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봉주 (1814~1866)
洪鳳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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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

홍봉주의 친필 서한.
순교자. 세례명은 토마스. 본은 풍산(豊山). 1801년 에 순교한 홍낙민(洪樂敏, 루가 혹은 바오로)의 손자이며 1840년에 순교한 홍재영(洪梓榮, 프로타시오)의 아들. 모친은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의 형인 정약현(T 若鉉)의 딸이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아버지 홍재영이 전라도 광주로 유배된 뒤 그곳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교리를 배웠으며, 심바르바라와 혼 인을 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일어나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부친과 부인은 순교하였지만 홍봉주 는 석방되었으며, 이후 충청도 예산으로 이주하였다. 1855년 초 그는 메스트르(J.A. Maistre, 李) 신부의 명에 따라 베르뇌(S.F. Berneux, 張敬一) 주교를 입국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그래서 1855년 3월 서울을 떠난 홍봉주는 4월에 중국 상해(上海)에 도착하였고, 이듬해 1월 베르뇌 주교, 푸르티에(J.A.C. Pourthié, 申妖案) 신부, 프티니콜라(M.A. Petitnicolas, 朴德老) 신부와 함께 상해를 출 발하여 3월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베르뇌 주교를 전동에 있는 이군심(李君心)의 집으로 인도한 뒤 예산 본가로 내려갔다. 그러다가 1861년 처자가 죽자 3월(음)에 상경하여 주교와 함께 살며 주교의 일을 도왔고, 5월(음) 에는 주교의 거처를 전동에서 태평동으로 이전하였다. 한편 1864년부터 러시아가 두만강 근처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자, 조선 정부에서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이에 홍봉주는 방아책(防俄策 : 러시아를 방비하기 위한 방책)을 제시하여 신앙의 자유를 얻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1865년 8월(음) 남종삼(南鍾三, 요한)을 방문하여 의논하였다. 그러나 남종삼의 소극적인 태도로 그만 두었다가, 1865년 9월(음) 또다시 러시아인들이 통상 요구를 해오자, 1865년 12월 하순에서 1866년 1월 초순 사이에 다시 김계호(金冕浩, 토마스), 이유일(李惟一, 안토니오) 등과 함께 흥선 대원군에게 방아책을 건의하였다. 즉 러시아의 위협에 대항하는 유일한 방법은 영국 · 프랑스와 동맹을 맺는 일이며, 이를 위해 조선에 와 있는 서양의 천주교 신부들과 주교들을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반응은 미온적이었고, 이에 남종 삼을 통해 다시 한 번 방아책을 올린 결과 대원군은 주교들과 면담하기로 약속하였다. 하지만 대원군은 약속과는 달리 주교들과의 면담을 미루다가 박해를 일으켰고, 이에 홍봉주는 1866년 2월 23일(음력 1월 9일) 베르뇌 주교와 함께 체포되었다가, 3월 7일(음력 1월 21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 홍재영) ※ 참고문헌 《치명일기》(10번)/ 《포도청등록》/ 《추안급국안》/ 《박순집 증언록》 1/ 《가톨릭 사전》 샤를르 달레,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 천주교회사》 중 ·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유홍 렬, 《증보 한국천주교회사》 하, 가톨릭출판사, 1994(6판). [方相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