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동 본당
黃金洞本堂
글자 크기
12권

1 / 3
황금동 성당 봉헌식 기념( 1936. 5. 21).
① 대구대교구 소속 본당. 경북 김천시 황금동 76-18소재. 1901년 4월 27일 가실 본당에서 분리 설정되었으며, 주보는 예수 성심. 관할 구역은 김천시 황금동 · 모암동 · 용호동 · 양천동 전역과 성내동 · 남산동 · 구성면 ·조마면 일부 지역. [교 세] 1901년 1,024명, 1910년 1,720명, 1965년 3,650명, 1970년 2,028명, 1975년 2,316명, 1980년 2,180명, 1985년 2,693명, 1990년 3,758명, 1995년 4,310명, 2000년 3,738명, 2003년 2,922명. [역대 신부] 초대 김성학(金聖學) 알렉시오 (1901. 4~1911. 5), 2대 김문옥(金紋玉) 요셉(1911.5~1922. 9), 3대 이약슬(李若瑟) 요셉(1922. 9~1929. 5), 4대 김승연(金承淵) 아우구스티노(1929. 5~1945. 2), 5대 최재선(崔再善) 요한(1945. 5~1955. 5), 6대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1955. 5~1956. 7), 7대 담(F. Damm, 卓世榮) 파비아노(1956. 7~1958. 10), 8대 정환국(鄭桓國) 알로이시오(1958. 10~1960. 3), 9대 이경우(李慶雨) 가브리엘(1960. 3~1961. 4), 10대 김남수(金南洙) 루가(1961. 4~1965. 2), 11대 최명화(崔命化) 베드로(1965. 2~1970.1), 12대 라스테르(S. Raster, 나현승) 스테파노(1970.7~1973. 2), 13대 노규채(盧奎彩) 아우구스티노(1973.2~1981. 2), 14대 이동식(李東植) 베네딕도(1981.2~1983. 6), 15대 이석진(李錫震) 그레고리오(1983.6~1984. 1), 16대 권혁시(權赫時) 모세(1984. 1~5), 17대 정인용(鄭仁溶) 바르톨로메오(1984. 5~1987. 6), 18대 이재수(李在壽) 시몬(1987. 6~1989. 6), 19대 이성도(李聖道) 안드레아(1989. 6~1992. 6), 20대 이상락(李尙洛) 바오로(1992. 6~1996. 8), 21대 최경환(崔敬煥) 프란치스코 사베리오(1996. 8~2000. 11), 22대 전재천(全在千) 암브로시오(2000. 11~2004. 8), 23대 한재상(韓在相) 요한(2004. 8~현재) .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가 발생하자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의 신자들 중 일부가 소백 산맥을 넘어 김천의 깊은 산골로 피신해 오면서 증산 장자터 · 먹방이 · 선무터 · 마잠 · 지대골 · 곤천이 · 부상 등지에 신자촌이 형성되었다. 이후 1894년 9월경에 가실 본당이 설정되자, 김천 지역의 신자들은 가실 본당의 관할 아래 신앙 생활을 이어갔다. 1898년 6월 가실 본당의 2대 주임으로 부임한 김성학 신부는 가실이 본당 자리로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 김천으로 거처를 옮기고자 하였다. 또한 당시 본당의 관할 구역이 너무 광범위하여 신부 한 사람이 사목하기에 어려운 점도 있었기에 뮈텔(G.-C.-M Mutel, 閔德孝) 주교에게 새 신부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 결과 1901년 4월 조아요(A. Joyau, 玉裕雅) 신부가 가실 본당으로 파견되자 김 신부는 김천에 본당을 신설하여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김 신부는 현 본당 소재지인 자라밭골에 초가 1 동 3칸짜리 가옥을 구입하여 이주한 후, 신자 자녀들에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나아가 선교의 효과를 얻기 위하여 1907년 3월 25일에 성당 구내에 성의학교(聖義學校, 여자부는 1911년 병설)를 개설하였다. 그리고 9월 10일에는 기와 1동의 새 성전을 마련하여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이후 1909년 6월 27일에 6칸의 한옥교사(校舍)를 마련하여 이듬해 7월경에 사립 천주교 성의학교로 인가받았다. 2대 주임 김문옥 신부는 매년 2회씩 인근 지역인 문경 · 상주 · 안동 지방을 방문하면서 새로운 성당을 마련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에 1922년 9월에 문경의 공평(현함창 본당의 전신) 본당과 상주의 퇴강(현 사벌 퇴강 준본당의 전신) 본당을 각각 분리시켰고, 동시에 공평 본당으로 전임되었다. 앞서 1918년에는 성의학교가 일제의 사립학교에 대한 통제 강화와 재정적인 어려움이 겹쳐 폐교되고 말았는데, 3대 주임 이약슬 신부가 학교를 부활시키고자 노력하여 1923년에 성의학원이란 이름으로 인가 를 받아 학교 운영을 다시 시작하였다. 4대 주임 김승연신부는 학교 건물과 성당이 노후되자 1930년에 학교 건물(현 교육관)을, 1934년 12월 23일에는 성당을 신축하였으며, 1936년 5월 21일에 성당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한편 1935년 6월에는 본당 관할의 마잠 공소가 지좌 본당으로 승격되었다가, 1945년 5월 이후에 사제가 파견되지 못하여 다시 김천 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 1956년 6월 14일자로 김천 본당의 관할권은 대구 대목구에서 왜관 감목 대리구로 이관되었다. 7대 주임 담신부는 본당 관할 구역이 방대할 뿐만 아니라 교세 역시 빠르게 증가하자 본당 분리를 계획하여, 평화동 406-1소재의 부지를 매입하고 1958년 10월에 평화동 본당을 분리시켰다. 이와 동시에 김천 본당은 행정 구역 명칭을 따라 '황금동 본당' 으로 본당명을 변경하였다. 10대 주임 김남수 신부는 공소 개발에 주력하여 지례(1963. 9) ·개령(1964) · 부항(1965) 공소 강당을 세워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본당 관할의 지례 공소와 지좌 공소는 이후 각각 지례 본당(1968. 11)과 지좌동 본당(1970. 8)으로 승격되어 분리되었다. 1984년에는 본당 관할권이 왜관 감목 대리구에서 대구대교구로 다시 이관되었다. 18대 주임 이재수 신부는 1989년 4월에 성당 제대 나무 십자가를 동판 십자가로 교체했으며, 교육관 시설을 보수하였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본당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새로운 성전 건립이 계획되어 1999년 2월 21일에 100주년 기념 성전의 기공식을 가진 뒤 이듬해 3월 31일에 공사를 완료하였다. 이후 5월 27일에는 김수환 추기경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이에 앞서 1996년 8월에 신음(현 대신) 본당을 분리시켰으며 2000년 11월에는 신룡 본당을 분리시켰다. 22대 주임 전재천 신부는 2001년 5월 27일에 본당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 추진위원회를 구성한 뒤 이듬해 5월 27일에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 행사를 성대히 거행하였다. 23대 주임 한재상 신부는 2004년 12월 10일 새 성전 종탑에 예수 성심상을 설치하였다. 현재 황금동 본당은 한재상 신부의 사목 아래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본당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지역 복음 전파에 매진하고 있다. (⇦ 김천 본당 ; → 대구대교구 ; 성의여자중 · 종합고등학교 ; 성의중 · 종합고등학교)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영남교회사연구소, 《옛 공소의 어제와 오늘》, 대구가톨릭대학교 부설 영남교회사연구소, 2000/ 천주교 대구대교구 교구사 편찬위원회, 《교구사연대표》, 천주교 대 구대 교구, 1984/ 천주교 대구대교구 편, 《교구총람》, 대구대 교구 홍보국, 1986/ 《성의 101년사》, 성의 중 · 고등학교, 2002. [白秉根] ② 대구대교구 소속 본당.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 890-1 소재. 1983년 2월 4일 범어동 본당에서 분리 설정되었으며, 주보는 예수 성심. 관할 구역은 황금동 · 중동 . 상동 · 지산동 · 두산동 일부 지역. 〔교 세〕 1983년 1,004명, 1985년 1,777명, 1990년 2,181명, 1995년 3,219명, 2000년 3,651명, 2003년 3,114명. 〔역대 신부〕 초대 유승렬(劉承烈) 바르톨로메오(1983. 2~1987.6), 2대 정인용(鄭仁溶) 바르톨로메오(1987. 6~1990. 6), 3대 소병욱(蘇秉昱) 프란치스코(1990. 6~1991. 6), 4대 최창호(崔昌浩) 야고보(1991. 6~1993. 10), 5대 정춘석(鄭春錫) 아우구스티노(1993. 10~1998. 8), 6대 원동수(元東秀) 바오로(1998. 8~2003. 2), 7대 정대식(鄭大植) 플로리아노(2003. 2~현재). 1981년 범어동 본당 관할 구역이던 황금동 80번지 일대에 주공 아파트가 건립되어 3,500세대가 입주하자, 교구에서는 늘어나는 지역 인구에 대한 선교 대책의 일환으로 이 지역에 본당 설립을 계획하였다. 그 결과 1983년 2월에 범어동 본당으로부터 황금동 본당이 분리 설정되었으며, 초대 주임으로 유승렬 신부가 부임하였다. 유 신부는 2월 10일에 임시 본당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2월 27일에 신자인 윤정태의 집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였으며, 3월 2일부터는 황금동 740-4번지의 지하실을 임차하여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이어 4월 10일 교구가 마련한 대지에 최종빈(당시 대안동 본당 사목회장)의 도움으로 성전 신축 공사를 시작하여 1984년 1월에 완공하였으며, 교육관과 수녀원이 완공되기를 기다렸다가 1985년 10월 13일에 이문희(李文熙, 바오로) 대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선교 활동에도 노력하여 1984년부터 매년 2~3회 전교의 달을 설정하여 예비자를 인도하였고, 결핵 요양원 · 양로원 · 희망원 등을 찾아 정성을 전달하는 등 불우 이웃 돕기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1985년 6월에는 본당 주보인 예수 성심의 상본을 가정마다 모셔 성심 공경에 노력하도록 하였다. 2대 주임 정인용 신부는 1987년 10월 26일에 성 김대건 본당을 분리하면서 주공 아파트 내 성동초등학교의 동쪽 구역을 새 본당에 이관하였다. 그리고 레지오 마리애 활동을 장려하여 천사들의 모후(1988. 4) · 의덕의 거울(1989. 7) 쁘레시디움을 조직하였고, 3대 주임 소병욱 신부도 신심 단체 활성화에 주력하여 데레사회 · 청년회(1990. 10) · 위령회(1990. 11) · 전례 봉사단(1991. 2) · 어린이 성가대(1991. 3) · 사도회(1991.4) 등을 창설하였다. 5대 주임 정춘석 신부는 1995년 3월부터 한 달 동안 성서 가훈 찾기 운동을 전개한 뒤 4월 16일에 성서 가훈 전시회를 개최하였고, 6대 주임 원동수 신부는 소공동체인 반 모임 참석과 복음 나누기, 그리고 재가 복지 활동 등의 사목 활동을 전개하였다. 2003년 2월에 7대 주임으로 부임한 정대식 신부는 '말씀과 성체로 일치를 이루자' 는 사목 지침 아래 ① 신자 재교육, ② 영성 생활, ③실천적인 신앙 생활 등을 역점 사업으로 정하여 이를 실천하기 위해 본당 신자들과 함께 전력을 다하고 있다. (→ 대구대교구) ※ 참고문헌 《가톨릭사전》 대구대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대구본당백년사》, 1986/ 천주교 대구대교구 편, 《교구총람》, 대구대교구 홍보국, 1986. [白秉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