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일신 (1751~1792)

權日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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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서신을 쓰고 있는 권일신(탁희성 작)과 그의 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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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서신을 쓰고 있는 권일신(탁희성 작)과 그의 친필.


한국 천주교회 창설자 중의 한 사람. 조선 후기의 학 자.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본관은 안동. 자는 성오(省吾). 호는 이암(移菴). 숙종 때 이조 참판과 대사 성을 지낸 흠(歆)의 증손이며, 암(巖, 호는 尸菴)의 차남. 조선 후기 성호학파(星湖學派)의 한 사람으로 이름있던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은 그의 형이다. 그의 집안 은 1694년(숙종 20)의 갑술 옥사(甲戌獄事)로 증조부인 흠이 양근(楊根) 땅 감호(鑒湖, 현 경기도 양평군 江上面 大 石里)로 낙향한 이후 대대로 이곳에 살게 되었지만, 남인 가문과 통혼 관계를 유지하면서 꾸준히 가학을 이어나갔 다. 성장한 뒤 형과 함께 이익(李潔)에게 사사하였고, 훗 날 실학자 안정복(安鼎福)의 문인으로 들어가 그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가 종래의 학문에서 벗어나 양명학(陽明 學)이나 서학(西學)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780년 무렵이었는데, 여기에는 형인 철신과 지우인 이벽(李檗, 요한),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정약전(丁若銓) · 약용 (若鏞) 형제 등의 영향이 컸다. 1784년(정조 8)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 하자 그는 이벽의 권유를 받아들여 즉시 천주교 서적을 탐독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해 9월(음), 수표교(水 標橋) 인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으로부터 세례 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으며, 즉시 열렬한 천주교 신 자가 되어 내포(內浦) 출신으로 형의 제자였던 이존창 (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 전주 출신의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에게 천주교를 전함으로써 충청도와 전라 도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1785년 명례방(明禮坊, 현 명동) 김범우(金範禹, 토마 스)의 집에서 있은 천주교 집회에 아들 상문과 함께 참 석하였다가 형조의 사령들에게 발각되어 형조로 압송되 었다. 이때 중인 출신 김범우만이 형조에 투옥되고 나머 지는 석방되자, 그는 아들과 이윤하(李潤夏) · 이총억(李 寵億) · 정섭(鄭涉) 등과 함께 형조 판서에게 나아가 성 상(聖像)을 돌려주고 김범우와 함께 처벌해 달라고 하였 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을사년의 추조 적발 사건 (秋曹摘發事件)으로 김범우는 유배형을 받고, 천주교 지 도층 몇몇이 교회를 멀리하게 되었다. 이에 일신은 조동 섬(趙東暹, 유스티노)과 함께 양근 이웃의 용문사(龍門 寺)에 들어가 8일 간 머무르면서 신앙을 더욱 두텁게 하 였다. 그리고 이듬해 비판의 소리가 가라앉고, 이승훈이 다시 교회로 돌아오자 이존창 · 유항검 · 최창현(崔昌顯, 요한) 등과 함께 한국 교회의 터전을 견고히 하려는 목 적에서 가성직 제도(假聖職制度)를 수립하였다. 이때 그 는 동료들과 함께 신부가 되어 고해성사와 견진성사를 집전하였다. 가성직 제도는 약 2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 러다가 유항검이 교회 서적을 읽던 중 이러한 행위가 독 성죄(瀆聖罪)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자 그들 은 즉시 성사를 중단하고, 북경의 구베아(Gouvea, 蕩士 選) 주교에게 밀사를 보내 이를 문의하게 되었다. 당시 밀사로는 권철신의 제자인 윤유일(尹有一, 바오로)이 선 택되어 1789년 말과 1790년 가을 두 차례에 걸쳐 북경 을 왕래하게 되었으며, 권일신은 첫번째 파견 때 북경으 로 서한을 보낸 적이 있었다. 윤유일이 두번째 파견 때 북경의 구베아 주교로부터 받아 온 미신과 조상 숭배에 대한 금령 즉 '조상 제사 금 지령' 은 일부 신자들로 하여금 교회를 떠나도록 하였고, 1791년에 일어난 진산 사건(珍山事件)의 직접적인 원인 이 되었다. 그 결과 이 사건의 주역이던 윤지충(尹持忠, 바오로)과 권상연(權尙然, 야고보)이 참수당하는 신해박 해(辛亥迫害)가 일어나자 공서파(攻西派)의 목만중(睦 萬中) · 목인규(睦仁圭) 등은 통문을 돌려 권일신을 천주 교의 교주(敎主)로 지목하였고, 홍낙안(洪樂安)이 이를 고발함으로써 11월 28일(음 11월 3일)에 체포되었다. 그 는 형조에서 여러 차례 형벌과 신문을 받았으나 굴복하 지 않고 신앙을 지켰으며, 12월 3일 위리안치(圍籬安 置) 판결을 받고 제주도로 유배되는 몸이 되었다. 제주 목사는 그를 매월 두 번씩 신문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때 권일신이 사형을 받지 않은 것은 남인들에게 호의를 갖 고 있던 정조(正祖) 덕택이었는데, 정조는 이에 앞서 그 를 회유해 보도록 유시한 적이 있었다. 유배지로 떠나기 에 앞서 그가 10일 동안 말미를 얻어 노모인 풍산 홍씨 (豊山洪氏)를 만날 수 있게 된 것도 이 회유책과 관련이 있다. 실제로 일신은 노모를 만나 본 뒤 회오문(悔悟文) 을 지어 바치면서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칭하였고, 그 결과 유배지가 제주도에서 예산(禮山)으로 변경되었 다. 그러나 예산으로 가던 도중 형벌로 얻은 상처로 인해 1792년 봄에 사망하였다. (→ 가성직 제도 ; 권상문 ; 권철신 ; 한국 천주교회)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上/ 《正祖實錄》/ 《日 省錄》/ <帛書>/ <鹿菴權哲身墓誌銘〉, 《與猶堂全書》 제1집 권15/ 李晚采, 《闢衛編》/ Andreas Choi, L'Erection du premier Vicariat Apostolique et les origines du Catholicisme en Corée, Suisse, 1961 /車基眞, <鹿菴 權哲身의 학문과 西 學>, 《清溪史學》 제10집, 1993.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