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민성

黃时性(1923~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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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 제2대 대전교구장. 세례명은 베드로. 1923년 8 월 1일 경기도 고양군 지도면 행주리에서 황찬수(黃燦 秀, 빈천시오)와 최누시(루치아)의 2남 중 장남으로 출생. 수원교구 소속의 황익성(黃益性, 아우구스티노) 신부의 형이다. 1938년 동성상업고등학교 을조반에 입학하여 1942년에 졸업하고, 이듬해 9월 성신대학에 입학하여 1948년 6월에 졸업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프랑스 파리의 생 쉴피스(St. Sulpice) 신학대학 신학과에 입학하여, 대학원 신학과를 거쳐 1951년 3월 24일 사제 서품을 받고 6월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그리고 11월 부터 파리 대학 문학부에서 연구 활동을 수행하는 동시에 이듬해 11월에는 파리 가톨릭대학원 철학부에 입학 하였다. 1954년 6월 대학원을 졸업하며 파리 대학에서의 활동도 마쳤으며, 이듬해 9월부터 생 쉴피스 대학 교수 양성소에서 활동을 하다가 1956년 6월 철학 박사 학 위를 취득하고 11월에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12월부터 1964년 8월까지 서울 가톨릭대학 부교수 · 부학장(1958. 4) · 학장 서리(1960. 7) · 5대 학장(1961.2)을 역임하며 사제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며, 1956년 12월에는 서울교구 지성인 지도 신부, 1957년 3월부터는 서울대학교 문리대 강사직도 역임하였다. 1964년 8월 명동 본당 10대 주임으로 재임하던 중 1965년 3월 22일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에 의해 제2대 대전교구장에 임명되어(4월 3일자), 5월 31일 대 흥동 주교좌 성당에서 주교 서품식 및 교구장 착좌식을 거행하였다. 황민성 주교는 재임 중 예비자에게 직접 교리를 가르 치는 등 선교 활동에 가장 중점을 두었다. 그 결과 대전 교구장 부임 시 19개 본당, 2만여 명이었던 신자가 1983년 말에는 53개 본당, 8만 8천여 명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이후 강조된 평신도 사도직의 중요성을 인정하여 평신도의 조직화에 힘써, 1968년에 조직된 전국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의 초대 담당 주교직을 역임하였으며, 의료 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여 1969년 11월 대전 성모병원을 개원하였다. 1965년 주교 회의 정기 총회 결과 전국 그리스도교 재일치위원회(현 교회 일치와 종교 간 대화위원회)가 설립되 자 초대 위원장(1965. 7~1970. 10)에 선임되어 타 종파와의 관계 개선에 힘썼으며, 1968년에는 성서 공동 번역 을 위한 작업을 시작하였다. 또한 1970년 8월에 설립된 한국 정의 평화위원회(현 한국 천주교 정의 평화위원회)의 초대 총재로 선출되어 1973년 6월까지 총재직을 역임하였으며, 1974년 지학순(池學淳, 다니엘) 주교가 체포되자 정의 구현 사제단 주최로 개최된 제2차 전국 기도회에서 지주교의 석방과 인권 회복을 위한 강론을 하였다. 이 외에도 그는 대전교구 내 갈매못 · 해미 · 다락골 · 솔 뫼 성지 등의 성역화 작업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한국 가톨릭 농민회 총재로서 1981년 12월에는 대전시 성남 동에 한국 가톨릭 농민회관을 건축하여 소외된 농민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데 힘썼다. 1983년 10월 19일 사제 총회를 개최하던 중 고혈압으로 쓰러진 황 주교는 입원 중 위암이 발병하여 이듬해 2월 13일 오후 11시 8분경 대전 성모병원에서 62세로 선종하였다. 유해는 충남 대덕군 산내면 천주교 묘원에 안장되었다. (→ 대전교구)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가톨릭 시보> 1965년 4월 11일자/ <가톨릭신문> 1984년 2월 19일자. 〔洪延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