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노리오 1세 Honorius(?~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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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노리오 1세.

호노리오 1세.


교황(625. 10. 27~638. 10. 12). 그리스도 단의설(單意 說, monotheletismus)을 따르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세르지우스(Sergius, 610~638)의 주장에 동조하였다는 이유로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680~681)에서 단죄되었다. [생 애] 《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alis)에 따르면 호노리오는 이탈리아 남부의 캄파니아(Campania) 지방에서 집정관 페트로니우스(Peronius)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지만, 이 외에 그가 교황으로 선출되기 이전의 행적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없다. 만일 그가 교황으로 선출될 때 당시의 관례에 따라 황제의 동의를 받았다면,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아니라 라벤나(Ravenna)에 있던 동로마 제국의 총독으로부터 받았을 것이다. 서방 지역에서의 활동 : 호노리오는 625년 10월 27일 교황으로 즉위한 즉시 이탈리아 내부 문제에 개입하였다. 교황은 라벤나의 총주교인 이사악(Isaac, 625~643)을 로마(Roma)로 보내, 롬바르드의 왕 아달로알드(Adaloald, 616~625)를 폐위시키기 위해 토리노(Torino)의 공작 아리오알드(Arioald)를 도와준 주교들에게 속죄를 위한 고행을 명하였다. 그리고 627년 6월 10일에는 사르데냐 (Sardenga)의 고위 관리인 테오도루스(Theodorus)의 지나친 월권 행위를 책망하는 편지와, 공증관인 가우디오수스(Gaudiosus)와 장군인 아나톨리우스(Anatholius)를 나폴리의 최고 행정관으로 임명한다는 편지를 각각 보냈다. 교황의 묘비에는 그가 동방과 서방 교회 사이에 일어 났던 소규모의 분리를 종식시켰다고 되어 있다. 이는 553년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삼장서' (Tria Capitula)를 단죄한 결정에 대해 이스트라(Istra) 지역의 교회가 거부하여 일어난 사건으로, 호노리오 1세는 628 년 2월 18일, 로마의 차부제인 프리모제니오(Pimogenius)를 그라도(Grado) 교구장으로 임명하여 사태를 종식시켰다. 638년 스페인에서 제6차 톨레도 교회 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교황은 부제 투르니오(Tuminus)를 파견하여 고위 성직자들이 비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억압을 가하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는 내용의 훈령을 발표하였다. 이는 아마도 유대인에 대한 문제를 언급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대해 사라고사(Zaragoza)의 주교인 브라울리오(Braulio)는 전체 교회 회의의 이름으로, 교황의 그 훈령은 지나친 월권으로 여겨진다는 내용의 답신을 보냈으며, 제4 차 톨레도 교회 회의(633)와 마찬가지로 반유대적인 입장을 단호하게 천명하였다. 영국의 역사가인 베다 존자(Beda Venerabilis, 672/673~ 735)는 교황 호노리오 1세가 634년 캔터베리(Canterbury)의 대주교인 호노리오(Honorius)와 요크(York)의 대주교인 바울리노(Paulinus)에게 팔리움(Pallium)을 수여하였다고 기록하였으나, 교황이 캔터베리 교구를 영국의 수석 교구로 승격시켰다는 문서는 가짜로 판명되었다. 베다 존자의 기록에 의하면, 교황은 그리스도인이 된 켈트족(Kelt)에게 로마 전례와 그에 따른 부활절 날짜를 받아들이도록 권고하였으며, 비리노(Birinus)를 파견하여 앵글로색슨족(Anglo-Saxon)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리스도 단의설 논쟁 : 634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 주교인 세르지우스는 호노리오 1세에게 당시의 신학적인 논쟁 과정을 상세히 적어 보냈다. 그는 이 편지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의지의 작용이 하나임을 강조하는 문서를 발표하여 그리스도 단성설(單性說, monophysitismus) 을 물리치고 가톨릭 교회와 일치하려는 시도가 어려움에 봉착하였다고 알렸다. 그의 주장은, 신성과 인성이 매우 밀접하게 결합되어 서로 일치되어 있기에 실제로는 그리스도 안에 단 하나의 신인적 힘 또는 단 하나의 의지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리스도 단의설로, 일치의 원리를 위격에서 본성으로 옮긴 것이었다. 이에 대한 답신에서 호노리오 1세는, 의지의 작용이 하나인지 아니면 두 개인지에 대한 문제를 더 이상 언급하지 말자는 입장을 전적으로 지지하면서, 이 문제는 낱말을 둘러싼 논쟁이라고 일축해 버렸다. 나아가 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 안에서 작용하는 의지를 갖고 있지만 그런 문제보다는 오직 한 분인 그리스도에 관심이 집중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칼체돈 공의회(451)에서의, 그리스도 안에는 인성과 신성이 결코 섞일 수 없으며 개별적이며 불변으로 남아 있다는 신앙 고백을 인용 하면서 인성과 신성의 조화로움과 일치 안에서 그리스도 에게는 하나의 의지가 존재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 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마르 14, 36)라는 말씀이 성부의 뜻과 다르게 나타난 의지가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계획' 에 따라 인성을 취하였음을 가르쳐 주기 위해 한 말이라고 해석하였다. '구원 계획' 이라는 말로 교황은 말하는 사람의 처신을 나타내려고 하였으나 이 말은 그리스도 단의설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여졌고,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의지가 배제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호노리오 1세의 이 편지는 단지 개인적인 의견을 표한 것으로, 교황의 무류성 범주에 속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하나의 의지 작용이 있는지 아니면 두 개의 의지 작용이 있는지에 대하여 언급하지 말라고 지시함으로써, 하나의 의지 작용이 있다는 이단의 주장과 두 개의 의지 작용이 있다는 교회의 정통 가르침을 동등한 수준에 놓는 실수를 범하였다. 예루살렘(Jerusalem)의 총대주교인 소프로니오(Sophronius, 633/634~638)는 호노리오 1세에게, 그리스도 안에 의지의 작용이 하나인지 두 개인지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분 안에 신성과 인성이 분명히 구분되는 것처럼 의지의 작용도 분명하게 구분되어져야 한다는 교회 회의의 편지를 보냈다. 이로써 교황의 잘못이 드러났다. 교황이 소프로니오에게 보낸 답변은 유실되었지만 그가 세르지 우스 총대주교에게 보낸 단편적인 글들을 보면, 교황은 의지의 작용이 하나인지 아니면 두 개인지에 대한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자신의 입장을 거듭 천명하였으며 소프로니오로부터 논쟁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교황 자신은 성자의 한 위격 안에 완전한 두 본성이 함께 있으며 두 개의 의지 작용도 이 두 본성에 따라 적절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확고하게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의 의지에 대한 논쟁은 계 속되어, 결국 4년 뒤(638)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헤라클리우스(610~641)는 <신앙에 관한 진술>(Ecthesis)이라는 문서를 제국법으로 반포하여 의지의 작용에 대한 논쟁을 금지시키면서, 그리스도 안에는 단 하나의 의지가 있다 는 것을 인정하라고 하였다. 이 외에 교황 호노리오 1세의 활동에 대해 알려진 것은 없다. 그는 로마에 있는 여러 성당들을 아름답게 개축하고 라테란 대성전 근처에 성 안드레아와 바르톨로메오 수도원을 건축하였으며, 638년 10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평 가] 후임 교황인 세베리노(640)는 그리스도 단의 설이 틀렸다고 결정한 것으로 여겨지며, 교황 요한 4세 (640~643)는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신앙에 관한 진술>이 정통 교리에 어긋난다고 확고하게 단죄하였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의 신임 총대주교인 피루스(Pyrrhus, 638~ 641)가 반론을 제기하면서 그리스도 단의설을 지지한 호노리오 1세의 권위를 지적한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였다. 요한 4세는 전임 교황인 호노리오 1세가 두 개의 충돌되는 의지 작용이 있음을 부정한 것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면에 제한된 것이며, 신성과 인성이란 두 본성에 공 동으로 작용하는 하나의 의지를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그를 변호하였다. 이는 타당한 의견이지만, 그리스도의 의지 작용이 몇 개인지에 대한 논의를 금지시킨 그의 견해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다. 교황 호노리오 1세의 입장은 지속적으로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645년 6월에 있었던 논쟁에서 막시모 콘페소 르(Maximus Confessor, 580~662)는 총대주교에서 면직된 피루스에게 이렇게 답변하였다. 즉, 호노리오 교황의 답변은 그에게 제시된 문제의 사안이 갖는 한계 안에서 보아야 하며, 그는 절대로 그리스도의 신성 안에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의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649년에 교황 마르티노 1세(649~653)가 주재한 라테란 교회 회의는 그리스도 단의설을 정통 교리에 어긋나는 것으로 배척하고 세르지우스를 이교도로 단죄하였다. 그리고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는 호노리오 1세의 그리스도 단의설에 대한 입장을 재평가하며, 세르지우스 총대주교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가 12차와 13차 회기에서 낭독되는 등 여러 차례 논의되었다. 결국 681년 9월 16일에 개최된 마지막 회기에서 호노리오 1 세는 이단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그가 이단자인 세르지 우스와 알렉산드리아의 치루스(Cyrus)의 사상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공의회는 교황 아가토(678~681)에게 공의회의 결정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으나, 그가 681년 1월 10일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후임 교황인 레오 2세(682~683)에게 이 문제가 넘겨졌다. 682년 에 레오 2세는, 공의회의 결정을 승인한다는 것과 교황 호노리오 1세를 단죄한다는 것을 동로마 제국의 황제 콘 스탄티누스 4세(668~685)에게 서한으로 통보하였다. 왜 냐하면 "그는 이 사도적 교회를 사도적인 교리 전승에 의하여 비추지 않고, 굴욕적인 배신으로 순수한 신앙이 더럽혀지도록 방임하였기 때문이다" (qui hanc apostolicam ecclesiam non apostolice traditionis doctrina lustravit sed prophana pro traditione immaculatam fidem dari permittendo conatus est) . 그리고 이와 유사한 편지를 스페인의 주교 들에게도 보냈다. 이 서한에서는 교황 호노리오 1세에게 이단에 직접 관여한 죄를 씌우지 않고 다만 그가 "이단 의 불길을, 그의 사도적 권위에 맞갖게 시초에 직접 잡지 않고, 태만으로 그것을 장려하였다" (qui flammam heretici dogmatis, non ut decuit apostolicam auctoritatem, incipientem extinxit, sed negligendo confovit)라고 하였다. 서고트족 (Visigoth)의 왕인 에르비지우스(Ervigius)에게 보낸 서한에서도 이와 비슷한 내용으로 설명하였다. 이는 호노리오 1세가 부주의로 잘못을 저질렀다는 의미에서, 교황 레오 2세가 직권으로 유죄 판결을 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단의설에 대한 개입으로 교황 호노리오 1세 의 정통성에 대한 문제, 교황의 무류성에 대한 문제는 계 속 대두되었으며, 특히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 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유발되었다. 독일의 대표적인 교 회사가인 될링거(J.J.I. von Döllinger, 1799~1890)는 호노리오 1세의 예를 들면서 '교황좌 선언' (ex cathedra)에 따른 교황의 무류성을 반대하였다. 하지만 호노리오 1세는 신학적 요점을 꿰뚫지 못하였고 그리스인들의 사유를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성서의 소박한 언어 사용으로 돌아감으로써 논쟁들을 평가절하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교도권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확언하고 최종 결정을 내리는 것을 삼가하였음이 분명하다. (→ 그리스도 단의설 ; 무류성 ; 바티칸 공의회, 제1차 ;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 참고문헌  A. 프란츤, 최석우 역, 《세계 교회사》, 신학 텍스트 총서 2.1, 분도출판사, 2001/ H.G.J. Beck, 《NCE》 7, pp. 79~821 J.N.D. Kelly, Oxford Dictionary of Popes, Oxford Univ. Press, 1996, pp. 70~71/ R. Baumer, 《LThK》 5, pp. 474~475/ 후베르트 예딘, 최석우 역, 《세계 공의회사》, 신학 텍스트 총서 2.3, 분도출판사, 2005/ 클라우스 샤츠, 이종한 역, 《보편 공의회사》, 신학 텍스트 총서 2.4, 분도출판사, 2005. [邊琪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