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미스다 Hormisdas(?~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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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

호르미스다.
교황(514. 7. 20~523. 8. 6) . 성인. 축일은 8월 6일. 호르미스다는 이탈리아 중부의 프로시노네(Foosinone)의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교황 심마코 (498~514)의 부제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교황의 후계자로 지명된 듯하다. 서품을 받기 전 이미 결혼을 하였고, 그의 아들 실베리오(Silverius) 역시 후에 교황(536~ 537)이 되었다. 아카치우스 이교의 해결 : 514년에 교황이 된 호르미 스다는 우선 대립 교황인 라우렌시오(498-506)의 남은 세력을 약화시켜 교회 공동체로 받아들임으로써 평화를 가져왔다. 또한 그는 무엇보다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아카치우스(Acacius, +489)가 그리스도 단성설 (monophysitismus)을 주장함으로써 발생한 동서방 교회 간의 아카치우스 이교(484~519)를 종식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하지만 재임 초기의 4년 동안에는 거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였다. 그리스도 단성설을 따르던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1세(491~518)는 자신의 영토 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칼체돈 공의회(451)의 정통 교의 가 되살아나자 트라케(Thrake)의 헤라클레아(Heraclea) 에서 교회 회의를 개최하였지만, 황제의 의도와 달리 그 결과는 동서방 교회의 일치를 회복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사려 깊었던 호르미스다는 동고트족으로 이탈리 아의 왕이 된 테오도리쿠스(Theodoricus, 493~526)와 의논하여 515년 8월에 콘스탄티노플로 대사(大使)를 파견 하였으나 결실을 맺지 못하였고, 517년에 다시 대사를 파견하였다. 이 대사들은 모두 교회 일치를 위한 교황의 자세하고 확고한 조건을 전하였다. 즉 칼체돈 공의회 (451)와 교황 레오 1세(440~461)의 편지들에 대한 공식 적인 인정, 아카치우스와 그리스도 단성설을 따르는 사 람들에 대한 단죄, 그리고 면직되거나 추방된 모든 주교 들에 대한 로마의 재심-이 조건의 목표는 로마의 법적 우위권을 인정받기 위한 것이었다-을 공적으로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교황은 두 번째로 파견한 대사를 통해 칼 체돈 공의회의 정통 교의를 따르는 이들의 세력을 모아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1세에게 압력을 가하려 했으나 실 패하였다. 정치적으로 강해진 황제가 교황의 강경한 요 구에 승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518년 7월 9일 갑자기 사망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새 황제인 유스티누스 1세(518~527)는 칼체돈 공의회가 결정한 교의를 강하게 지지하는 인물이었기에, 콘스탄티노플 백성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어 재빨리 '두 가지 본성' 의 그리스도론을 제국의 공식 신앙으로 받아들였다. 황제 유스티누스 1세 의 초대(518. 9. 7)에 응답하여 호르미스다는 테오도리쿠스의 동의하에 콘스탄티노플로 세 번째 대표단을 파견하 였고, 문제의 해결을 위해 이전과 똑같은 내용을 요청하였다. 이 대표단의 중심 인물은 알렉산드리아의 부제로 후에 대립 교황이 되는 디오스코로(Dioscous, 530)였다. 519년 3월 28일 황제의 궁전에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 주교인 요한 2세(John II the Cappadocian, 518~520)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주교들 및 수도원장들은 황제의 요청으로 교황이 직접 작성한 <호르미스다의 신앙 고백문> (Formula of Hormisdas)에 서명하였다. 이 신앙 고백문은 단지 칼체돈 공의회의 그리스도론만 수용하고 그 정신에 서 벗어나는 모든 것을 단죄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로마 교회가 가톨릭 신앙의 순수함을 보존해 온 사도좌임을 분명히 인정하며, 아카치우스와 그의 4명의 후계자들을 처벌하는 것이었다. 이 신앙 고백문을 받아들임으로써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분열은 종식되었으며, 이 신앙 고백문은 이후의 역사에 자주 등장하였다. 특히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는 이것을 교회 헌장인 <영원 한 목자>(Pastor Aeternus, 1870. 7. 18)에 반영시켰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와의 관계 : 비록 아카치우스 분열이 끝나고 칼체돈 공의회의 결정이 동서방 교회 모두에게 받아들여졌지만 호르미스다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으며, 유스티누스 1세와 그의 조카이자 후임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527~565) 역시 로마와의 재일치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비록 로마 주교의 수위권을 인정하 는 신앙 고백문에 서명하였지만 그들의 오랜 목표는 제 국을 위해 이탈리아를 되찾는 것이었다. 그들은 흥정을 시작하기 위해 로마 주교좌의 법적인 우위권을 거부하고 이전에 추방되었던 정통 주교들을 회복시켰다. 신앙 고 백문에 서명하기 전 총대주교인 요한 2세는 '옛 로마' 와 '새 로마' (civitas iunior Romae)가 이제는 하나라고, 즉 같 은 영예를 지닌다는 기쁨을 과장되게 표현한 내용을 첨 가하였다. 그 이후 동로마 제국 황실이 이 사실을 확실히 하려고 노력하는 몇 달 동안, 호르미스다는 동방 지역에 서 신앙 고백문에 대한 광범위한 증오가 번지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계속해서 그 내용이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고집하였다. 황 제와 총대주교는 서로 간의 이러한 차이점이 있는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길을 갔고, 시행 가능한 것들만을 시행 하였다. 521년 3월, 호르미스다는 유스티누스 1세에게 이 사실을 확실히 함에 있어 위축되지 말라고 권고하면 서, 동방에서 분열의 잔재를 제거하기 위해 신임 총대주 교인 에피파니오(Epiphanius, 520~536)를 자신의 대표자 로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실제로는 칼체돈 공의회의 결 정 제28조(콘스탄티노플의 주교좌가 로마 다음의 주교좌로서 특권과 영예를 갖는다)를 인정하게 되었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위치 또한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론의 논란 : 동서방 교회의 서로 다른 태도는 스키티아(Scytha)의 수도승들이 그리스도 단성설과 네 스토리우스주의(Nestorianismus)로부터 칼체돈 공의회의 그리스도론을 보호하기 위해, "성삼위의 한 위가 육신을 취하여 고통을 겪으셨다" (One of the Trinity suffered in the flash, Theopaschite formula)를 제안하였을 때 다시 드러났다. 이 문구는 그리스도 단성설적인 경향을 갖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의 교황 사절들과 로마에 있는 호르미스다는 이 문구를 단죄하지는 않았지만, 황제에게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교황 레오 1세의 <플라비아노에게 보낸 교의 서한>(Epistola dogmatica ad Flavianum)과 칼체 돈 공의회의 결정을 통해 이미 신앙이 정리되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온건한 입장에서 그리스도 단성설을 지지하는 이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결국 이 정식을 533년에 승인하였다. 그러나 교황은 이 수도승들의 거듭된 주장과 인정 요구에 심적인 고통을 받았지만, 불필요한 주장이라고 강력하게 반박하였다. 스키티아의 수도승 사건으로 인해, 호르미스다는 리에즈의 파우스토(Faustus of Riez, 405/410?~490/495?)가 주장 한 정통 교리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질문을 한 이들은 파우스토를 펠라지우스주의자로 여기고 있었는데, 실제 로 그의 부모 중 한 사람은 펠라지우스주의자였다. 교황 은 이 질문에 대해 교회의 가르침은 교황 철레스티노 1 세(422~432)와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Hipponensis, 354~430)에 의해 확정된 것이 정통이고, 파우스토의 글을 읽을 때 그 안에 포함된 교훈 중 의심쩍은 내용은 결코 따 르지 않겠다는 조건하에서 읽어야 한다고 답변하였다. 그 외의 활동 : 호르미스다는 동방 교회의 여러 주교 회의에서 결정한 법규들의 라틴어 번역을 수도자인 디오니시오 엑시구우스(Dionysius Exiguus, 470?~550?)에게 위 임하였다. 또한 갈리아의 지도급 주교들인 아를의 체사리오(Caesarius Arelatensis, 469/470~542), 비엔(Vienne)의 아비토(Avitus, 450~518)와 활발하게 서신을 교환하였으며, 스페인의 교황 대리를 지명하였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 아프리카에서 반달족 왕이 사망(523. 5. 28) 하여 교회에 대한 박해가 끝났으며, 교계 제도가 부활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접하였다. 교황의 동로마 제국 황제와의 밀접한 관계 유지는 동 고트족의 통치를 반대하는 원로원의 일부 의원들을 자극하였다. 또한 테오도리쿠스는 동고트족이 아리우스주의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교황과 동로마 제국이 그를 반대하여 음모를 꾸밀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되어 교황의 적대자로 돌변하였다. 이는 호르미스다 교황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후임 교황 요한 1세 (523~526)가 곤욕을 치루어야 하였다. 교황 호르미스다는 세상을 떠난 후 베드로 대성전에 안장되었으며, 추모 비문은 그의 아들인 실베리오에 의해 작성되었다. (→ 그리스도 단성설 ; 디오니시오 엑시구우스 ; 칼체돈 공의회) ※ 참고문헌 J.N.D. Kelly, Oxford Dictionary of Popes, Oxford Univ. Press, 1996, pp. 52~541 É. Amann, 《DTC》 7, pp. 161~176/ R. Haacke, 《LThK》 5, pp. 483~484/ J. Chapin, 《NCE》 7, 2003, pp. 110~112/ H. Jedin, History ofthe Church, vol. 2, New York, 1986, pp. 435~437. 622~625. [邊琪燦]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