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난
[라]paupertas · [영〕pover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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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그리스도인이 선택하고 중시해야 하는 삶의 자 세와 생활 양식 가운데 하나이다. 이 가난에서 첫번째 의 미로 볼 수 있는 것이 인간에게 비참한 삶의 조건을 강요 하는 물질적 빈곤이다. 물질적 빈곤이란 먹을 식량, 입을 옷과 주거 조건의 미비와 같이 인간 생활의 기본적인 욕 구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물질 또는 조건이 부족하고 결 핍된 상태를 가리킨다. 그것도 상대적인 결핍이 아니라 절대적인 결핍이다. 현재에도 이 가난은 인류의 3분의 1 이 직면하고 있는, 쉽사리 해결될 전망이 보이지 않는 난 제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류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 든 풍요의 시대에 가장 극심한 빈곤이라는 역설을 경험 하고 있다. 두번째 의미의 가난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해 당되는 가난으로서 하느님의 뜻에 기꺼이 자신을 내어 놓으려는 마음가짐, 삶의 태도를 뜻하는 복음적 가난이 다. 그러나 마음 또는 태도만이 아니라 물질적 빈곤을 전 제로 하는 가난한 마음이다. 이것을 달리 영적 가난이라 고 부르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가난한 이들의 처지가 되 어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가난한 이들처럼 살아가는 삶 을 선택하는 해방신학자들의 가난이 있다. 첫번째 의미 의 가난은 인류의 보편적 현실이고, 두번째 의미의 가난 은 수도원 전통에서 실천해 온 것이며, 마지막 의미의 가 난은 제3세계 특히 남미의 해방 운동에서 두드러진 그리 스도인 들의 삶의 모습이다. 이러한 복음적 가난은 특정 계층 또는 신분의 사람들만이 실천해야 하는 특별한 가 치라기보다는 신자들이 일상 생활에서 실천해야 하는 가 치이자 태도이다. 그리고 이 가난은 무엇보다 청빈한 생 활 이른바 검소한 생활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검소한 생 활의 기준이 무엇인지 말하기 어렵고, 윤리신학에서도 뚜렷한 기준을 설정하지 않고 있어서 어느 정도의 소유 와 주거 조건, 옷차림이 가난의 조건인지 말할 수는 없 다. 그러나 이 사회에서 권위를 이루는 세 가지 조건인 권력(정치적 권리), 재화(경제적 권리)와 위신(문화적, 사회 적 지위와 권리)의 정도를 분석하여 어느 정도가 복음 정 신과 윤리신학의 기준에서 적정한 수준인지는 식별할 수 있다. 평신도들에게 가난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래도 물질적 소유가 신앙의 본질적인 가치와 전도되는 것을 피하고 가난의 복음적 의미대로 살아가도록 권고하기 위 한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소개하는 네 분야의 가난은 평 신도들을 포함한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가난의 기준을 제 공할 것이다.
: I . 수도 생활의 가난
수도자들이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그분과 일체가 되 는, 완덕에 이르고 또 그분의 은총 안에서 생활하기 위하 여 자신의 소유를 기꺼이 포기하고 검소하게 사는 생활 이 수도 생활에서의 가난이다. 복음 삼덕 가운데 하나에 속한다. 수도 생활에서 가난은 수도자들이 실제로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물질적인 가난, 하느님께 순종하고 그분께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는 헌신으로서의 가난 그리 고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여 그들의 처지대로 살려고 하 는 의지로서의 가난으로 나뉜다. 이 모두는 물질적인 가 난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 물질적 가난은 수도원 안에서 개인의 소유 포기와 공동 소유로 표현된다. 가난 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청빈한 모습만이 아니라, 소유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버리려는 마음의 의향과 하느님께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는 영적인 태도까지도 포함된다. [완덕에 이르는 수단] 수도 생활의 목표는 성화(sanctitas)에 있다. 이른바 완덕에 도달하는 것을 이상으로 한 다. 가난은 바로 이 완덕에 이르는 여러 방편 가운데 하 나이며 수도 생활에서 가장 잘 드러나고 우리 시대에도 가장 절실히 요청되는 가치이다. 수도 생활은 복음의 정 신을 계승하고 이를 풍부히 실현하려는 시도 가운데 대 표적인 것이다. 복음의 정신은 "누가 내 뒤를 따라오려 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 니다. 사실 제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입니다"(마 태 16, 24-25)에 잘 나타나 있다. 그래서 복음의 이 같은 요구는 수도 생활의 역사에서 면면히 계승되어 오늘날에 도 절실한 가치가 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강 조하였듯이 수도자들은 "오늘날에도 실제적으로 정신적 으로 가난해야 할 필요가 있고"(수도 13항), 가난이 힘들 어질수록 하느님에게 자신을 남김없이 바치려는 태도는 더욱 값지게 마련인 까닭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완 덕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르는 데 있고, 올바름과 거 룩함을 지니신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된 새로운 인 간성에 있다' (K.H. Pescke)면 더욱이 가난은 그리스도인과 수도자들에게 절실한 덕목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가난하 게 사셨고 또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시어 그들과 동일시 하셨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고 따르 는 완덕의 길을 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가난은 필수적인 덕목이다.
〔사랑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덕목] 자신의 소유를 포기 하지 않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을 주장하는 것은 거 짓일 가능성이 크다. 가난은 물질적 소유의 포기와 또 기 꺼이 그렇게 살려는 마음의 의향이 동시에 드러나야 하 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가난은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려 는 사랑의 마음이 따라야 한다. 아울러 내적인 마음의 태 도와 실제적인 빈곤이 함께 가야 함은 물론이다. "성덕 가운데 하나인 사랑은 불행한 사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 못 가진 사람들과 유대를 맺을 수 있게 만들어 주 는 내적인 청빈 정신 없이는 불가능한 까닭이다" (K.H. Pescke). 사랑의 내용과 목적이 결국 하느님의 영광과 그 리고 하 느님의 창조와 구원 사업을 펼치는 하느님 나라 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이르는 한 가지 방편인 가 난은 필수적으로 사랑과 일치 관계에 있어야 한다. 〔수도 생활에서 나타난 가난] 교회 안에서 가난을 생 활에서 실천하려고 한 시도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노력 이 수도원 생활이다. 다음의 사례들은 가난이 수도자들 에게 단지 정신적이고 영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실제의 가난이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시간과 공간이 달라도 가난은 수도 생활에서 본질적인 영역이다. 또한 수도원 의 가난은 성 프란치스코의 예에서처럼 교회사 안에서 쇄신의 원천이자 표지(sign)이다. 초세기의 교회 수도 생 활이 시작된 초세기의 삶은 가난이 가장 중요한 특징이 다. 당시의 교부들은 이러한 생활을 주도해 나갔고 복음 의 원천에 가장 가까이 가고자 하였다.
초기 수도자들 : 교부들은 철저한 무소유를 실천하려 고 노력하였다. 다음의 예화에서 교부들이 가난을 어떻 게 이해했는지를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한 수사가 어느 원로에게 물었다. 제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습니까? 원로는 속옷을 벗어 허리에 걸치고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뻗으며 말했다. '수도자는 이래야 하네. 물질적인 사물 에 대해서는 알몸이 되어야 하고 이 세상의 유혹과 시련 앞에서는 십자가에 못박혀야지. 그리고 수도자에게 중요 한 것은 소유보다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네. 하 느님이 하실 일을 물질적 재화가 대신하게 된다면 하느 님이 하실 일은 없기 때문이지. : " 이와 함께 서방 교회의 수도 생활을 대표하는 성인은 아우구스티노(354-430)이 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가르침은 저서 곳곳에 나타난 다. 그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것은 수도회 규칙서이다. 성 인은 개인의 가난과 공동 소유에서 서로의 사랑이 비로 소 구체적으로 표현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수도자 개인의 가난과 공동 소유를 수도회 자체의 전제 조건으로 보았 다. 그래서 성인은 복음적 가난을 수도회 생활의 법칙이 라고 보았고(설교 355, 2, 2), 수도원 안에서 스스로 의무 화하는 재산의 자발적인 나눔이 인간 생활을 위한 차원 높은 이상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실천하는 가난은 소 유의 완전한 공유를 뜻하였다. 성인은 복음적 가난과 재 산의 나눔에 관한 한 실제 생활에서 제자들에게 흠잡힐 데 없는 모범적인 삶을 살았다. 그 예를 성인이 주교가 되었을 때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던 경우에서 볼 수 있 다. 또한 성인에게 복음적 가난은 진정한 사랑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래서 성인은 "사랑은 개인의 것을 공동의 것보다 더 중히 여기지 않고 오히려 공동의 것을 개인의 것보다 더 중히 여기는 것" (규칙 5, 2)이라고 말한다. 성 인은 가난이 진실로 마음에서 우러난 덕성이어야 하느님 의 눈에 가치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복음적 가난은 단 순히 외적 포기의 문제가 아니라 생활 태도 전체에 영향 을 주는 요소라고 보았다. 성인은 지상의 재물에 대한 자 발적 포기가 하느님과 천상의 것들을 향해 우리의 마음 을 열게 하고 넓게 한다는 것을 자신의 체험을 통해 깊이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가난의 정신은 "우리가 수도원 에 입회하기 전에 갖고 있었던 것 또는 우리가 취득하거 나 소유할지도 모르는 모든 것을 스스로 기쁘게 포기하 는 그 자체에서 드러난다" 고 말한다. 성인은 수도 생활 의 가난을 예수 그리스도를 더 가까이 따르는 것으로 이 해한다. 그러나 이러한 따름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소는 외적인 행동이 아니라 내적인 자세이다. 하느님은 사람 이 얼마만큼 포기하느냐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 든 세속적인 것을 초월하는 마음에 관심이 있으시기 때 문이다. 성인에 따르면 진정한 수도자들이 선택한 가난 의 고귀함은 이 가난이 하느님이시며 인간이신 그분 자 신의 핵심적인 특징을 반영하며 또한 그 지체들을 머리 와 더 밀접하게 결합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래 서 초세기 수도자들이 생각한 가난은 생활의 일부가 아 니라 궁극적인 관심사였으며 생활 그 자체였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실제적 가난이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 치기 위한 수덕의 방편이었던 동시에 가난한 이들과 수 도자를 연결해 주는 끈이었음도 확인할 수 있다.
7~8세기 : 이 시기를 대표하는 수도자는 베네딕도 성인(750~821)이다. 베네딕도 성인의 가난에 대한 가르침 은 베네딕도회 수도 규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규칙서 에서 성인은 가난을 공동 소유의 정신으로 표현한다. "도대체 어떤 물건이라도, 자기 몸과 뜻도 개인의 소유 로 갖지 못함은 자기 몸과 뜻도 개인의 마음대로 가져서 는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록된 바와 같이 모든 것 은 모든 이에게 공동 소유가 되어야 하며 누구라도 무엇 을 자기 것이라고 말하거나 생각하지도 말아야 한다" (33 장). 그렇다고 성인이 자신의 소유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 다. 하지만 그 개인의 소유마저도 공동체의 것이었고, 궁 극에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써야 할 것이었다. "수도 승들은 옷의 색깔이나 품질에 대해서 투정하지 말고, 다 만 거주하는 지방에서 구할 수 있거나 혹은 싼값으로 살 수 있는 것으로 해야 한다. 새 것을 받으면 언제나 헌 것 은 즉시 되돌려 주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옷방에 보 관하게 할 것이다" (34장). 그리고 수도자의 가난은 교부 들의 생각과 같이 하느님께 전적으로 맡기기 위함이다. 입회자에 대한 규정에서 베네딕도 성인은 "만일 입회자 가 재산을 가지고 있다면 미리 그것을 가난한 사람들에 게 희사하든지 혹은 법적 증서를 작성하여 수도원에 기 증하든지 하여 아무것도 자기에게 남겨두지 말 것"을 당 부한다. 이것은 "그날부터는 입회자가 자기 몸에 대해서 도 아무런 권리를 가지지 못함"(59장)을 알게 하도록 하 기 위해서다. 그러나 성인이 생각하는 가난은 수덕상의 가난만을 뜻하지는 않았다. 성인에게 수도자의 실제적인 가난은 성인이 살던 당시에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경험하 고 있는 빈곤을 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보여 주는 표지 였다.
중세 중기(1050~1300) : 중세 서방 교회는 봉건적인 생 산 양식을 따랐다. 주교가 영주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 다. 그래서 교회는 부유한 생활뿐 아니라 당시의 구조에 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독일에서뿐만 아니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에서도 나타났다. 귀족이 나 권세가들이 교구와 수도원들을 장악하고 있는 경우도 흔하였다. 그래서 부유하고 힘이 생긴 교회는 자신들이 가진 재물을 극복하고 무산 시민층과의 접촉을 잃을 위 험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 그 시 대의 특별한 필요와 어려움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으로 성인들이 나왔는데 당시를 대표하는 성인이 곧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도미니코 성인이다. 이들은 내면적인 소명과 은총으로 당시 교회와 사회가 처해 있던 곤경으 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였다. 그 방편이 사도 적 가난이었다.
성 프란치스코(1181?~1226) : 프란치스코는 엄격한 가 난을 통하여 교회 안의 악습을 바로잡고 그리스도교의 생활을 복음서가 가리키는 표준으로 되돌리고자 하였다. 당시에 교회는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복음 의 가치를 무시하고 있었다. 많은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회심을 거부하고, 다른 이들은 극단주의자가 되어 이단 으로 빠져 교회에 순명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성인 의 관심과 열정은 더욱 강렬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제자 들을 모으기 전에도 마태오 복음 10장 9-10절의 가난에 대한 복음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애썼다. 성인은 "단순한 욕구를 만족시키면 안락에 빠지기 마련" 이라고 했고 또 한 번은 "탁발 수도승이 청빈 생활을 하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외면할 것이다"고 하면서 청빈의 정신 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엄격한 가난은 사막의 교부들과 같은 초기 수도자들이 추구하던 이상을 되살리는 것이었 다. 성인이 실천한 엄격한 가난은 하느님께 온전히 바치 는 수단이었으며, 수도원 밖에서 빈곤하게 살아가는 이 웃들과 연대하고 그들 안에 계신 하느님과 만나는 방편 이었다. 성인은 교회에 청빈에 대한 사랑을 다시 부여하 고, 교회의 부유함으로 인해 스캔들을 받은 사람들에게 교회를 신빙성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의 제자들은 그 들의 청빈 생활을 통해, 그러나 세상을 멀리하거나 세상 을 경멸함이 없이 청빈 이상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올바 로 고수하였다. 그는 그 당시 오로지 전도, 고행 및 기도 에만 전념했다. 그는 유언장을 쓰면서도 청빈을 엄격하 게 준수할 것과 규칙을 충실히 지킬 것을 마지막으로 호 소했다. 이러한 프란치스코의 정신은 작은 형제회 회칙 에 잘 나타나 있다. 이 회의 정신은 복음을 완전 무결하 게 생활화하는 것이었다. 즉 가난하고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께서 성인에게 계시하신 것처럼 하느님에게 반 대되는 모든 이기적인 경향, 육의 정신을 버리고 주님의 정신대로 사는 것이 형제들의 이상이었다.
현대 테제 공동체 : 가난은 단지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오늘날 더 절실하게 요청되는 덕목이다. 현대의 넘치는 풍요를 인류가 보편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까 닭에, 풍요한 서구에서 시작된 가난의 실천은 매우 시사 적이다. 그래서 이런 시점에 테제의 창시자 로제 슈츠의 말은 커다란 의의가 있다. "가난 그 자체가 덕스러운 것 은 아니다. 복음에 있는 가난한 사람은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추어지리는 기쁜 믿음으로 내일에 대한 보장 없이 살 아가기를 배운다. 가난(淸貧)의 정신은 빈곤해지는 데 있지 않고 모든 것을 창조의 소박한 아름다움 속에 배치 하는 데 있다. 가난의 정신은 오늘을 기쁨 가운데 살아가 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이 말이 가난 자체보다 그렇게 살 아가려는 마음가짐을 중시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 할 필요가 있다.
〔실천의 의미〕 가난이 완덕에 이르는 수단으로 모든 이에게 언제나 적용되어야 하는 가치는 아니다. 그래서 극심한 가난과 절제된 생활로 일생을 사는 것은 그 길을 선택한 특별한 이들에게는 선물이다. 수도자의 삶과 평 신도의 삶을 구별하는 것은 복음적 권고들 적어도 가난 과 독신으로 나타나는 정결과 순명의 서원 내용들을 지 속적으로 실천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나 이렇게 산다 고 해서 저절로 성화가 되는 것은 아니고, 가난의 목적에 꾸준하고 의지를 다해야만 이룰 수 있는 목표이다. 그래 서 실제로 어떤 식으로든 포기를 실천하지 않으면서 영 적으로 포기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망상이다. 예수 그리 스도는 자신의 삶을 통해 실제 가난의 모범을 보여 주셨 고, 수도자는 다른 누구보다 더 큰 기쁨을 갖고 쉽사리 가난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런데 오늘날 실 천적 가난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그래서 이럴수록 가 난이란 모든 수도회의 본질에 속하며, 수도자는 재화의 독립적 사용과 관리권을 포기하고 자신의 취향에 맞는 편리함과 사물들을 포기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 야 한다. 수도자는 참된 복음적 가난의 모범을 통해 다른 모든 이를 능가해야 하고, 고요하게 자기 생활을 충만케 하는 데 필요로 하는 물질과 자기 의지로써 만족하며 수 도 생활의 생명을 빼앗는 화려함과 편리함을 피해야 하 는 신분이기 때문이다. (→ 완덕 ; 수도 서원)
※ 참고문헌 Jordan Aumann, Spiritual Theology, Sheed and Ward, London, 1980(이홍근 역, <영성신학》, 분도출판사, 1987)/ Karl H.Pescke, S.V.D., Christian Ethics-Moral Theology in the Light of Vatican II, vol. 1, C. Goodliffe Neale, Alcester and Dublin, 1986(김창훈 역, 《그리스도교 윤리학 제1권 기초 윤리신학》, 분도출판사, 1990)/ Dom Jean Dion, Dom Guy Oury, Les Sentences Des Pères du Desert, Abaye Saint-Pieere-Solesmes, 1966(요한 실비아 역,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분도출판사, 1988)/ John C. Haughey, S.J. The Faith that does Justice, Paulist Press, New York, 1977(성염 역, 《정의를 실천하는 신앙》, 분도출판사, 1980)/ Adolar Zumkeller, O.S.A.,Augustian Rule, Augustian Press, 1987(이형우 역, 《아우구스띠누스 규칙서》, 분도출판사, 1989)/ Roger, La Règle de Taise, Presses de Taise(S. et L.) France, 1966(안응렬 역, <떼제의규칙》, 분도출판사, 1976). [朴文洙]
: II . 성서학의 가난
우리말에서 가난이란 말이 빈곤, 빈궁, 빈천 등과 의미 범주를 같이하는 말이듯, 구약의 히브리어나 신약의 그 리스어에서도 가난을 뜻하는 동일 의미 범주에 속하는 말이 많이 있다. 그러나 각 낱말들의 뜻이 어원학적으로 엄격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므로, 그 낱말이 쓰인 문맥 이라든가 또는 특징적인 어휘를 쓰는 제사장이나 예언자 나 지혜자와 같은 집단의 성격을 아울러 고찰해야 한다. 〔구약에서의 가난] ① 빌어먹는 신세 : 구약 전체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가난은 '빌어먹는 신세, 거지 신 세' 를 가리키는 '에브욘' ('ebyôn)이라는 말이다. 물질적 으로 궁핍하여 생활이 안정되지 못한 이들, 거처할 집이 없는 이들(이사 14, 30), 굶주리는 이들(이사 32, 6-7), 권 력자들과 탐관오리의 수탈에 희생된 이들(예레 2, 34 ; 20, 13 욥기 24, 4 ; 시편 35, 10 ; 37, 14), 법적 보호를 받 지 못하는 이들(아모 5, 12), 경제적으로 착취를 당하는 이들(아모 2, 6 ; 8, 6)을 일컫는다. 특히, 시편은 바로 이 런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구원의 대상이 됨을 말하고 있다(시편 35, 10 : 40, 17 ; 69, 33 ; 70, 5 ; 140. 12 등).
② 가난한 농민 : '약자' 를 뜻하는 히브리어 '달' (dal) 은 예언자의 글에서는 주로 '가난한 농민' 을 일컫는다. 이들은 정당한 법적 대우를 받지 못하고(이사 10, 2) 지주 에게 부당한 도지를 강요받으며(아모 5, 11), 빚을 못 갚 는 경우에는 노예가 된다(아모 8, 6). 방목할 땅이 없고 (이사 14, 30), 착취의 대상으로 언급되기도 한다(이사 26, 6 ; 아모 2, 7 ; 4, 1). 하느님은 바로 이러한 힘없는 농민 의 보호자이다(이사 25, 4 ; 스바 3, 12). 하느님이 가난한 농민들을 해방시킬 때, 그들을 착취하던 권력자들은 천 대받던 자들과 영세민들에게 짓밟힌다(이사 26, 5-6). 예 언자 예레미야에게서도 가난한 농민(달)은 정치 및 종교 당국과 늘 대칭적으로 나타난다(예레 5, 4-5). 예레미야서 의 한 구절은 히브리어 '달' 이 "가진 것이 없는" 영세민 을 가리킨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예레 39, 10). 기 원전 587년 바빌로니아가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지도급 의 주민들을 모두 바빌로니아로 사로잡아 갔을 때, 팔레 스티나 본토에는 가난한 농민들만 남아 농사 일에 강제 로 동원되었는데, 구약은 그들을 "달랏 암하아레츠"(가난 한 땅의 백성) 혹은 "달랏/달롯 하아레츠"(땅의 빈민)이라 고 부른다.
③ 게으름에서 오는 가난 : 게을러서 가난하게 되거나 인색하게 살다가 가난하게 된 경우에는 구약에서는 히브 리어 '막쏘르' (mahsôr)를 써서 표현하였다(잠언 11, 24 ; 22, 16 ; 24, 34). " '조금만 더 자야지, 조금만 더 눈을 붙 여야지, 조금만 더 일손을 쉬어야지' 하였더니 가난(라 쉬)이 부랑배처럼 들이닥치고 빈곤(막쏘르)이 거지처럼 달려들었다" (잠언 24, 33-34)에서 그 대표적인 뜻을 볼 수 있다.
④ 바람직한 가난 : 우리말의 청빈(淸貧)과는 개념을 약간 달리해도, 바람직한 가난이라는 개념이 있다. 히브 리어 '미스켄' (miskēn)의 쓰임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아무리 나이 많아도 남의 말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왕 은 어리석다. 그보다는 가난할지라도 슬기로운 젊은이가 낫다" (전도 4, 13). "더럽게 재산을 모으느니 가난해도 떳 떳하게 살아라"(잠언 19, 1). "돈 싫다는 사람 있으랴만 거짓말쟁이 되는 것보다 가난한 편이 낫다" (잠언 19, 22) . ⑤ 정치적 및 경제적 약자 : 히브리어 '라쉬' (ra)는 주 로 권력이 없거나 경제적으로 혜택을 받지 못해서 가난 하게 된 이들을 일컫는다. "거지로 태어났다가 왕위에 오를 사람도 있다"(전도 4, 14)라는 말은 권력 없는 가문 에서 한 사람이 나와서 최고 권력의 자리에까지 오른 경 우를 두고 한 말이다. "나라에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일이 있어 인권이 유린되는 것이 보이더라도 놀라지 말 라. 그런 일을 감시할 웃어른이 있고 그 위에 또 웃어른 이 있다" (전도 5, 7)에서는 경제적으로 수탈당하는 이들 이 '라쉬' 라는 말로 불린 예이다.
⑥ 사회적 불의와 억압에서 빚어진 가난 : 히브리어 '아니' ('anî)는 구약에 나타나는 가난의 개념 중에 가장 강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용어는 예언서, 시편, 지혜 문학, 오경과 역사서 등 구약 전반에 걸쳐 나타난 다. 예언서에서도 '아니' 는 가난한 사람을 일컫는 가장 대표적인 용어이다. "어찌하여 너희는 내 백성을 짓밟느 냐? 어찌하여 가난한 자의 얼굴을 짓밟느냐?(이사 3, 15)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경제적 억압으로 가난하게 된 이들이다. "너희가 영세민(아니)의 정당한 요구를 거절하 고 내가 아끼는 백성을 천대하여 그 권리를 짓밟으며 과 부들의 재산을 털고 고아들을 등쳐먹는구나"(이사 10, 2) 라는 말은 법적으로 부당하게 취급받는 빈민을 염두에 둔 것이다. 사기꾼에게 사기를 당해 가난하게 되는 경우 도 있다(이사 32, 7). 예언서에서 '아니' 는 '에브욘' 과 함 께 평행을 이루어 빈민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는 한 편(이 사 14, 30-32 ; 32, 7 ; 예레 22, 16 에제 18, 12), 또 다른 편으로 '아니' 는 '백성' 을 뜻하는 '암' 과 결합되어 '천 민' 을 가리키기도 한다(이사 3, 15 ; 10, 2 ; 14, 32 ; 스바 3, 12). 시편 중에서도 '아니' 는 탄원시에 특히 많이 나 온다. 하느님과 사람의 각별한 관계를 맺어주는 것도 바로 '아니' 이다. 고통 가운데 처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겪는 이 '아니' 를 하느님께서 잊지말아 주시기를 간구한다 (시편 9, 12 10, 12). 하느님은 바로 이들 '아니' 를 구원 하시거나 '아니' 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분이시다(시 편 12, 5 ; 18, 28 ; 22, 25). 지혜 문학에서는 '아니' 가 구 제의 대상으로 나온다. '아니' 에게 자비를 베풀면 베푸 는 자가 덕을 입는다(잠언 14, 21). 가난의 고통을 잠언은 "고난받는 사람(아니)에게는 모든 날이 다 불행한 날" (잠 언 15, 15)이라고 하여, 가난의 처절함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 가난이 불의보다 나은 것은 "거만한 자들과 어울려 전리품을 나누는 것보다 마음을 낮추어 낮은 사 람들(아니임)과 어울리는 것이 낫기"(잠언 16, 19) 때문이다.
⑦ 경건한 가난 : 히브리어 '아나빔' ('anāwîm)은 예언 서와 시편과 지혜 문학에서 "가난한 자" 곧 "경건한 자" "겸손한 자의 뜻으로 사용된다(시편 25, 9 ; 34, 2). 하느 님은 '가난한 사람' (아나빔)을 잊지 않으신다(시편 10, 12). '아나빔' 역시 자기들을 잊지 말아 줄 것을 하느님 께 간구한다(시편 9, 18). '아나빔' 은 동시에 "야훼의 계 명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다. 가난한 사람과 경건한 사 람은 병행구를 이루어 나타나고 있다(시편 25, 9-10). '아 나빔' 은 먹거리가 없는 사람들이며(시편 22, 26), 정착할 땅이 없는 사람들이며(시편 37, 11), 상처받고 병든 사람 들이다(시편 69, 29). 예언자의 글에서는, '아나빔' 은 사 회의 불의 때문에 희생된 사람들이다(이사 32, 7 ; 아모 2, 7 ; 8, 4). 그러나 그들은 장차 올 평화스러운 왕국에서 불의에 희생됨이 없이 살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다(시편 11, 3-4).
〔신약에서의 가난] 구약에서와 마찬가지로 신약에서 도 그리스어 '프토코스' (ptōchós ; 가난한, 억눌린, 빌어먹 는), '페네스' (pénēs ;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옹색한 : 2고린 8, 9), '페니크로스' (penichrós ; 가난 : 루가 21, 2), '휘스테레 마토스' (hystérēmatos ; 결핍 : 루가 21, 4), '엔데에스' (endeēs ; 궁핍 : 사도 4, 34) 등 '가난' 을 뜻하는 여러 용어들이 함 께 쓰여 있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먹을 것이 없고 마실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고 집이 없고 일할 자리가 없어서, 비천한 살림을 꾸려가는 사람들이다. 이들 가난 한 사람들이 겪는 가난의 사회 경제사적 원인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자선의 가치와 가난한 사람들 자신이 가 지고 있는 희망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관심 사 등은 구약의 경우와 같다. 특히 야고보서에서 그러하 다. 복음서 중에서 마태오 복음의 경우에서는 가난의 의 미를 영적으로 확대시키고 있다(마태 5, 3 ; 비교 루가 6, 20).
※ 참고문헌 A. Kuschke, Arm und Reich im Alten Testament mit besonderer Bericcksichtigung der nachexilischen Zeit, 《ZAW》 57, 1939, pp. 31~571/ J. Plenis David, Poverty in ther Social World of the Wise, 《JSOT》 37, 1987, pp. 61~78/ -, 《ABD》S. [閔泳珍]
Ⅲ . 해방신학의 가난
해방신학에서 말하는 '가난' 의 개념은 해방신학자들 에 따라 약간씩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해방신학자 들이 말하는 가난은 대체로 '물질적 가난', '영성적 가난' ,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는 투신과 가난에 대해 저항 하는 투신으로서의 가난' 의 세 가지 뜻으로 쓰인다. 〔물질적 가난] 구티에레즈(G. Gutiérrez)는 가난이란 인 간답게 사는 데 필요한 경제적 재화가 결핍된 상태라고 말한다. 그래서 올바른 현대인이라면 인간의 품위를 떨 어뜨리는 물질적 가난을 거절하고 이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물질적 가난은 점진적인 생활 조건의 향상과 반대되고, 고의가 아니더라도 가난의 원 인인 불의와 착취의 상황을 정당화하기 때문에 그리스도 교의 이상이 될 수 없다고 한다. 보프(L. Boff)도 가난을 인간다운 생활의 기본적 욕구들을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수단과 봉사가 결핍된 상태라는 의미로 쓴다. 그러나 소 브리노(J. Sobrino)는 가난이 단순히 재화가 결핍된 상태 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오히려 가난이란 역사적으로 위협당해 온 생명과 생활이라고 한다. 즉 억 압적 구조들로 인해 서서히 살해되거나 또는 급속하고도 난폭하게 말살되는 생명과 생활이 가난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가난은 인간들간의 연대를 방해하며 하느님과의 친교를 단절시킨다고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물질적 가난은 하느님 뜻에 위배되는 죄이며 악이다. 따라서 이 가난은 구티에레즈가 말한 바와 같이 '악표적(惡表 的) 상태' 이며, 규탄하고 단호히 단죄해야 할 죄악이다. [영성적 가난] 영성적 가난은 전통적으로 물질적 재화 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내적으로 초연해지는 것으로 이해 되어 왔다. 그러나 구티에레즈는 영성적 가난은 물질적 가난 안에 육화될 때에만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고 말한다. 에야쿠리아(I. Ellacuria)는 이를 물질적 가난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의식적이고 적극적인 상태 로 끌어올리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 가난은 무 엇보다도 먼저 주님께 전적으로 순응하는 것을 의미한 다. 보프는 이것이 복음적 인간이 되는 방법이며 전적인 순종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이 가난은 하느님과 형제 인 인간들에게 전적으로 순응하고 자기 자신을 넘겨주는 복음 정신이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 조건 이 된다. 곧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행복 선언의 의미를 가리킨다.
에야쿠리아는 마태오 복음이 실제로 가난하지만 자신 들의 조건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가난을 구원의 원리로 만드는 이들을 언급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러 한 의미에서 보면 가난은 교만과 반대의 뜻이며, 주님께 대한 믿음, 내맡김, 신뢰와 같은 뜻이다. 그래서 누구든 인간에게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인 사랑을 받으려면 가난 해야 하고 영성적인 면에서도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루가 18, 17). 이러한 가난은 '영성적 친자 관계(親者關係)' 로 서의 가난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예수의 '자기 비움' (kenosis)에서 잘 나타난다. 구티에레즈는 필립비서 2장 6-11절의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을 해석하면서, 예수가 죄인의 조건과 그 결과를 취한 것은 결코 그것들을 이상 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조건과 결과들로 인해 피해 를 입은 사람들을 사랑과 연대로 죄에서 구출하려는 목 적에서였다고 한다. 즉 자신의 가난으로 그들을 부유하 게 만들기 위함이었으니, 인간의 이기심을 비롯하여 인 간을 부자와 가난한 자, 소유자와 비소유자, 억압자와 피 억압자로 분열시키는 모든 것에 반대, 투쟁하기 위해서 였다는 것이다. 보프 역시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 은 가 난을 이상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난 안에서 출발하여 가난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고 가난한 이들과 부자들, 억압당하는 사람들과 억압하는 사람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하는 새로운 사고 방식을 심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소 브리노는 자기 비움의 구원 과정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연적이든 의지적이든,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되는 '낮춤' 이 필요하고 또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 관계 속에서 그들의 가난에 반대하고 투쟁함으로써 가난을 '영성화'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는 데 투신하는 가난과 가난에 대한 저항적인 투신으로서의 가난] 구티에레즈에 의하면 가난은 사랑과 해방의 행위이다. 이 행위는 구원의 가치 를 지닌다. 인간에 대한 착취와 인간 소외의 원인이 이기 심이라면, 자원해서 가난한 사람이 되는 근본적인 이유 는 이웃 사랑이다. '그리스도교적 가난' 은 가난한 이들, 불행과 불의로 고통당하는 이들과 연대하며 투신할 때에 만 의미가 있다. 물질적 가난을 이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스도교적 가난 이다. 곧 악으로서의 가난에 항의하고 가난을 없애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랑의 표현인 그리스도교 적 가난은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고, 가난에 반대하여 항 의할 때 드러난다. 가난이 연대성과 항의를 통한 해방을 뜻한다는 면에서 보면 이 가난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성 격을 띠게 된다. 에야쿠리아는 이를 '복음적 가난' 의 주 관적 요인으로서, 불의의 산물인 가난에 대한 개인적 · 집단적인 의식화이며 동시에 실천적인 투신을 뜻한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가난을 신앙을 통해 의식적으로 물질 적 가난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신학적 가난' 이라고 한다.
〔특성과 과제〕 해방신학자들이 사용하는 '가난' 또는 '가난한 이들' 이라는 말은 다른 신학자들이 사용하는 용어들과 특별히 다르지 않다. 그러나 '물질적 가난' 을 반대하고 '영성적 가난' 을 비판하는 것은 해방신학에서 특 기할 만한 요소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서의 가난에 대한 해방신학의 해석은 악표(惡表)적 상태' 로서의 가난과 '영성적 친자(親者) 관계' 로서의 가난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해방신학자들의 관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가난한 이들' 과의 '연대적 투신' 과 '가난' 에 반대 하는 '항의적 투신' 으로서의 가난을 성서학적 관점에서 뿐 아니라 사회학적이며 동시에 신학적인 관점에서도 다룬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학적으로' 가난한 이들이 동시에 어떻게 '성서학적으로' 도 가난한 이들이 되는 것 인지, 또한 '가난한 이들' 자신의 가난과 그들과 '연대 관계에 있는 이들' 의 가난이 어떠한 관계에 있는 것인지 에 대한 명확한 설명은 해방신학이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 참고문헌 J. Sobrino, La experiencia de Dios en la Iglesia de los pobres, en AAVV, Espritualidad y liberacion en América Latina, San José de Costa Rica, 1982/ I. Ellacuria, Las bienaventur como carta fundcional de la Iglesia de la pobres, en AAVV, La Iglesia de los pobres y organizaciones populares, San Salvador, 1978/ L. Boff, Lafe en la periferia del mumdo. El caminar de la Iglesia con los oprimidos, Santander, 1981/ J. Lois, 김수복역, 《해방신학의 구조와 논리》, 한국신학연구소, 1988/ C. Boff · J. Pixley, Opcido pelos pobres, Vozes, Pétropolis, 1986, Trans. A.J. Keller,
Die Option Für die Amen, Diisseldorf, 1987/ G. Gutiérrez, Teologia de la Liberacion, Trans. F. Malley, Théologie de la Libération, Lumen Vitae, 1974. 〔金春鎬〕
: Ⅳ. 동양 철학의 가난
[유 가] 유가(儒家)를 하나의 학파로 성립시킨 인물은 공자이고, 그의 사상을 순수하게 보존하는 사료(史料)는 《논어》뿐이다. 여기에서 공자는 일곱 번 정도 가난에 대 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였는데 이를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일반사람들이 가난에 대해 갖는 태도를 묘사한 현상적 언급이다. "가난하고 천한 것은 사람마다 다 싫 어하는 것이다"(里仁 편 5장), "가난하면서 원망하지 않기 란 어려운 것이다"(憲問 편 10장). 물질적 빈곤이 힘들고 원망을 자아내 그래서 누구나 가능하면 빈곤한 처지를 면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이런 일반적 반응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고 바른 것을 지키기 위 해서라면 가난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다(里仁 편 5장).
둘째,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그 사람의 지향에 따라 다른 반응이 나온다는 언급이다. "용맹한 것을 좋아하면서 가난을 미워하면 난을 일으킬 것이다" (泰佰 편 10장), "군자는 도를 걱정하지 가난을 걱정하지 않는다" (衛靈公 편 32장). 공자는 덕을 닦아 나가는 사람 을 군자(君子)라고 불렀고, 이익만을 좇는 사람을 소인 (小人)이라고 해서 인간 됨을 그릇에 따라 큰 사람과 작 은 사람으로 구별하였다. "군자는 곤궁에 굳게 견디지만 소인은 곤궁해지면 마구 군다"(衛靈公 편 1장)는 상반된 사실을 지적하며 빈한한 시기야말로 인간의 진가가 드러 나는 때라고 보았다. 이와 같이 때때로 가난을 감수할 수 있어야 된다고 하면서 공자는 사람에게 진정한 배움과 노력이 있으면 복록(福祿)이 따르는 법이라는 철칙을 일 러 주었다(爲政 편 18장).
셋째, 공자는 가난이나 부유는 상황에 따라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은 더 높은 가치인 인 (仁)의 도(道)를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되는가에 따라 판 정된다고 하였다. "의롭게 번 재부는 좋은 것이지만 의 롭지 않은 재상은 뜬구름 같다" (述而 편 15장). 따라서 "나라에 도(道)가 행해지는데 빈천한 것은 부끄러운 일 이지만 나라가 무도(無道)할 때 부귀를 누리는 것도 부 끄러운 일" (泰佰 편 13장)이라고 했다. 의롭게 살면서 여 유를 갖는 것은 몇몇하지만 그렇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가난한 편이 낫다는 것이다. 빈궁이나 부유한 속에서 인 간이 가져야 할 자세는 학이(學而) 편 15장에 보존된 공 자와 자공(子貢)의 대화 속에 잘 요약되어 있다. 자공은 투자 능력이 있던 제자로 여유 있는 생활을 누렸고 후에 는 외교관으로서도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가 자신의 삶 을 되돌아보면서 "가난해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해도 교 만하지 않다면 괜찮겠지요? 하고 스승에게 물었다. 공 자는 "괜찮다마는 가난하면서도 도를 즐기고 부유하면서 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 고 대답함으로써 제자 가 더 높은 경지를 바라보도록 촉구하였다.
《중용》(中庸) 14장에서는 같은 사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부귀에 처해 있으면 부귀한 데서 행하고, 빈천에 처해 있으면 빈천한 데서 행하고, 미개족 속에 처 해 있으면 미개족 속에서 행하고, 환난 속에 처해 있으면 환난 속에서 행하므로 군자는 어디에 들어가도 득의하지 않는 일이 없다." 한마디로 유가는 부귀를 얻는 데 목표 를 두지 않고, 부귀나 빈천이나 어느 쪽이 오든 다 받아 들일 수 있는 시중(時中)의 마음 자세를 중시하였다. 인 간이 마땅히 살아야 할 도, 곧 인륜(人倫)을 실천하면서 어진 사람이 되는 것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자 한 사람은 재산을 써서 남을 돕고 이름을 빛내지만, 어질 지 못한 사람은 몸을 망쳐서 재산을 모은다고 했다(大學 11장). 따라서 공자는 한 가정이나 사회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는 가난을 걱정하기보다 분배를 우려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분배가 공평하게 이루어지면 구성원이 가 난하다고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季氏 편 1장).
공자의 균(均)이라는 경제관을 발전시킨 맹자(孟子) 는 항산론(恒産論)을 주장하였다. 항산이란 백성마다 가 족을 부양할 만한 재산, 곧 토지를 갖게 해야 하며 정치 가가 이렇게 해주어야 백성들이 도덕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고 한다. '자기를 닦아서 남을 편안하게 한다' (修 己安人)는 유가의 기본적 가르침이 정치적 인정(仁政)으 로 결실 맺는다고 하겠다. 맹자는 항산이 없이도 도덕적 일 수 있는 사람은 선비들뿐이라고 말함으로써 가난 속 에서도 도를 즐길 수 있는 안빈낙도(安貧樂道)가 유가의 이상으로 지속되기는 하지 만 모든 사람이 실천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고 하였다. 공자 역시 군자를 만나보기가 쉽지 않다고 한탄함으로써 가난 속에서도 기쁨을 지니기 위해서는 수양이 필요 하다고 보았다. 단, 공자는 수양 면에서는 맹자처럼 백성과 선비를 구별하지 않았 다. 공자는 가난이 시련의 때요 인격의 본모습을 적나 라하게 드러내 주는 기회임을 말했을 뿐이다.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전 나무가 더디 시들어 떨어진 다는 것을 안다" (子罕 편 28 장). 이런 정신은 유가에 지 속되어 신유학에서는 사사로운 욕심을 제거하고 천리 (天理)를 보존하는 선비의 청빈 실천으로 이어져 왔다.
〔도 가〕 도가(道家)는 물질적인 가난 그 자체에는 별 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도에 어긋나게 억지로 하지 않는 자연스러운(無爲自然) 마음가짐, 곧 자기에 집착하지 않는 초탈의 정신을 중시하였다. 그야말로 마음이 가난해 서 이기심에서 자유롭게 되어야 남을 키우는 쓸모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찰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빈 부분 때문에 그릇이 쓸모있게 된다. 문과 창문을 뚫어서 방을 만드는데, 빈 공간 때문에 방이 쓸모 있게 되는 것이다. 있는 것〔有〕을 이롭게 여기지만, 없는 부분[無〕 때문에 있는 것이 유용하게 된다" (道德經 11장). 장자(莊子) 역시 쓸모없게 큰 사당나무(人間世 편)나 곱추 등(大宗師 편) 장애인들에 대한 예화를 들어서 무용(無 用)의 유용성(有用性)을 말하였다. 또한 노자는 비어 있 는 마음을 남과 경쟁하지 않는 낮은 것에도 비유하였다. 그래서 겸허한 사람은 다른 이들을 자연스럽게 불러모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강과 바다를 예로 들어 다음과 같이 설 명하였다. "강이나 바다가 백가지 계곡의 왕이 될 수 있 는 것은 그들이 아래 있기를 잘하기 때문이다"(老子 66 장). 겸허한 사람은 부드러워서 약한 듯하지만 실제로는 생명을 간직하고 있다(老子 76장). 부귀를 찾을 때 사람은 교만하여지기 쉽고 번잡스러워지지만, 소박한 것에 만족 할 줄 아는〔知足〕 사람은(老子 33장, 46장) 여유를 즐길 수 있다.
유가가 "배움을 좋아한다" 〔好學〕면, 도가는 "도(道)의 조화 속에 노닌다" 〔遊〕라는 말을 즐겨 쓴다. 도가는 생과 사, 부와 빈, 복과 화, 어느 한쪽에도 절대적 가치를 두 지 않고 양쪽에서 자유롭게 노닐 수 있는 초연성을 목표 로 하였고 이런 내면적 자유를 예술로 표현하였다. 도가 에서는 가난을 완전히 정신적 무집착으로 해석했기 때문 에 일을 할 때 억지로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끝난 후에도 물러나는 것을 중시하였다. "만물이 일어나지만 다스리 지 않고, 낳지만 소유하지 않으며, 일하지만 자랑하지 않 고, 공이 이루어지면 거기에 거하지 않는다. 대개 애착하 지 않기 때문에, 공덕이 (그에게서) 떠나지 않는 것이다"(老子 2장). 무소유의 마음을 지닌 이들은 남을 키워주고 모든 일이 제대로 돌아가게 하지만, 일단 일이 성사되면 공치사없이 물러난다. 도가에서 자주 사용되는 무위(無 爲), 무공(無功), 무명(無名), 무기(無己), 무집(無執) 등의 부정적 표현은 일면 소극적으로 들리지만 실제로는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유(有)의 세계를 초월하는 도의 무 한성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불 가〕 불가(佛家)에서 물질적 가난은 출가와 직결되 어 있다. 가족과 사회 신분과 소유물을 온통 버리고 출가 하는 스님들은 말 그대로 무소유(無所有)를 표방한다. 가톨릭 수도 전통에서와 같이 어느 수도회 소속이라는 정체성과 그 소속이 약속하는 사회적 보장도 없이 불교 의 스님들은 이상적으로는 자유롭게 행각하는 운수객(雲 水客)들이다. 그러나 불가에서 중시하는 가난은 물질적 무소유 자체보다는 '나' 까지를 온전히 포기하는 무아(無 我)의 철저한 실천이다. 그래서 무소득심(無所得心)은 분별이 없는 지혜를 지칭하고 무소유는 공(空)의 다른 이름이 된다. 《유마경》(維摩經)에서와 같이 물질적 부유 를 누리는 거사(居士)도 무소유의 정신적 자유로움을 누 릴 수 있다. 그래서 승가 안에서 출가자의 가난함은 상징 적인 중요성이 있다.
〔특성과 의미〕 동아시아 전통에서 가난이 지니는 개념 적 특성을 총괄해 보면 우선 오복 개념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가난에 대한 일반적 시각은 부정적이다. 그러 나 동시에 안빈낙도(安貧樂道), 무위(無爲), 무소유(無 所有) 등으로 사상가들에 의해 정신적 자유로 해석될 경 우 가난은 긍정적 가치를 지닌다. 이런 개념의 변화는 구 약 시대에도 일어났다. 바빌론 유배 이전까지는 부정적 이던 가난의 개념이 유배를 거치면서 가난한 자들(anawim)이 곧 의인이라는 긍정적 개념을 갖게 된 것과 유사 하다. 그리스도교가 7세기 당나라 태종 때 중국에 처음 전래되었을 때 경교의 수도자들은 개인 재산을 소유하지 않고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는 청빈한 종교인들로 기록되 었다(景敎流行中國碑). 17세기 초에 출판된 《천주실의》(天 主實義) 안에도 교황과 사제들이 독신자들이며 청빈을 행하는 출가자들로 소개되었고(8편), 리치를 비롯한 선 교사들은 서유(西儒)로서 유교의 선비들에 비교되곤 했 다. 한국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지은 <천주가사>(天主歌 辭)를 보면 공자의 제자 안회의 '안빈낙도' 사상을 그대 로 수용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교우 일반의 덕으로 칭찬 하고 있다(思鄕歌). 재산을 평가의 척도로 삼는 자본주의 시대에서 성서적 가난의 정신을 지켜 나가려면 동아시아 전통에서 존중해 온 안빈낙도와 무소유의 이상을 최대한 수용하며 새롭게 해석해 나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 참고문헌 《論語》/ 《孟子》/ 《中庸》/ 《大學》/ 《近思錄》/ 《老子》/ 《莊子》/ 《維摩經》/ 《天主實義》 <天主歌辭>. 〔金勝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