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용 (1731~1783)

洪大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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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용은 천주당에 있는 서양 천문 기기들을 직접 보기 위해 동당(왼쪽)과 남당을 다섯 차례나 방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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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용은 천주당에 있는 서양 천문 기기들을 직접 보기 위해 동당(왼쪽)과 남당을 다섯 차례나 방문하였다.


실학자. 자연 과학자.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덕보 (德保). 호는 담헌(湛軒). [생 애] 충북 천원군 수신면 장산리에서 홍력(洪櫟)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조부 홍용조(洪龍祚)는 대사간(大司 諫)이었다. 12세 때부터 미호 김원행(渼湖 金元行, 1702~1772)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였는데, 20 세 때 윤증(尹拯, 1629~1714)의 문집을 읽고 노 · 소론 분당에 관해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을 비판하였다. 이에 스승 김원행이 세의를 무시한 언행이라며 호되게 꾸중하자, 진땀을 흘리며 "큰 의문이 없으면 큰 깨달음이 없다" 라고 답하였다. 이처럼 그의 학문은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유학의 전통적 사고 · 관습에 대한 반동, 성리학에 대한 회의와 의문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성리학에 대한 의문은 <심성문의>(心性問疑), <소학문의>(小學問 疑), <가례문의>(家禮問疑), <대학문의>(大學問疑), <논 어문의>(論語問疑) . <맹자문의>(孟子問疑), <중용문의> (中庸問疑), <시전변의>(詩傳疑), , <서전문의>(書傳問 疑) 등으로 나타났고, 또 하나의 의문과 관심은 자연 과학 · 수학 · 천문학 · 양명학 등으로 표현되었다. 1759년에는 나주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호남에 내려가 무등산과 물염정(勿染亭)을 구경하고, 그곳 야사리 (野沙里)에서 천문기기(天文器機) 제작에 관하여 연구하고 있던 석당 나경적(石塘 羅景績)과 제자 안처인(安 處仁)을 만났다. 그들을 나주로 초청하여 수만금을 들여 자명종(自鳴鐘)과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하고, 1762년 에는 천원군 장명부락에 사설 천문대인 농수각(籠水閣) 을 짓고 천문기기들을 설치하였다. 홍대용이 이처럼 자연 과학, 특히 천문학에 열정을 기울일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이해와 도움 덕이었다. 1765년 11월 숙부 홍억(洪憶)이 연행 사신의 서장관으로 가게 되자 홍대용은 그 자제 군관 신분으로 연경 (燕京, 현 북경)에 가게 되었다. 견문을 넓히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서양 선교사들이 와 있는 천주당에 찾아 가 거기 설치된 여러 가지 서양의 천문기기들을 몸소 관 찰하고자 하는 바람이 컸다. 당시 북경에 있던 네 개의 천주당인 남당 · 동당 · 서당 · 북당은 조선 사신들이 반 드시 찾아가 보는 관광의 명소였다. 그는 1월 9일, 13 일, 19일, 2월 2일에는 남당을 방문하고, 1월 24일에는 동당을 방문하는 등 다섯 차례에 걸쳐 천주당을 방문하 였다. 1월 9일 제일 먼저 궁실과 기용(器用)이 으뜸인 남당을 찾아가 벽화의 사실성에 놀랐으며, 독일인 흠천 감(欽天監) 감정(監正) 할러슈타인(A. von Hallerstein, 劉 松齡)과 부감(副監) 고가이슬(A. Gogeisl, 鮑友官) 신부 를 만나 책력 만드는 법과 성신도수(星辰度數)에 관해 배우기를 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할러슈타인의 안내 를 받아 남당을 구경하던 중 풍금(파이프 오르간)을 보고 가야금 한 곡조를 연주하였으며, 자명종 · 혼천의 · 망원 경(望遠鏡) · 요종(鬧鍾) 등을 구경하였다. 또한 시원경 (視遠鏡)으로 태양을 관찰하고 흑점에 관해 큰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선교사들에게 천주교에 관해 질문을 던졌다. 할러슈타인은 "우리 나라의 학문은 사람 들에게 사랑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높이되 만 유 위에 숭배하고, 남을 사랑하되 내 몸처럼 하라고 가르 칩니다" 라고 하였다. 홍대용이 "사랑이란 무엇을 말합니 까? 특히 그러할 사람이 있습니까?" 하고 묻자, 그는 "공자가 '교사(郊)의 예는 상제(上帝)를 섬긴다' 고 한 바와 같이 상제를 섬기는 것이나, 도교에서 말하는 옥황 상제는 아닙니다. 시경(詩經)의 주에서도 '상제는 하늘의 주재(主宰)'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하였다. 한문으로 기록된 <유포문답>(劉鮑問答)에서는 그들의 대화가 여기서 그치고 있다. 그러나 홍대용이 한글로 쓴 《을병연행록》에는 황제와 후비(后妃)가 미사 봉헌을 부 탁한 기록을 내 보이며 자랑하는 것을 보고 '할러슈타인이 비록 나이가 많고 천문 역상(曆象)에 소견이 높으나 이런 무리하고 아당(阿黨)하는 일을 스스로 낮추어 외국 사람에게 자랑하고자 하니, 극히 비루하고 용속(庸俗)하 여 원방 이적(夷狄)의 풍습을 벗지 못한 일' 이라고 비평하였다. 뿐만 아니라 《건정동필담》(乾淨(筆譚)에서는 서양 선교사들이 "하늘 및 역법을 논함에 있어서는 그 법도가 매우 높아 전에 아직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하고 있으나, 그 천주학은 우리 유학의 상제(上帝) 이름을 훔쳐다가 불가(佛家)의 윤회설로 장식하여 천하고 비루 함이 가소롭다"라고 하며 천주교를 배척하였다. 즉 서양 기술에 관해서는 "당송 이전에는 있지 않은 것이었다" 라고 극찬하면서도 천주교에 대해서는 '이적' , 혹은 '가소 로운 것' 으로 배척하였다. 홍대용이 북경에서 가장 보고 싶어한 것은 천문기기가 가득한 관상대였으나, 일반인의 관람이 허용되지 않아 망설이다가 3월 1일 돌아오는 날 아침 일찍 관상대를 찾아가 문지기에게 선물을 주고 관 원 몰래 구경을 하고 돌아왔다. 천주당 구경 후 그는 북경의 골동품 상가인 유리창을 찾아가 과거를 보기 위해 항주(杭州)에서 와 머물고 있 던 선비 엄성(嚴誠), 반정균(潘庭筠) 육비(陸飛) 등을 만나 학문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토론하고, 마침내 천애지기(天涯知己)의 우정을 나누었다. 엄성은 홍대용 에게 <농수각팔영시>(籠水閣八詩)를, 육비는 <농수각 기>를 지어 선물하였으며, 이때 필담으로 나눈 기사가 《항전척독》(杭傳尺讀)과 《건정동필담》에 나타나 있다. 이 북경 여행은 홍대용의 사상에 큰 변화를 주었다. 북경에서 돌아온 뒤에도 홍대용은 중국의 세 선비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학문 세계를 넓혀갔다. 김종후(金鍾 厚) 등은 이러한 교유를 비난하였으나, 그는 이들과의 교 류를 통해 범동아적 문화를 포섭하는 인물로 우뚝 서게 되었다. 그는 서울에 머물며 박지원(朴趾源, 1737~ 1805), 이덕무(李德懋, 1741~1793), 박제가(朴齊家, 1750~?) 등 사가(四家)와 사귀며 화가 정철조(鄭詰祚)와 도 교유하였다. 1767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고향에 내려가서 3년상을 마친 뒤 다시 서울로 올라가 박지원 등과 교유하며 북학파(北學派) 형성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1773년 자연 과학적 철학 소설 《의산문답》(醫山問答) 과 수학의 명저 《주해수용》(籌解需用)을 저술하였고, 1774년 음사로 익위사(翊衛司) 시직(侍直)이 되어 동궁 (후의 정조)을 모시다가 정조 즉위 후 태인 현감으로 부임하였고, 1780년 영천 군수(榮川郡守)로 승진하였다. 1783년 어머니의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5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 상] 홍대용은 기호학파의 학통을 이어 주기론(主 氣論)의 입장에 서서 기(氣)를 우주의 운동으로 파악하 고, 성리학보다는 자연 과학, 수학, 천문학, 양명학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였다. 당시는 사농공상의 계급 사상이 엄격하여 공장(工匠)을 천시하였으나, 그는 나석당 제문에서 자명종을 만든 것이 "어찌 말기(末技)일까 보냐?" 라고 하며 기계 제작 기술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의 이러 한 태도와 사상은 한국의 이용후생학적 실학 사상의 한 단면을 표현한 것이다. 박지원의 <홍덕보 묘지명>(洪德保墓誌銘)에 의해 홍대용이 한때 한국 최초의 지전설(地轉說) 주창자로 알려 지기도 하였으나, 지전설은 그보다 한 세기 앞서 김석문 (金錫文, 1658~1735)에 의해 주장된 적이 있다. 홍대용 은 김석문의 체계에 부연하여 나아가 생명론, 인력설(引 力說), 우주무한론(宇宙無限論)을 주장하여, 한국에서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과학 사상에 빛나는 발자취를 남겼다 고 평가된다. 그는 실심실학(實心實學), 곧 참 마음, 참 학문을 추구 하였다(《계방일기》(桂坊日記). 이를 단적으로 표현해 주는 것이 허옹(虛翁)과 실옹(實翁)이라는 두 인물의 문답으로 구성되어 있는 《의산문답》이다. 이것은 실학(實學)으 로써 허학(虛學)을 물리치는 철학적 문답으로, 홍대용의 자연 과학적 사고를 집대성한 글이다. 그는 실옹을, "자 허자(子虛子)는 숨어 살면서 독서한 지 30년에 천지의 조화와 성명(性命)의 은미함을 궁구하고 오행(五行)의 근원과 삼교(三敎)의 진리를 통달하여 인도(人道)를 경 위로 하고 물리(物理)를 깨달았다. 심오한 원위(源委)를 환히 안 다음에 세상에 나가 남에게 이야기하였더니, 듣 는 자마다 웃었다" 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가 묘사한 허 옹의 모습은 당시 허학에 치우친 유학자(俗儒)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선 허옹을 '자허자' 라고 부른 것부터가 해학적이다. 여기서 '자' (子)는 '스승' 이 라는 뜻으로, '공자, 맹자' 와 같이 높은 스승을 지칭할 때 존경의 뜻으로 붙이는 글자이다. 특히 앞에 붙인 '자' (子)자는 주자가 <대학장구대전>(大學章句大全) 첫 머리 에서 정자(程子)를 '자정자' (子程子)라고 존칭하여 부른 것을 비의한 것으로, 허옹을 빈정거린 것이다. 그리고 끝 에 가서 그의 말을 "듣는 자마다 웃었다"라고 한 것은 유학자에 대한 비판적 · 풍자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실옹이 "실(實)자로써 호한 것은 장차 허(虛)를 타 파시키고자 함"이라고 토로한 것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다. 홍대용은 실옹의 입을 빌어 당시 유학의 병폐를 "공자가 죽은 후에 제자(諸子)들이 어지럽혔고, 주자 문하의 모든 유학자가 혼란시켰다. 그의 업적은 높이면서 그의 진리는 잊고 그의 말은 익히면서 그의 본의는 잃어버렸 다"라고 꼬집었다. 실옹은 허옹에게 당시 유학이 "물 흐 르듯이 날로 허망으로 치닫는다" 라고 말하고 "도를 들으 려거든 너의 옛날의 들음을 씻어 버리고 너의 이기려는 마음을 버려라. 마음을 비우고 입을 삼가라" 라고 경고한 다. 그리고 더 이상 유학에 관하여 논의하지 않고 화제를 자연 과학 · 천문학 쪽으로 돌린다. 이것은 홍대용의 학문적 관심이 성리학보다는 자연 과학 방면임을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허옹을 굴복시킨 실옹은 허옹에게 일식 · 월식 등을 설명하고, "땅덩이는 하루 한 바퀴를 도는데 땅 둘레는 9만 리이고 시간은 12시간이다" 라고 하며 지전설을 설명하고, "땅은 이미 빨리 돌매 하늘 기 (氣)와 격하게 부딪치며 허공에서 쌓이고 땅에서 모이게 되니, 이리하여 상하의 세력이 있게 되는데 이것이 지면 (地面)의 세력이다. 땅에서 멀다면 이런 세력이 없을 것이다. 또 자석은 무쇠를 당기고 호박(琥珀)은 지푸라기 를 끌어당기게 되니, 근본이 같은 것끼리 서로 작용함은 사물의 이치다" 라고 하며 지구의 인력(引力)과 장력(張 力), 자력(磁力)을 설명하고,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라고 지원설(地圓說)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모든 물(物)이 생겨날 때는 모두 기(氣)가 있다" 라고 하며 주기론적 입장을 확고히 하였다. 그러나 《의산문답》을 자연 과학적 측면에서보다는 양명학적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이도 없지 않다. 그는 《임하경륜》(林下經綸)에서는 도 · 군 · 현 · 면의 제도 개혁을 주장하며 면에 이르기까지 학교를 세워 교육하고 "사농공상에 관계없이 놀고먹는 자에 대해서는 관에서 벌칙을 마련하여 용납하지 아니하고, 재능과 학식이 있다면 비록 농부나 장사치의 자식이 의정부에 들 어가 앉더라도 참람스러울 것이 없고, 재능과 학식이 없다면 비록 공경(公卿)의 자식이 하인으로 돌아간다 할지 라도 한탄할 것이 없다"라고 주장하며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생산성 향상을 도모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그는 일찍이 반상의 계급주의를 버리고 인재의 적재적소주의, 능력주의를 주장하였다. 이 외에도 홍대용의 《주해수용》은 가감승제는 물론 미적분(微積分)에 이르기까지 포괄한 한국 수학의 고전으로 평가된다. (⇦ 《담헌서》) ※ 참고문헌  洪大容, 《湛軒書》 상 · 하, 영인본, 경인문화사/ -, 《을병연행록》, 영인본, 명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1983/ 朴趾 源, 《燕巖集》, 영인본, 경인문화사, 1974/ 李淞, 《老樵集》 鄭寅普, 《園國學散藁》, 新朝鮮社, 1955/ 全相運, 〈湛軒 洪大容의 科學思 想〉, 《實學論叢》, 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소, 1975/ 金泰俊, 供 大容과 그 時代》, 일지사, 1982/ 劉明鍾, 《韓國의 陽明學》, 동화출판 사, 1983/ 金泰俊, 《洪大容評傳》, 대우학술총서, 1987/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문화의식》,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1. 〔河聲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