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낙민 (1751~1801)
洪樂敏
글자 크기
12권

이승훈, 최창현, 정약종, 홍교만 등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 가는 홍낙민.
신유박해(辛酉迫害) 때의 순교자. 세례명은 루가(혹은 바오로). 본은 풍산(豊山)이고 당색은 남인. 자는 성눌 (聖訥). 정언 양한(亮漢)의 아들이요 유한(儒漢)의 조카 로,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의 제자이다. 1840년의 순교자 홍재영(洪梓榮, 프로타시오)의 부친이며 홍병주 (洪秉周, 베드로) · 영주(榮周, 바오로) 성인과 1866년의 순교자 홍봉주(洪鳳周, 토마스)의 조부. 충청도 예산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충주로 이주해 살다가 1780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788년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 이조 정랑을 지냈다.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 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이승훈(李承薰,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고, 사돈 정약전(丁若銓) 형제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1786년 이래 가성직 제도하의 신부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가 일어난 뒤 정조의 명에 따라 신앙을 멀리하였지만, 집안에서는 기도 생활을 계속하였고 교리에 따라 재(齋)를 지키기도하였다. 1794년 말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가 입국하자 성사받을 준비를 하였으나, 이듬해 을묘박해(乙卯迫害)로 체포되어 천주교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후 그는 천주교를 멀리하는 것처럼 행세하면서 다시 교리를 실천하기 시작하여, 1799년 모친상을 당하고도 신주(神 主)를 들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마자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의금부로 끌려가 문 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처음에 그는 나약한 모습을 보였으나 동료를 밀고하지는 않았으며, 유배형을 선고받았 다. 그러나 문초가 계속되는 동안 용덕을 드러내며 굳게 신앙을 증거하여 결국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 신유박해 ; 홍재영) ※ 참고문헌 St. A. Daveluy, vol. 5,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1858년 필사 정리), M.E.P. 소장/ 《추국일기》/ 黃嗣永, <백서>/ 《일성록》/ 《순조실록》/ 이기경 편, 《벽위편》/ 샤를르 달레, 안 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 천주교회사》 상,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특별위원회, 《하느님의 종 윤 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2003. 〔車基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