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 火葬 [라]crematio [영〕cremation [산]jhāpi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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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신비에 참여한다는 생각으로 화장보다 매장을 선호하였다(카타콤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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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신비에 참여한다는 생각으로 화장보다 매장을 선호하였다(카타콤바)


인류의 일반적인 장례법 중 한 가지로 사람의 주검, 즉 시신을 불에 태워 재로 만드는 장례 방법. '분소' (焚燒) . '소신' (燒身) · '분시' (焚屍) 등의 용어로도 쓰이며, 불교에서는 흔히 '다비' (茶毘)라고 한 다. 화장을 의미하는 라틴어 '크레마시오' (crematio)는 '불사르다' 또는 '(희생물을) 불살라 제사지내다' 는 의미를 지닌 동사 '크레마레' (cremare)에서 유래하였다. 특히 불교의 장례법으로 정착한 '다비' 는 산스크리트어인 '쟈피타' (jhāpita)를 소리나는 대로 옮긴 한자어로, '사 비' (闍毘) · '사유' (闍維) · '사비다' (闍鼻多) · '야순' (耶旬) 등으로 음역하기도 한다. ① 윤리 신학에서의 화장 주검을 처리하는 장례는 인간 생활의 중요한 통과 의례 가운데 하나로서, 기후 풍토와 인종 그리고 종교는 물론 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일반적인 장례법으로는 시신을 땅 위에 버리는 풍장(風葬), 땅 속에 파묻거나 돌 등으로 덮는 매장(埋葬, sepul- tura, burial), 물 속에 버리는 수장(水葬), 그리고 불에 태우는 화장 등이 있다. 동일 지역 내에서도 신분과 지위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장례를 치르기도 하였다. 〔역 사〕 화장은 여러 문화에서 일찍부터 존재한 장례법이다. 인도 등에서는 종교적 차원에서 화장의 관습이 넓게 퍼져 있어, 열심한 힌두교인들의 소원은 죽은 후 화장되어 갠지스 강에 뿌려지는 것이다. 반면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화장되는 나라도 있다. 티베트의 경우 고급 관리나 라마교의 승려는 화장, 중간 계층의 사람들은 매장이나 풍장, 하층 계급은 수장을 치른다. 라오스에서도 화장은 천수를 다 누리고 행복하게 살다 간, 축복받은 사람들에게만 행해진다. 우리 나라에 화장이 전래된 시기는 대략 삼국 시대에 불교가 전래되면서부터라고 추정되며, 조선 시대 《주자가례》 (朱子家禮)에 따라 장례를 지내기 시작하면서 화장이 차츰 사라졌다. 서양에서도 일찍이 기원전 1000년경 그리스인들이 화장을 처음 도입하였다. 아마도 낯선 땅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장례를 쉽게 치르기 위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일단 전쟁터에서 병사의 시신을 화장한 다음 타고 남은 재를 모아 고향으로 보내 장례식을 치른 후 땅에 묻도록 하였다. 특히 군인들에게 화장은 남성다운 용기와 미덕, 애국심을 상징하는 의미 있는 장례법으로 받아들여 졌으며, 영웅에게 합당한 유일한 최후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위대한 인물일수록 불길이 더 크게 치솟아 오르도록 화장하였다. 그리스도교 전래 이전의 로마 제국에서는 매장과 화장이 병존하였다. 전쟁 영웅들의 경우 그리스와 트로이의 장례법에 따라 화장하였으며, 화장은 중요한 신분적 상징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서기 100년경부터는 그리스도교의 영향과 화장에 사용되는 목재 부족으로 매장이 보편화되었다. 물론 당시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화장이 명백하게 금지된 것은 아니지만, 바람직한 것도 아니었다. 화장은 이교도적이며, 성령의 궁전인 몸에 대한 존경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약속된 육신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위협한다는 우려 때문에 매장의 전통이 보편화되었던 것이다. 785년 카를 대제(768~814)가 화장한 자를 사형에 처하는 법을 제정한 후 9세기에 이르자 화장의 관습은 완전히 사라져, 17세기에 전 유럽을 강타한 흑사 병과 같은 전염병이나 전쟁, 그리고 자연 재해 등의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고 19세기까지 유럽에서 화장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근세 이후, 반(反)그리스도교 단체들은 부활과 영혼의 불멸성을 부정하기 위해 죽은 이의 화장을 주장하기 시작하였으며, 문예 부흥 시기에 들어서자 자유주의자들은 공공의 위생과 땅의 보호라는 차원에서 화장을 입법화하 였다. 이처럼 계몽주의 사상과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으 로 1800년에는 프랑스에서 화장이 공식적으로 허용되었 으며, 마침내 전 유럽에 급속하게 퍼졌다. 1869년 나폴리에서 개최된 국제 프리메이슨 회의(Der internationale Freimaurer kongress)는 그리스도교의 부활 신앙을 부정하 고 교회에 반대하는 수단으로 화장을 권장하기로 결정하였다. 영국의 빅토리아(1837~1901) 여왕의 주치의로서 《화장 : 육신의 사후 처리》(Cremation : The Treatment of the Body After Death, 1874)를 출판한 톰슨(Henry Thompson)은 영국 화장 협회(Cremation Society of England)를 설립하여 화장 관습의 확산에 기여하였으며, 유럽 사회에서 화장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일조하였다. 미국에서도 1876년 펜실베니아 주의 워싱턴 시 외곽에 최초의 화장장이 세워졌고, 1913년에는 미국 화장 연합회가 결성되었다. 독일에서는 1878년 최초의 화장장이 고타(Gotha)에 세워졌고, 1934년에는 화장과 매장을 법적으로 동등한 장례 절차로 선포하는 화장에 관한 법률 을 제정하여 사람들이 합법적으로 화장을 선택할 수 있 는 길을 열어 주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도 1905년 화장을 찬성하는 자유 사상가 연합(Der Verein der Freidenker fuer Feuerbestattung)을 창립하여 화장을 선전하였다. 〔현 황〕 고대에는 나무를 쌓아서 단을 만들고 그 위에 시신을 올려 놓고 화장을 하였으나, 현대에는 화석 연료 와 기술 발전에 힘입어 새로운 방법으로 대체되었다. 즉 화장용으로 제작된 작은 화장로에 시신을 넣고 섭씨 800~1,300도의 강한 열과 불로 태우는 것이다. 남은 뼛조각은 가루로 빻아 산골(散骨)하거나 납골함에 넣어 납골당에 안치, 또는 매장한다. 2000년 현재, 미국인의 약 26%와 캐나다인의 45%가 화장을 선택하였으며, 영 국을 비롯한 유럽과 아시아에서도 화장을 적극적으로 시 행 · 보급하여 현재 영국은 70%, 덴마크는 67%의 화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일본은 유교의 영향으로 19세기 말에는 화장이 법률로 금지되었지만, 지금은 화장률 98.5%로 세계 1위의 화장 국가이다. 한편 가톨릭 전통 이 강한 나라들에서는 여전히 화장률이 낮은 편이다. 예 를 들면 1994년 현재 이탈리아의 화장률은 2%, 스페인은 4.2%이다. 한국의 경우 2001년 국민 의식 조사 결과 본인 사망 시 화장을 선호한다는 응답이 69%였으며 천주교 신자들 또한 매장 57%, 화장 42.9%로, 매년 화장 을 선호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가톨릭 교회의 입장〕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 : 가톨릭 교회의 장례 예절은 성서와 교회의 오랜 역사에 바탕을 두고 있다. 구약성서는 화장을 명시적으로 금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화장은 단지 하나의 예외적인 장례 방식일 뿐이고, 또한 범죄에 대한 처벌 형태로 언급되기도 한다 (창세 38, 24 ; 레위 20, 14 , 21, 9 ; 여호 7, 25 ; 판관 14, 15 ; 15, 6 ; 1열왕 13, 2). 즉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화장은 불명예스러운 것이었던 반면, 매장이 정상적이고 창조주의 뜻에 맞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암시되고 있다 (집회 17, 1 ; 40, 1. 11 ; 41, 10). 신약성서에도 매장을 통한 장례 방식이 일반적으로 거론된다. 라자로(요한 11, 1-44)와 예수(마태 27, 59-60)도 매장되었으며, 비록 죄 를 지었지만 하나니아스와 그의 아내 사피라도 매장되었다(사도 5, 6. 10). 초대 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당시 로마 제국에서 유행하던 화장 방식을 따르지 않고 매장을 택한 것은, 이교 도들의 화장 문화보다 유대-성서적 매장 전통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땅에 묻음으로써 장례식을 예수의 죽음과 무덤에 묻힘, 그리고 부활의 신비에 연 결시켜서 그 신비에 참여하는 길로 보았기 때문이다. 로마의 카타콤바 유적들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간직하였 던 부활 신앙의 전통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이처럼 그리 스도교의 전통은 육신의 부활에 대한 믿음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신비체의 지체를 이루는 신자들에 대한 존경심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자 죽은 사람을 땅에 묻었고, 이는 교회의 장례식으로 이어져 왔다. 따라서 전통적인 가톨릭 교회의 장례는 죽은 이의 시신을 땅에 묻는 매장이다. 이는 그리스도교적인 의미에서 시신에 대한 예우이고, 죽은 사람에 대한 존경의 표시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육체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고 이 세상에서 영원 한 생명을 준비하는 몸이며, 세례성사로 축성된 성령의 궁전이라는 그리스도교적 기본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유물론적 세계관에 따라 그리스도교 신앙과 영 혼의 불멸성, 죽은 이들의 부활을 부인하는 등의 반교회 적인 동기에서 화장을 주장하고 보급하는 움직임에 대해 가톨릭 교회의 입장은 확고하였다. 비록 그들이 공공의 위생과 땅의 보호라는 명목을 내세웠지만 교회는 그들을 마르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유물론자로 규정하고, 화 장을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장례인 매장과 모순되는 것으 로 보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1886년에 교황청은 가톨릭 신자들이 화장 협회에 가입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명시 적으로 장례를 화장으로 치르지 못하도록 하였다. 1917 년에 공포된 교회법전은 신자들에게 화장을 금하고 (1203조 1항), 유가족들이 죽은 이의 화장 유언을 따르는 것도 금지하였으며(1203조 2항), 화장된 시신의 교회 장 례도 금하였다(1240조 1항 5호). 이 교회법 조항으로 인 해 화장은 교리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교회가 화장을 반대하고 금지한 이유는 신앙 교리에 위배되어서가 아니라 화장을 주장하던 자들의 의도, 곧 육신의 부활을 부정하는 것을 반대하기 위해서였다. 이후에도 교황청은 1926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화장 금지의 입장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차츰 반종교적이고 반교회적인 의미보다는 위생적이거나 사회적 · 경제적인 동기, 또는 심미적이거나 실용적인 이유로 화장하는 경우가 일반화됨에 따라, 1963년 7월 5일 교황청은 화장에 대한 원칙적인 금지 입장을 철회하였다. 또한 그리스도교가 전파된 각 문화 속에 있는 다양한 장례 풍습을 살펴보고 화장이 각 문화 안에서 긍정적인 요소 또한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1983년 선포된 교회법전에서는 매장을 우선적으로 권장하면서도 화장 자체를 금지하지는 않았다. "교회는 죽은 이들의 몸을 땅에 묻는 경건한 관습을 보존하기를 간곡히 권장한다. 그러나 화장을 금지하지 아니한다. 다만 그리스도교의 교리에 반대하는 이유들 때문에 선택 하였다면 그러하지 아니하다"(교회법 1176조 3항). "육신 부활의 신앙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교회는 화장을 허락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301항). 따라서 그리스도교를 반대하는 이유에서 화장을 선택하고 죽기 전까지 뉘우치지 않은 사람의 경우는, 비록 현실적으로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쉽지 않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회 장례를 치를 수 없다(교회법 1184조 1항 2호). 또한 가 톨릭 교회사 신자들의 화장이 허락되기는 하였지만 적극적인 권장 사항은 아니다. 기본적이고 원칙적인 교회의 장례법이 매장임에는 변함이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땅에 묻히시기를 원하셨으므로 신자들의 시체를 매장하는 것을 화장보다 더 중요시한다는 사실을 드러내 야 하며, 신자들 편에서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악한 표양이 되게 해서는 아니된다" (《장례 예식서》 15항). 이 점은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 <전례 의안>에도 잘 드러나 있다. "장사는 그리스도의 모범과 교회의 오 랜 전통 및 우리 고유의 풍습을 따라 시신을 땅에 묻는 매장으로 함이 원칙이다. 그러나 특수한 경우에는 화장도 허용될 수 있다"(161항). "장사는 매장으로 함이 원칙 이나 화장 또는 기타 방법도 허용될 수 있다" (《한국 천주 교 사목 지침서》 130조). 화장과 부활 신앙 : 그리스도교 신앙은 육신의 부활을 고백한다. 그런데 화장은 시신을 재로 만들기 때문에 육신의 부활이라는 신앙 고백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초대 교회의 박해자들은 육신의 부활을 막기 위해서 신자들을 처형하여 화장을 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이야기하는 육신의 부활 신앙은 '시체의 소생' 이 아니다. '마지막 날에' (요한 6, 39-40. 44. 54 ; 11, 24) 결정적으로 이루어질 부활은 예수의 부활과 같은 모습일 것이다(1요한 3, 2). 예수는 틀림없이 육신을 지니고 부활하였다(루가 24, 39).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육신을 지니고 부활할 것이다. 그러나 그 육신은 '영적인 몸' 으로,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상 으로 변화될 것이다(1고린 15, 42-44 ; 《가톨릭 교회 교리 서》 999항 참조). 이처럼 육신의 부활은 부활한 예수와 마찬가지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새로운 차원이다. 이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린 하느님이 성령으로 인간의 죽은 몸까지도 살려 줌으로써 가능한 일이다(로마 8, 11). 시신을 매장하거나 화장하거나, 일정 한 시간이 지나면 육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죽음의 형태와 장례의 형태는 육신의 부활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육신의 부활은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 행위인 것이다. (↔ 매장 ; → 납골장 ; 장례 미사 ; 카타콤바) ※ 참고문헌  E. Güthoff R. Kaczynski · K. Baumgartner, 《LThK》 3, 1995, pp. 1265~1268/ R. Ruther, 《NCE》 4, 2003, pp. 358~360/ (RGG) 1, pp. 1366~1370 ; 3, pp. 107~109/ Lexikon der Bioethik, Bd.1, Guetersloh, 1998, pp. 338~341/ 정진석, 《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 해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주교회의 교리교육위 원회,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3. 〔柳京村〕 ② 종교학에서의 화장 〔힌두교에서의 화장 원형〕 화장은 특히 인도에서 옛부 터 행해져 내려오는 장례법으로서, 그 기원은 《리그 베다》(Rigveda) 시대(기원전 2000~800)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는 시신을 불〔火〕의 신인 아그니(Agni)에게 공물(供物)로 바치고 죽은 자의 혼을 제화(祭火)와 함께 천계(天界)로 인도한다는 관념과 목적 아래 화장이 행해졌다. 여러 베다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화장 순서는 대략 다음과 같다. 먼저 시신을 장엄한다. 이때 죽은 자를 삭발하고 물로 깨끗하게 씻긴 후, 옷을 입히고 백단(白檀)과 화환 등으 로 장식한다. 둘째, 시신을 화장장까지 운반한다. 이때 제화, 제구(祭具), 시신, 상주(喪主)의 순서로 행렬을 지 어 재장(齋場)까지 나아간다. 시신은 짐수레나 간편한 상여 등에 실어 나르고, 상주들 중에는 연장자가 앞에 선다. 셋째, 장작더미를 준비한다. 다비(茶毘, dahana)에 적합한 평평한 장소를 선택하여, 그곳을 나뭇가지로 청소하고 장작더미를 남쪽 방향으로 쌓는다. 시신을 똑바로 눕히고 입과 눈 등의 구멍에는 황금이나 타락(駝酪) 등을 넣는다. 넷째, 다비를 행한다. 주문(呪文, mantra) 을 외우면서 불을 붙이고, 불길이 솟아오르면 뒤를 돌아 보지 않고 여성과 연소자를 선두로 집으로 돌아와 목욕을 하고 헌수(獻水)를 한다. 다섯째, 유골(遺骨)을 수습 한다. 다비 4일째가 되면 우유나 물을 뿌려 유골을 식힌 후, 머리 또는 발 끝부터 순서대로 수습하여 골호(骨壺) 에 넣고 땅에 묻는다. 여섯째, 묘지에 표시를 한다. 일단 땅에 묻어 놓은 골호를 꺼내어 다른 땅에 매장하고 그 위에 흙덩이 또는 연와(煉瓦)를 쌓는다. 일곱째, 부정(不 淨)을 소거한다. 사자(死者)와의 접촉으로 생긴 오염을 지워 버리기 위해 매장지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의 발자취를 없애고, 돌이나 나무로 된 방호물을 설치하여 매장지와 집을 차단시키고 사자와의 영원한 이별을 명백한 사실로 확정한다. 이와 같은 베다 시대의 화장법이 오늘날과는 다르기는 하지만, 화장의 원형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재 힌두교인들은 특히 거룩한 도시라고 여기는 바라나시(Vārānasi)에서 화장되기를 바라고 있으며, 그러한 이유로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변에는 장작더미를 쌓는 콘크리트 또는 대리석으로 된 화장단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화장 후에 유해는 갠지스 강에 뿌려진다. 〔한국 불교에서의 화장 〕 전래 및 변화 : 우리 나라에서 화장이 시작된 것은 삼국 시대에 불교가 전래되면서부터 인 것으로 추정된다. 문무왕(文武王, 661~681), 효성왕 (孝成王, 737~742), 선덕왕(宣德王, 780~785), 원성왕 (元聖王, 785~798) 등의 화장에 관한 기록과, 그 시대의 화장 골호가 이를 증명해 준다. 고려 시대에는 불교가 번성함에 따라 화장이 더욱 성행하였으며, 불교에서 화장을 칭하는 '다비' 는 많은 불교적 함의를 지니게 되었고, 특히 다비 후에 수습한 사리(舍利)는 불교적 수행의 결정체 로서 신성시되었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매장을 중심으로 한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장례법이 권장되면서 화장은 점점 사라지고 매장이 대세를 이루었다. 1912년에 일제는 <묘지 · 화장 · 화장장에 관한 취체 규칙>을 발표하고 이에 의거해 화장을 강요하였으나 매 장의 풍습을 바꾸는 데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 유교적인 효와 조상 숭배의 관념, 그리고 풍수 지리설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인구의 증가와 개발 정책 그리고 매장 문화로 인한 국토의 훼손과 묘지화의 문제로, 화장이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공공 화장터에서 간소하게 치러지지만, 스님들의 화장은 전통적 인 다비 의식에 따라 노천에서 장중하게 행해진다. 다비 의식 관련 문헌 : 오늘날 한국 불교계의 다비 의식은 대개 조선 후기(18세기)에 정비된 <다비문>(茶毘 文)에 의거하여 시행되는데, 효(孝)와 예(禮)를 중시하던 조선 시대의 시대적 요구가 어느 정도 반영된 듯 그 절차와 형식이 다소 장황하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다비 의식 관련 문헌은 조선 시대 세종(世宗, 1418~1450) 때에 간행된 《다비작 법》(茶毘作法)이다. 그 후 인간(印刊)된 《권공제반문》 (勸供諸般文)에도 <시다림작법>(屍多林作法)이라는 다 비문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는 이미 오늘날과 똑같은 내용과 절차로 다비법이 배열되어 있으나, 발인 의식에 해당하는 〈기감편〉(起篇)까지만 있고 본 의식에 해당 하는 <다비편>이 빠져 있다. 다비 의식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인지하고 그것을 독립된 형태의 의식집으로 재구성 한 사람은 조선 후기의 스님 나암 진일(懶菴 眞一)이다. 그는 스승인 벽암 각성(碧巖 覺性, 1575~1660)이 편찬한 《석문상의초》(釋門喪儀抄)를 기초로 하여 다비 절차를 보완하고 필요한 명정(名旌)의 서식과 오복도(五服圖) 를 추가하여, 승가(僧家) 상례의 규범이 되는 《석문가례 초》(釋門家禮抄)를 완성하였다. 상 · 하 2편으로 구성된 《석문가례초》는 상례의 절차를 체계적으로 잘 정리하였지만, 다비의 준비 과정에 관한 의례문(儀禮文)과 마지 막 산골(散骨)에 관한 의식문이 빠져 있다. 그러나 이듬 해에 지선 장로가 편찬한 《오종범음집》(五種梵音集)의 부록인 (다비송종규식)(茶毘送终規式)에는 다비 의식이 누락 없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후 1670년, 허백당 명조(虛白堂 明照, 1593~1661)가 정리한 《승가예의문》 (僧家禮儀文)에 제자인 의암(義巖)이 <다비작법문>(茶 毘作法文)을 부록으로 붙여 간행함으로써 다비에 관한 절차와 의례문은 비로소 완성되었다. 오늘날의 다비 의식문은 대부분이 《승가예의문》의 <다비작법문>을 기초로 수정 · 보완된 것이라 볼 수 있다. 특히 조선 후기에 선(禪)과 관련하여 많은 저술을 남긴 백파 긍선(白坡 亘璇, 1767~1852)은 의식집 《작법귀감》(作法龜鑑)에 함께 실은 <다비작법> 의식문 위에 방점을 찍어 장단을 표시함으로써 창송에 곡조를 붙였을 뿐만 아니라 미비한 부분을 보완하였다. 그 후 《다비작법》이 판각된 것을 계기로, 각기 다른 판본의 다비 의식 문이 여러 차례에 걸쳐 간행되었다. 이러한 다비문들을 종합하고 재정리하여 편찬한 것이 오늘날 의식문의 규범 으로 삼고 있는 《석문의범》(釋門儀範) 가운데 실려 있는 <다비문>이다. 다비문 : 다비 의식문의 가장 큰 특징은 선적(禪的) 요소가 많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조선의 불교가 임제종(臨濟宗)의 정맥을 이어받은 선종(禪宗)의 전통이 강하기 때문이다. 다비는 이러한 출가 수행자를 의식의 주대상으로 삼고 있기에, 교학적 내용보다는 선적 내용이 더 어울렸을 것이다. 다비문의 내용을 개괄해 보면, 다비 의식에 해탈이라는 궁극적 목표로 나아가는 불교적 의미를 부여함으로 써, 죽음을 삶과 같은 하나의 수행 과정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다비 의식은 크게 준비 의식과 본 의식으로 구분된다. 준비 의식은 머리를 깎는 삭발, 몸을 깨끗이 하는 <목 욕 · 세수(洗手) · 세족(洗足) 편>과 새 옷을 입히고 관을 씌우는 <착군(着裙) · 착의(着衣) · 착관(着冠) 편>, 영가 (靈駕)를 바르고 편안한 자리로 모시는 <정좌(正坐) · 안 좌(安坐) 편>, 입관 의식인 <입감(入龕) 편>, 발인 의식 인 <기감(起龕) 편>으로 구성된다. 본 의식은 화장 의식 인 <거화(擧火) · 하화(下火) 편>과 유골을 수습하여 처 리하는 <기골(起骨) · 습골(拾骨) · 쇄골(碎骨) · 산골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절차에 따른 형식상의 분류이고, 내용면에서는 끊임없이 정진하여 번뇌를 끊고 해탈과 열반에 이르는 수행의 도정(道程)을 나 타낸다. 준비 의식은 수도를 주제로 하며, 본 의식 가운데 <거화 · 하화 편>은 열반을, <습골 · 쇄골 · 산골 편>은 회향(廻向)을 중심 내용으로 하고 있다. 다비문은 전체적으로 선가의 게송(偈頌)을 중심으로 한 선적 의미와 삭발 · 세수 · 거화 · 하화 등의 상징적 의식을 결합하여 하나의 독자적인 체계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번뇌의 단 멸이라든가 금강(金剛)의 몸, 또는 쌍림(雙林)의 열반, 무상(無常) · 고(苦) · 공(空) 등의 내용에서 보는 것처럼 교학적 요소가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다. 이처럼 다비문은 승가에서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그 사상적 깊이를 더해 온 것이다. 다비 절차와 방식 : 다비문의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사람이 숨을 거두면 먼저 종을 세 번 울린다. 그리고 사잣밥을 지어 상에 차려 놓고 입관하기 전에 삭발과 목욕을 시킨다. 시신을 관에 넣은 후에는 제물을 차려 놓고 왼쪽에는 고인의 초상화나 사진[影子] 을 걸고 단(壇)을 만들어 향과 꽃, 촛불을 올린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고인의 성명과 직위 등을 쓴 깃발인 명정 (名旌)을 세운다. 그리고 아침 저녁으로 그 앞에서 제사 =를 올린다. 세 번의 우렁찬 종소리와 함께 시작된 발인 의식은 범 패에 능한 어산(魚山)이 바라를 치며 영축게(靈鷲偈)를 외고, 절차에 따라 염불과 무상계게(無常戒渴)의 순서로 진행된다. 그리고 운구 의식이 이어진다. 거감례(擧龕 禮)를 마치고 어산이 '나무아미타불' 을 외면 대중이 함께 염불을 계속하면서 영구가 움직이는 것이다. 이때 긴 행렬이 뒤따르는데, 여기에는 원불탱(願佛幀), 인로왕번 (引路王幡), 만장(輓章), 명정, 향정자(香亭子, 향로를 담아 들고 다니도록 만든 정자 모양의 초롱) 등이 포함된다. 중도에 노제(路祭)를 지내고, 다비장(茶毘場)에 도착하면 차일을 친 후 원불탱은 단을 만들어 걸어 놓고, 영자(影 子)는 그보다 낮은 단에 걸어 놓는다. 또 명정을 세우고 향과 촛불을 밝힌 뒤 다비를 준비한다. 먼저 적당한 땅을 선택하여 평평하게 고르고 대(臺)를 만들어 그 중앙에 약 1미터 길이로 구덩이를 판다. 그 안에 물그릇을 넣어 두는데 이것을 중방수(中方水)라고 한다. 중방수를 평평한 돌로 덮고 흙으로 메운 다음 그 위에 장작을 쌓는다. 영구(靈柩)를 들어 장작 위에 얹고 제를 올린 후 법사와 대중이 함께 '나무아미타불' 을 열 번 외우고 다시 관 위에 장작과 섶을 쌓는다. 이와 같이 화장 준비가 모두 끝나면 오방기(五方旗)를 세운다. 장작 더미 맨 위에 황색 번(幡)을 꽂고, 그곳에서 일곱 걸음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아 푸른색 번은 동방에, 붉은 색 번은 남방에, 흰색 번은 서방에, 검정색 번은 북방에 세 운다. 이 사방기 앞에도 각각 물그릇을 놓은 뒤, 이제 귀의하는 영가를 맞이하고 인도하여 주도록 오방불(五方 佛)에게 창송한다. 송이 끝나고 법사가 거화에 즈음한 착어(着語, 원래는 公案에 대한 짤막한 평이나 여기서는 영가에 대한 설법)를 하면 다섯 사람이 오방에서 관이 안치된 장작더미에 불붙일 준비를 끝내고 다 같이 선다. 법사가 다시 하화 착어를 마치면 곧바로 오방에서 불을 붙인다. 법사와 십인(十人)이 함께 행원품(行願品)을 외우면 하화가 이루어지고, 그와 동시에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는다. 새벽녘이 되면 불길은 모두 사라지고 한 줌의 재만 남게 된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전통적인 방법에 의해 다비가 행해 지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약간 개선된 방식을 따른다. 먼저 다비장을 정하여 땅을 평평하게 고르고 철골로 1미터 정도 높이의 철단을 만든다. 단 위에 다시 널판으로 빈 관을 만들어 영구를 넣을 수 있도록 하고 그 위에 준비된 참나무 장작을 차곡차곡 쌓는다. 그것을 원통형이 되게 이엉으로 엮은 뒤 흰 광목으로 둘러 묶고 다시 베 위에 연꽃잎을 장식하여, 화장을 위한 장작더미 를 거대한 연꽃송이로 만든다. 그래서 이것을 연화대(蓮 花臺)라고 한다. 이 연화대로 영구를 운반하고 이엉을 다시 정리한 다음 밖에 남겨 놓은 장작을 한 겹 더 둘러 세운다. 이엉 위에 기름을 끼얹고 장례를 지휘하는 주승 (住僧)과 제자들이 불을 붙인 불방망이를 준비하고 있다가 거화 및 하화 의식이 끝나면 마침내 연화에 점화한다. 이렇게 하여 화장이 다 끝나면 남은 숯과 재를 헤치고 유골과 사리를 거두어 깨끗이 한 뒤 유골은 가루로 부수어 산천에 뿌리고 사리는 부도에 안치한다. 뼈를 부수어 뿌리는 것 역시 복잡하고 엄격한 절차와 형식에 따라야 한다. 《석문가례초》에는 다음과 같은 쇄골법(碎骨法)이 소개되고 있다. "화장 사흘 후에 나무젓가락과 주머니를 가지고 화장터에 가 젓가락으로 뼈를 주워 주머니에 담 는다. 절구통처럼 만든, 준비된 발우에 그 뼈를 두 그릇 정도로 나누어 담는다. 나무로 절굿공이를 만들고 참기름 3되, 백탄 3말, 화장한 재 3숟가락, 초석(草席)자리 1장 등을 준비하여 산봉우리에 올라가 반석 위에 올려 놓는다. 나무젓가락으로 뼈를 집어 향탕수에 씻은 뒤, 그 것을 다시 백탄 위에 올려 놓고 태운다. 이때 왕생게(往 生偈)를 외우고 뼈를 발우에 담은 뒤 절굿공이로 빻아 가루를 만든다. 참기름 3되에 뼛가루를 붓고 띠〔茅〕로 만든 솔을 사용하여 그것을 초석자리 위에 바른다. 그 초석을 다시 돌 위에 세워놓고 불태운 후, 그 재를 사방에 흩뿌린다. 그 다음에 미리 준비한 화장한 재 3숟가락을 물에다 섞어 뼛가루와 반죽하여 콩 만하게 환(丸)을 만 들고, 그것을 들고 연못으로 가 맑은 물 속에 던져 물고 기들에게 보시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쇄골을 하면 나중에 다시 수륙재(水陸齋)를 지내지 않아도 된다. 이러한 다비 의식은 그 전 과정을 언제나 엄숙하고 법 식에 맞도록 행해야 한다. 《석문가례초》는 "다비 의례가 처음부터 끝까지 법에 맞게 시행되면 영가는 그 육신이 불타는 가운데에서도 색신(色身)이 본래 공(空)한 이치 를 깨달아, 불길에도 놀라지 않으며 몸과 마음이 편안하 고 고요하여 바로 극락 세계로 들어갈 뿐만 아니라 재 (齋)를 올리는 사람도 그 복덕이 한량 없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법식에 맞지 않으면 불 속을 뛰쳐나와 물에 뛰어든 영가가 물귀신의 보(報)를 받게 되고, 재를 올린 사람에게도 공덕은커녕 오히려 재앙만 있게 된다고 한다. 이러한 다비 의식이나 절차는 시대에 맞게 생략되고 더해지면서 현재에 이른 것이다. 의미 : 다비 의식에 담긴 불교적 정신과 의미는 예나 지금이나 같다. 먼저 '삭발' 의 의미는, 불교에서 머리카 락을 무명초(無明草)라고 부르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생사와 고통의 근본 원인인 무명(無明)을 끊어 버린다는 것이다. 무명을 끊게 되면 모든 번뇌와 고통에서 자 유로워질 것이다. '목욕' 은 미세한 번뇌의 때를 깨끗이 씻어 내고 청정한 부처의 경계를 얻으라는 의미이다. '세수' 는 집착의 손을 놓음으로써 열반의 언덕에 이르는 것을 뜻한다. '세족' 은 발을 깨끗이 씻음으로써 모든 행 (行)이 자유롭게 되어 십지(十地)의 정상을 단번에 오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착군' 은 속옷을 입혀 눈, 귀, 코, 혀, 몸, 뜻의 육근(六根)을 청정하게 지켜 방일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착의' 는 인욕을 뜻하는 것으로, 출가자가 참으로 조촐하고 보잘것없는 분소의(糞掃衣)를 입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 '착관' 은 삼매(三昧)에 드는 것을 의미하는데, 망자가 쓰는 관은 최상의 삼매를 상징한다. '정좌' 는 제불보살(諸佛菩薩)이 집으로 삼는 법공(法空) 의 자리에 앉음을 의미한다. '입감' 은 열반에 들어감, '기감' 은 성불(成佛)을 의미한다. '거화' 는 여래(如來) 의 삼매의 빛 즉 지혜 광명이 십방삼세(十方三世)를 비추는 것을 뜻하고, '하화' 는 육신을 땅 · 물 · 불 · 바람으로 다시 돌려보내고 고요하고 공한 열반의 세계로 돌아가니 그것이 참된 즐거움임을 뜻한다. '기골' · '습골' · '쇄골' . '산골' 등의 의식은 회향을 의미한다. 생사일여(生死一如),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불교에서는 근본적으로 삶과 죽음이 서로 대립하는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미혹한 중생들이 생과 사, 생사와 열반을 서로 다르게 보는 것이다. 따라서 화장은 모든 미혹의 바탕에 깔려 있는 무명의 티끌을 불사른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그리하여 다비식은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단순한 장례식이 아닌, 불교의 진리인 해탈과 열반을 깨우치게 하는 법석(法席)이 되는 것이다. (→ 불교 ; 사리 ; 열반) ※ 참고문헌  釋眞一 編, 〈釋門家禮抄〉, 《韓國佛敎全書》 권8, 동국대학교출판부, 1987/ 釋亘璇, 〈茶毘說〉, 《韓國佛敎全書》 권 12, 동국대학교출판부, 1996/ 高崎直道 등 편, 《佛敎イ ソ ド思想辭典》, 春秋社, 1987/ 박경준, 《다비와 사리》, 대원사, 2001/ 김영태, <불설상(佛說上)의 다비 제도(茶毘制度)와 그 역사성>, 《다보》 창간호, 1992. 〔朴京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