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용호 (1906~?)

洪龍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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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 제6대 평양교구장.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보르자. 호는 석초(夕草). 1906년 8월 24일 평남 평원군 한천면 감육리 살구재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1919년 한천 공립 보통학교 5 학년 재학 중 어머니마저 사망하자, 감칠리에 살던 누나 홍 마리아와 매부 최남현(다니엘)의 집으로 옮겨가 보통 학교를 마쳤다. 이후 사제의 길을 택한 홍용호는 1920년 9월 서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방학 때에는 평남의 마산 성당에 기거하며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1932년 5월 서울 종현(현 명동) 성당에서 부제품을 받고, 이듬해 5월 25일 평양 관후리 성당에서 라리보(A.J Larribeau, 元亨根) 주교의 주례로 사제 서품을 받은 후 관후리 본당 보좌로 부임하였다. 이어 1934년 1월에 가 톨릭 연구사(研究社) 사장을 겸하며 《가톨릭 연구 강좌》 (7월에 《가톨릭 연구》로 개칭)를 간행하였고, 8월 15일에 개최된 평양대목구 평신도 대회에서는 '평양 대목구가 톨릭 운동 연맹' 의 중앙부의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936년 3월부터는 대목구장 비서로 재직하였으며 , 7~12월까지는 영유 본당 10대 주임을 역임하였다. 1937년 1월 가톨릭 연구사가 가톨릭 교화 협회로 변 경되고 《가톨릭 연구》도 《가톨릭 조선》으로 제호를 바꾸며 전국 가톨릭 기관지로 발전하자, 홍 신부는 평양 대목 구 출판사를 전담하여 주필 겸 사장으로서 잡지 기사의 3분의 1 이상을 직접 집필하였다. 아울러 그는 식민 통치하의 한국 천주교회의 중요한 사명 중 하나가 문맹 퇴치와 민족 자각이라 여기고, 평양 대목구 가톨릭 운동 연맹의 첫 번째 사업으로 문맹 퇴치 운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압박으로 인하여 1938년 12월 《가톨릭 조선》이 폐간되면서 홍 신부는 1939년 1월 순천 본당 4대 주임으로 전임되었다. 일제는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적성국민(敵性國民)이라는 이유로 평양 대목구를 담당하던 미국인 출신의 메리놀회 신부 · 수녀들을 감금하였는데, 홍용호 신부 역시 이들과 가깝게 지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3개월 동안 감금 생활을 하였다. 이 기간 동안 평양 대목구의 사목 활동은 일시 마비되었고, 결국 1942년 1 월 서울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신부가 평양 대목구장을 겸하게 되었다. 노 신부는 같은 해 2월 평양을 방문하였고, 이때 홍용호 신부를 평양 대 목구장 서리 직무 대리로 임명하였다. 이에 홍 신부는 강 창희(康昌熙, 야고보)를 통해, 1942년 2월 순천 본당에 연금 중이던 오세아(W. O'Shea, 吳) 주교로부터 대목구 사무를 인수받았다. 이처럼 비상 사태에 대목구 운영을 맡은 홍 신부는 노기남 대목구장의 협조로 파견된 서울 대목구 소속 신부들과 더불어 본당 사목을 정상화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한편 교황청에서는 홍용호 신부가 평양 대목구를 담당 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1943년 3월 9일 그를 평양 대목 구장으로 임명하였다. 3월 21일 관후리 본당에서 착좌식을 거행한 홍 대목구장은 사제의 부족과 재정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신부가 없는 본당을 순회하며 성사를 집전하였고, 강론을 통하여 교세 확장과 신자들의 적극적인 활동 및 신부 양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1944년 2월 일제에 의해 대목구청과 관후리 성당 및 부속 건물 일체가 강제 징발되면서 주교좌 본당은 평양 시내 계리(鷄里)의 산정현(山亭峴) 교회로, 주교관과 대목구 본부는 경창리 2-12번지로 이전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홍용호 대목구장은 1944년 4월 17일 주교로 임명되었고, 6월 29일 산정현 교회에서 사 우어(B. Sauer, 辛上院) 주교의 주례로 주교 서품식을 받았다. 홍 주교는 이후 산정현 교회를 반납하고 상수구리(上 水口里) 257번지의 한옥을 수리하여 주교좌 성당으로 사용하다가, 1945년 5월 해방을 맞이하자 가장 먼저 관후리 성당을 찾는 일에 착수하였다. 당시 관후리 성당을 관리하던 공산주의자들은 쉽사리 성당을 내어 주려 하지 않았으나, 끈질긴 교섭을 벌인 결과 1946년 3월 성당 터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어 홍 주교는 주교좌 성당 신축 공사를 위해 '평양 대목구 사업 기성회' 를 조직한 후 기금 마련을 시작하였고, 1946년 8월에 기공식을 가졌다. 그해 11월에는 주교관을 기림리 92번지로 이전하였으며, 1947년 12월에는 공사가 채 끝나지 않은 관후리 성당 1층으로 주교좌 본당을 옮겨왔다. 그러나 이듬해 12월 공사 마무리 시점에서 북한 정권은 성당을 자신들에게 양도하라는 통보를 해 왔다. 홍 주교가 이를 거부하고 공사를 지속하자, 북한 정권은 이 문제를 빌미로 하여 1949년부터 노골적으로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공산 정권은 1949년 1월에 덕원 베네딕도 수도회의 엠머링(P. Emmerling, 嚴) 신부와 배(裵) 그레고리오 수사를 강제 연행한 것을 시작으로, 5월에는 사우어 주교 를 비롯한 모든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체포하고 교회 재산을 몰수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홍 주교는 공산 당국에 항의문을 발송하였고 이를 받아 본 북한 내무상 박일우 (朴一禹)는 홍 주교에게 면담을 요청하였다. 5월 14일 면담 통지를 기다리다가 아무런 연락이 없자 오후에 서포의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의 첫 종신자 서원 면담 후 귀가하던 중 납치되었다. 이후 교화소의 한 직원을 통하여 홍 주교가 평양 인민 교화소 특별 정치범 감옥에 수감된 것이 확인되었으나, 1950년 1월부터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는다. (→ 관후리 본당 ; 평양교구)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평양교구 편찬위원회 편, 《천주교 평양교구사》, 분도출판사, 1981/ 평양교구 순교자 사료 수집위원 회편, 《북널 땅의 순교자들》, 가톨릭출판사, 1999. 〔洪延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