받자 천호 마을(완주군 비봉면 내월리 천호 56-39)에 연구소 부지 480평을 마련하여 건물을 신축하였으며, 같은 해 4월에 입주하여 2005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연구소 건물은 총 70평의 2층 양옥 건물로 2층(35 평)은 사제관, 1층(35평)은 도서실 겸 연구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2005년 상반기에는 기존 건물의 지붕을 개량하고 한 국고전문화연구원(韓國古典文化研究院院) 연구 활동을 돕기 위해 통나무집 '천산재' (天山齋, 17평)와 옥외 화장실이 딸린 숙소(10평)를 신축하여 같은 해 6월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천산재의 일부 공간은 기도와 미사 및 휴식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일부는 연구소와 한국고 전문화연구원의 연구실로 사용되고 있다. 연구소 소장은 초대부터 현재까지 김진소 신부가 계속 맡아 오고 있으며, 연구 실장은 양희찬(梁熙讚) · 변주승(邊株承) 교수 를 거쳐 현재는 서종태(徐鍾泰, 2005. 2~현재) 교수가, 출판 사업은 흐름출판사 한명수(韓明洙) 사장이 담당하고 있다. [활 동] 호남교회사연구소의 활동은 자료 수집, 연구 · 출판, 순교자 유해 발굴, 시복 시성 운동 추진 및 한국고전문화연구원 지원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우선 자료 수집 활동에 대해 살펴보면, 1973년부터 김진소 신부가 산골 교우촌들을 돌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한 결과 <금침가>, <피악수선가> 등의 천주가사집 및 박해 기 때 신자들이 공부한 교리서, 기도서, 심신서 등을 다수 소장하게 되었다. 또한 1889년부터 전라북도에서 활 동하던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 한국인 신부들이 주 교에게 보낸 사목 보고서인 <위텔 문서>와 1882년부터 1910년까지의 교세 통계표, 병인년 순교자 증언록 및 병인년 순교자 중 시복 대상자의 교회 재판 기록 복사본, 그리고 《다블뤼 주교 비망기》의 복사본 등을 한국교회사 연구소 문서고로부터 전해 받아 소장하고 있다. 또한 전 주교구청 관리국 문서고에서 찾아낸 전주교구 사료 등도 소장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국내에 반입된 골롬반 문서, 메리놀 문서, 베네딕도회 문서들 중 전주교구 관련 문서를 수집하고 있다. 이 밖에 한국 천주교회사에 관한 영인 본 자료와 단행본 연구서는 물론이고, 사상 · 역사 · 종교 · 지리 · 문학의 다양한 서적들을 구비하여 연구자들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다. 연구 · 출판 활동으로는 무엇보다도 <전주교구사》의 저술을 들 수 있다. 그 기초 작업으로 1978년 11월부터 5년여에 걸친 정리 · 조사 · 답사 작업으로 이루어진 전 주교구사 연구 자료집 제1집 <교세 통계표 : 1882~ 1986》와 제2집 《지명 조사 보고서 : 1882~1911》를 1987년 3월 간행하였다. 《지명 조사 보고서》는 1882년부터 1911년까지 선교사들이 보고한 교세 통계표에 나 오는 박해 시대의 교우촌 500여 곳을 보고서에 기록된 순서대로 찾아다니며 그 지명을 일일이 확인한 것이다. 이어서 1993년 8월에는 그동안 수집한 자료를 정리하여 전주교구사 연구 자료집 제3집 《전주교구사 연표 : 1784~1992)를 간행하였다. 이 책의 특징은 사건의 전거를 일일이 밝힌 것으로, 한국 교회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렇게 축적된 연구 역량을 바탕으로 마침내 1784년부터 1997년 6월까지 213년의 역사를 총정리한 《전주교구사》(전 2권)를 1998년에 간행하였다. 총 1,318쪽으로 되어 있는 1권은 전주교구의 통사이고, 총 1,757쪽으로 되어 있는 2권은 전주교구의 본당 · 기관· 단체사이다. 박해기 신자들이 살았던 현장을 일일이 답사하여 조사한 자료와 철저한 사료 비판을 토대로 한국인의 정서를 담아 완성한 이 책은, 교구사 편찬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작품으로 평가되어 1999년 가톨릭 학술상을 받았다. 그 밖에도 1990년 8월에 한국교회사연구소와 합동으로 고군산열도 학술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1987년 4월 에는 《신바람 사는 보람》, 1991년 1월에는 《부안군지》 <천주교편>, 1995년 2월에는 《완주군지》 <천주교편>, 1996년 5월과 11월에는 《전동 성당 100년사》와 《복자 성당 30년사》 등을 각각 펴냈고, 1997년 6월에는 《고종 실록 천주교사 자료 모음)(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1997) 을 편찬하였다. 2002년 9월에는 현대말로 풀어 쓴 《이 순이 루갈다 남매 옥중 편지》를, 2003년 12월에는 한국 교회사학 제1집으로 《한국 근현대사와 종교 문화》를 간 행하였고, 2004년 7월에는 순교자 김종륜(金宗倫, 루 가)이 필사한 《루갈다 및 바오로 순교기》를 영인 출판하였다. 순교자 유해 발굴 활동으로는 우선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 천호산 순교자 유해 발굴을 들 수 있다. 기해 · 병오 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시성을 앞두고 호남교회사연구소는 전주교구의 시성 대상자 7명에 대한 재조사와 시성 대상 순교자 묘 찾기에 나섰다. 그 결과 1901년 시복 청원서를 제출할 때 한재권(韓, 요셉) 복자의 이름과 세례명이 '한원서(베드로)' 로 잘못 기록된 사실을 밝혀냈다. 또한 1923년에 시복 대상자들의 묘소를 확인하여 작성한 <다리실 병인 순교자 분묘 조사기>를 한국교회사연구소로부터 입수하여, 1983년 5월 천호산에서 순교자 유해 발굴 조사를 벌여 총 12구의 유해를 발굴하였다. 그리고 이들 유해에 대하여 교회 사학자인 최석우 신부와 이원순(李元淳) 교수의 검토 및 전북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 교실 이무삼(李武三) 교수와 전북대학교 치과대학 구강 진단학 교실 신근백 교수 등의 해부학적 · 법의학적 조사, 그리고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의 법의학적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이 유해들은 병인년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복자 정문호(바르톨로메오)와 한재권 및 병인 년 여산에서 순교한 김성화(야고보) 등 8인과 무명 순교자 2인의 유해로 판명되었다. 또한 1988년 9월, 고산 본당 수청리 공소와 석장리 공소 중간 국도변에 묻혀 있던 병인년 순교자 김영오(아우구스티노)의 유해를 발굴하여 천호 성지로 이장하였다. 아울러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 가족 묘의 발굴 조사도 주관하였다. 유항검 가족 7명의 유해는 원래 초 남리(현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초남 부락)에서 서북쪽으로 500m 쯤 떨어진 재남리(현 김제군 용진면 남정리) 바우백 이에 묻혀 있다가, 전동 성당 초대 주임 보두네(F.X. Baudounet, 尹沙勿) 신부가 1914년 사순절 때 묘를 발굴하여 유해를 전동 성당 대청에 모셨으며, 같은 해 4월 현 재의 치명자산으로 옮겨 모셨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유항검을 배교자로 규정한 달레(C.C. Dallet, 1829~ 1878) 신부가 쓴 《한국 천주교회사》의 잘못된 기록으로 인해 유항검의 유해가 치명자산에 모셔지지 않았다는 설 이 제기되었고, 이에 대해 호남교회사연구소는 달레의 기록이 다블뤼(M.N.A. Daveluy, 安敦伊) 주교의 기록에 나오는 유항검에 대한 중요한 부분을 누락시킨 잘못된 기록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리고 치명자산에 묻혀 있는 유항검 가족 묘가 7명의 합동 묘라는 사실을 여러 자료에서 찾아 고증하였으며, 1993년 11월 시굴 작업을 통해 유항검의 유해가 다른 6명의 유해와 함께 묻혀 있 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어 1997년 5월에는 완주군 소양면 화심리 유상리 막고개에서 순교자 유해 발굴 조 사로 2구의 유해를 발굴하여 전북대학교 치과대학에 치아 감정 등 법의학적인 조사를 의뢰하였다. 한편 대전교 구의 의뢰로 1988년 9월 공세리 성당 맹고개에서 순교자 박의서(사바) · 원서(마르코) · 익서 삼형제의 유해 를, 1989년 4월에는 신평 본당에 속한 원머리 지역에서 순교자 4명의 유해를 발굴 조사하였다. 시복 시성 운동은 두 단계로 나누어 추진하였다.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지내면서 교구민 사 이에 이순이(李順伊, 루갈다) 신심 운동을 바탕으로 동정 부부 순교자의 시복 시성 추진을 요구하는 소리가 높 아지자, 김진소 신부는 전주교구의 경우 독자적으로 시복 시성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저간의 사정 을 교구장에게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전주교구에서는 독 자적으로 추진 운동을 펼치기로 결정하고, 1987년 10월 '시복 청원 준비위원회' 를 결성하여 본격적으로 시복 시 성 추진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순교자 윤지충(尹持 忠, 바오로), 권상연(權尙然, 야고보), 유항검, 이순이, 유중철(柳重哲, 요한)을 시복 시성 추진 대상자로 선정하여 교황청에 청원하였고, 그 결과 교황청 시성성 장관 으로부터 1989년 4월 2일자로 이들 다섯 순교자의 시복 시성 청원에 아무런 이의가 없다는 <5인 순교자 시복 시 성 청원에 대한 교황청 회신>을 받았다. 그 뒤 2001년부터 한국 천주교 주교 회의가 각 교구 별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시성 작업의 통합 추진을 본격 적으로 진행하여, 2003년에 124위 시복 시성 대상자를 선정하고 이들에 대한 약전을 시성성에 제출하여 마침내 '시복 시성 추진에 아무런 장애도 없다' 는 회신을 받았 다. 이들 124위 시복 시성 대상자들 가운데는 이미 선정 된 다섯 순교자 외에도 김제, 무장, 전주에서 신유박해 (辛酉迫害) 때 순교한 한정흠(韓正欽, 스타니슬라오) , 최여겸(崔汝謙, 마티아), 김천애(金千愛, 안드레아), 윤 지헌(尹持憲, 프란치스코), 유중성(柳重誠, 마태오), 유문석(柳文碩, 요한) 등 6명과 정해박해(丁亥迫害) 때 순 교한 이경언(李景彥, 바오로) 및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순교한 이일언(李日彥, 욥), 신태보(베드로), 이태권(李 太權, 베드로), 정태봉(鄭太奉, 바오로), 김대권(金大權, 베드로), 홍재영(洪梓榮, 프로타시오), 김조이(金, 아나 스타시아), 심조이(沈, 바르바라), 이봉금(아나스타시 아), 최조이(崔, 바르바라), 이조이(李, 막달레나), 오종례(吳宗禮, 야고보) 등 13명을 더하여 총 19명의 순교자 가 추가로 포함되었다. 김 신부는 시복 시성 작업의 통합 추진을 이끌고 있는 '시복 시성 주교 특별위원회' 의 '상 임 위원회' 상임위원과 '시복 시성 추진 대상자 선정위 원회' 선정위원 그리고 '역사 전문가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아 시복 시성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한편 한국고전문화연구원에 대한 지원 활동은 우리 민족의 문화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한국 천주교회사에 대한 이해도 절름발이가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과 지방 학문의 발전을 도모하는 차원에서 2000년부터 계속되고 있다. 호남교회사연구소에 사무실을 두고 있는 한국고전 문화연구원은 조광(趙班) 교수와 변주승 교수가 원장과 부원장을 각각 맡고 있으며, 여기에 소속된 젊은 연구자 들은 학술진흥재단으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 정교 (鄭喬, 1856~1925)가 1860년부터 1910년까지의 역사를 서술한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와 영조 때 전국 353개 고을의 읍지(邑誌)를 종합한 《여지도서》(輿地圖書)를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완료하였다. 그리고 현재는 선 조 때부터 고종 때까지 추국청(推鞫廳)에서 중죄인을 심문한 기록인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의 번역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10여 명의 연구원들이 매달 1회씩 호남 교회사연구소에 모여 3박 4일 동안 세미나를 하며 번역 원고를 축자 검토하고 있으며, 연구소는 숙식과 연구 활동에 필요한 모든 편의를 지원하고 있다. 번역 작업이 완료된 《대한계년사》는 2004년 6월에 출판되었으며, 《여 지도서》의 출판도 준비 작업 중에 있다. (→ 전주교구 ; 천호 성지) ※ 참고문헌  김진소, 《전주교구사》 I . II, 천주교 전주교구, 1998/ -, 《천주교 전주교구사 연표》, 호남교회사연구소, 1993/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 시성 주교 특별위원회, 《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 시성 주교 특별위원회, 2003/ 김진소, <전주교구>, 《한국가톨릭대사전》 10권, 한국교회사연구소, 2004/ 서종태, <천호 성지>, 《한국가톨릭대사전》 10권, 한국교회사연구소, 2004/ 김진소, <금침가>, <신학전망> 24호, 1974/ - <피악수선가>, <신학전망> 28 호, 1975/ -, <천주가사의 기원과 역사>, 《교회와 역사》 20호, 19771 조광, < '한국교회사학' 을 시작하며>, 《한국 근현대사와 종교 문화》, 천주교 호남교회사연구소, 2003. 〔徐鍾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