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건항 (1913~1949?)

洪健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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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교구 소속 신부. 세례명은 갈리스도. 1913년 9월 15일 평안북도 의주군 비현면에서 아버지 홍종락 (洪宗洛, 베네딕도)과 어머니 김씨의 6남 6녀 중 차남으로 출생. 1929년 4월 서울 남대문상업학교 을조(乙 組)에 입학하여 1934 년 3월 졸업한 후, 용산 예수성심학교에 입학하였다. 반 년 동안 철학과를 다니다가 그해 9월 덕원 신학교에 입학하여 철학과와 신학과를 이수하고, 1940 년 3월 28일 오세아(W. O'Shea, 吳) 주교의 집전으로 평양 관후리 본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신리(이후 대신리로 개칭) 본당 보좌 신부로 사목 활동을 시작한 홍건항 신부는 같은 해 11월 관후리 본당 보좌 신부로 전임되었다. 그러나 1941년 12월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킴과 동시에 평양 대목구에서 사목하던 메리 놀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을 모두 연금하였고, 이에 관후 리 본당의 주임이던 코너스(J. Connors, 權) 신부도 관할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주임 신부가 부재중인 상황에서 홍건항 신부는 본당 운영에 차질이 빚어지지 않도록 최 선을 다하였고, 1943년 3월 홍용호(洪龍浩, 프란치스코) 신부가 평양 대목구장이 되고 관후리 본당이 주교좌 본당이 될 때 관후리 본당의 주임 신부로 임명되었다. 이 듬해 1월 관후리 본당의 대지 및 부속 건물 일체를 징발 하겠다는 일제의 통보를 받고, 2월 27일 성당에서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고 계리(鷄里) 산정현(山亭峴) 장로교 회로 본당을 이전하여 사목 활동을 이어나갔다. 1944년 5월 홍건항 신부는 신의주 본당 8대 주임으로 부임하였으나, 성당이 신의주 경찰서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의 심한 감시하에서 사목 활동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해방 후 일본군이 물러가자 이번에는 공산주의자들이 북쪽 지역을 점령하여 종교 활동에 제약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홍 신부에게 공산당에 가입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이를 거부하자 1946년 초 홍 신부를 납치 · 감금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홍 신부와 신의주 본당 신자들은 평양 관후리 주교좌 성당 건축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공산 정권의 탄압 속에서도 활발한 신앙 활동을 전개하였다. 홍용호 주교가 1949년 5월 공산당에게 납치되고 난 이후, 평양 대목구는 공산주의자들에게 더욱더 노골적으로 박해를 받게 되었다. 특히 신의주 본당은 정치보위부가 앞장서서 본당 신부와 신자들 간의 접촉을 방해하여, 주일 미사만 겨우 봉헌할 수 있는 형편이었다. 또한 정치 보위부원들이 조를 이루어 24시간 내내 홍 신부를 감시하였기 때문에 정상적인 사목 활동이 불가능하였다. 결 국 공산 정권은 성당과 사제관 등 부속 건물을 모두 몰수하였고, 홍 신부는 이석태(李錫泰, 베드로) 회장 집으로 거처를 옮겨 생활하다가 12월 10일 밤 정치보위부원들에 의해 연행된 후 행방 불명되었다. 다음날 영유 본당에서 공산당에게 체포된 홍도근(洪道根, 세례자 요한) 신부가 그의 조카이다. (→ 관후리 본당 ; 신의주 본당 ; 평 양교구) ※ 참고문헌  평양교구사편찬위원회, 《천주교 평양교구사》, 분 도출판사, 1981/ 평양교구 순교자 사료 수집위원회, 《북녘 땅의 순 교자들》, 가톨릭출판사, 1999. 〔洪延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