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낙안 (1752~1812)

洪樂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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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기호 남인 출신의 문신이며 공서계(攻西系) 의 대표적인 인물. 본관은 풍산(豊山)으로 복호(復浩)의 아들이며, 자는 인백(仁伯). 호는 노암(魯庵). 후에 이름 을 희운(羲運)으로 바꾸었다. 1783(정조 7)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790년에 증광시에서 병과로 급제한 뒤 관계에 진출하였다. 1787년(정조 11) 겨울 이기경(李基慶, 1756~1819)은 성균관 앞 반촌(泮村)에 있는 김석태(金石太)의 집에서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정약용(丁若鏞, 요한), 강이원 (姜履元) 등이 모여 천주교 서적을 강습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것이 바로 정미반회 사건(丁未泮會事件)으로, 이후 강이원이 이에 대하여 소문을 냈다. 그 전모를 알게 된 홍낙안은 이기경에게 척사(斥邪)의 통문을 돌리고 상 소를 올리자는 편지를 보냈다. 당시 그는 '먼저 그 도를 공격하고 사람들을 돌이켜서 구원하되 그 사람들이 미혹해서 돌아올 줄 모른다면 그 사람까지 함께 공격해야 한 다' (优先攻其道救反其人而其人迷不知返與共其人而攻之) 는 강경론을 펼쳤는데, 척사에 대한 그의 이러한 태도는 이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이승훈 정약용과 친분이 있던 이기경의 반대로 그 사건이 공론화되지는 못하 였다. 이듬해 홍낙안은 매해 정월에 특별히 치르던 과거 시험 '인일제' (人日製)에서 답안으로 을사 추조 적발 사건(乙巳秋曹捕發事件)과 천주교 서적 전래를 언급하는 척사의 책문(策文)을 올려 3위로 합격하였다. 그는 이를 통해 은근히 이승훈과 정약용을 배척하고, 나아가 충청도 서부 일대에 천주교가 만연하고 있음을 알리며 척사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이 책문은 조정에서 척사의 여론을 일으켰으며, 아울러 기호 남인 내 공서파 인물들이 전격 등장하여 친서파(親西派) 인물들과 대립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어 홍낙안은 1790년에 있었던 증광문과에서 사학 (邪學)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답안을 작성하여 병과로 급제, 가주서(假注書)가 되었다. 이듬해인 1791년, 전라도 진산군(현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에서 윤지충(尹持忠, 바 오로)이 어머니 권씨(權氏)가 사망하자 천주교 교리에 따라 제사를 폐하고, 그의 외종형 권상연(權尙然, 야고 보)과 함께 신주를 불태운 진산 사건(珍山事件)이 발생 하였다. 홍낙안은 이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자 먼저 진산 군수 신사원(申史源)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들을 신속하고 엄정하게 처벌하지 않은 것을 힐책한 뒤, 이어 좌의정 채제공(蔡濟恭, 1720~1799)에게 편지[長書]를 보내어 조정에서 진산 사건을 다룰 것을 요구하고, 바로 다음날 유생들에게 진산 사건의 전말과 천주교 서적의 유행에 대 하여 적은 통문을 돌렸다. 이에 조정에는 진상 조사를 요 구하는 유생들과 상하백관(上下百官)의 상소가 빗발쳤 으나, 정조와 채제공은 이 사건이 친서파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져 정약용 · 이승훈 · 이가환(李家煥) 등의 남인 들이 연루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윤지충과 권상연을 처 벌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지으려 하였다. 그러기 위 하여 채제공은 '형상을 포착할 단서가 없는데도 모함할 마음으로 서학을 하였다고 몰아붙이면 사실을 밝혀내기 어렵다' 고 주장하였고, 정조 역시 이 의견에 동의하며 사건을 확대시키지 않을 의도를 분명히 하였다 이 무렵 홍낙안은 물의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가주서에서 물러난 상태였으나, 당시 여론에 따라 그는 자신이 무 고(誣告)한 것이 아니라는 구체적인 증거로 권일신(權日 身, 프란치스코 사베리오)과 이승훈이 천주교 두목이라고 고발하였다. 이에 따라 체포되어 문초를 당한 이승훈은 삭탈 관직 후 석방되었으며, 권일신은 제주도로 정배 (定配)되었다가 옥중에서 회오문(悔悟文)을 짓고 감형 받아 예산으로 귀양가던 중 고문의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아울러 다수의 신자들에게도 그 여파가 미쳐 서울의 최필공(崔必恭, 토마스), 최필제(崔必悌, 베드로) 를 비롯하여 경기도 광주의 최창주(崔昌周, 마르철리노), 충청도 당진의 배(裵) 프란치스코, 예산의 이존창 (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 등이 체포되었다가 배교 후 풀려났고, 면천의 김진후(金震厚, 비오), 박취득(朴取得, 라우렌시오) 등이 붙잡혀 문초를 받은 뒤 풀려났다. 이것이 조선의 첫 번째 천주교 박해인 신해박해(辛亥迫害) 이다. 이후 홍낙안은 교리(校理), 수찬(修撰), 부사과(副司 果), 은율 현감(殷栗縣監) 영춘 현감(永春縣監)의 관직을 역임하며 이기경 · 홍의호(洪義浩) 등과 함께 공서파의 핵심 세력으로, 친서파와 계속 대립하였다. 그리고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가 발발하자 장령 (掌令), 부교리(副校理), 부응교(副應敎) 및 집의(執義) 등의 관직을 거치며 자세한 조사를 위하여 어사(御史)를 파견하고 천주교 신자들을 엄정히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고, 아울러 친서파에 대한 재조사와 채제공의 관작(官 爵) 추탈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동부승지(同副承旨)의 직책으로 천주교 신자들의 추 국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때 홍낙민(洪樂敏, 루가 혹은 바오로) · 홍낙임(洪樂任) 등이 천주교 신자로 체포되자 풍산 홍씨 일가는 항렬자를 '낙' (樂)에서 '희' (羲)로 바꾸었고, 이에 따라 홍낙안 역시 홍희운으로 개명하였다. 홍낙안은 대사간(大司諫), 승지(承旨), 부호 군(副護軍), 병조참의(兵曹參議) 등의 관직을 역임하고 1812년 사망하였다. 달레(C.C. Dallet, 1829~1878)의 《한국 천주교회사》에서는 홍낙안이 신유박해 이후 제주도로 귀양가서 20년 후에 그곳에서 죽었다고 전하고 있으나,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 저서로는 《장간가》(長干歌)가 있다. ※ 참고문헌  李基慶 편, 《闢衛編》 이만채 편, 《闢衛編》 丁若鏞, 《自撰墓誌銘》 《正祖 · 純祖實錄》 《日 省錄》 《承政院 日 記》 《豊 山洪氏族譜》 샤를르 달레,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 천주교회 사》 상 ·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 1980/ 김진소, 《천주교 전 주교구사》 I, 천주교 전주교구, 1998/ 車基眞, 《조선 후기의 西學과 斥邪論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金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