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철신 (1736~1801)

權哲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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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철신 · 일신 형제의 고향 양근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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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철신 · 일신 형제의 고향 양근 마을.


조선 후기 성호학파(星湖學派)의 학자요, 초기 천주교 신자의 한 사람. 세례명은 암브로시오. 본관은 안동. 자 는 기명(旣明). 호는 녹암(鹿菴). 당호는 감호(鑒湖). 권 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의 형. 권상문(權相 問, 세바스티아노)의 백부이자 양부. 경기도 양근(楊根) 의 감호(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권암(權巖)과 남양 홍씨(南陽洪氏)의 장남으로 태어나 죽을 때까지 이 곳에서 생활하였다. 〔가문과 학문 배경〕 여말 선초의 학자 권근(權近)의 후손인 그의 집안은 본래 기호 남인(畿湖南人)에 속해 있었고, 증조부인 권흠(權歆) 때까지는 사환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권흠이 1693년(숙종 19) 대사성에 오 른 이듬해 일어난 갑술 옥사(甲戌獄事)로 인해 관직을 잃고 양근 땅으로 낙향한 뒤 관직과 멀어지게 되었다. 그 러나 집안에서는 꾸준히 가학을 이어갔고, 남인 가문과 계속 혼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부친 권암은 경향 일 부에 이름이 있었는데, 그가 교류한 인물들은 윤동규(尹 東奎, 1695~1773), 이병휴(李秉休, 1710~1776), 안정복 (鼎福, 1712~1791), 홍유한(洪儒漢, 1726~1785) 등이었 다. 훗날 아우 권일신이 안정복의 딸과 혼인하게 된 배경 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권철신은 일찍부터 부친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24세 되던 1759년(영조 35) 성호 이익(李濞, 1681~1763)의 문 하에 출입하며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그는 퇴계 (退溪) 이황(李滉)과 백호(白湖) 윤휴(尹鐫)를 사숙하면 서 기호 남인계의 학자들과 폭 넓게 교류하여 점차 성호 학파의 거유로 지목을 받게 되었다. 당시 그의 학문에 영 향을 준 인물들로는 이병휴 · 안정복 · 윤동규 · 신후담 (愼後聃)과 홍유한 · 이기양(李基讓) · 한정운(韓鼎運)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이병휴는 1776년 사망할 때까지 권철신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후 권철신을 중심으 로 하는 이른바 녹암계(鹿菴系)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이익 · 이병휴가 사망한 다음이었는데, 이때 그의 문하에 들어간 인물들은 김원성(金源星) · 이총억(李寵億) · 이 존창(李存昌) · 홍낙민(洪樂敏) 등이었다. 그리고 이어 이승훈(李承薰), 정약전(丁若銓) · 약용(若鏞) 형제, 이 윤하(李潤夏) · 이벽(李檗) · 윤유일(尹有一)과 조카인 권상학(權相學)도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의 학문 성격은 무엇보다도 자득(自得), 즉 스스로 지식을 궁구하고, 허물을 찾는 데 있었다. 이러한 성향은 먼저 스스로 학문을 체득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었 지만, 한편으로는 현실 사회 · 경제의 개혁 의지를 표방 한 윤휴나 경전을 해석함에 있어 주자(朱子)의 학설을 그대로 추종하지 않던 스승 이익의 태도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그러므로 이병휴는 성호학파의 소장 학자들 가 운데서도 경전에 대한 자주적인 해석〔脫朱子學的〕을 추구 하는 권철신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제 자인 정약용은 "훗날 권철신이 윤휴의 설이 현실에 맞지 않는 점이 있음을 지적하면서도 현실 사회 · 경제의 개혁 의지를 표명한 그의 《만필》(漫筆) 1권에 대해서만은 탄 복했다" 고 하면서 그의 학문이 현실 개혁의 의지를 담고 있음〔實學的〕을 지적하였다. 〔학문의 특징〕 이와 같은 권철신의 성향은 학문 내용 에서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우선 그는 《시경》의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 국풍(國風)에 대한 의론을 가리켜 "정풍 (鄭風) · 위풍(衛風)은 음란한 것을 꾸짖는 시"라 하여 주자의 설과는 달리 자주적인 견해를 나타냈다. 또 《상 서》에 대해서도 일단 '위공본(僞孤) 25편은 위서' 라 단정하고, 《상서》 주서(周書)의 홍범구주(洪範九疇)에 대해 의문을 나타냈다. 그러므로 안정복은 이 같은 권철 신의 의견이 구양수(歐陽修)의 설과 마찬가지로 참람한 것이라 질책하면서 정주(程朱)의 뜻에 따를 것을 권고했 다. 다음으로 주자가 《맹자》의 4단을 논하면서 단서설 (端緒說)을 제시한 데 반해 권철신은 단수설(端首說)을 제시했다. 이는 맹자 자신이 제시한 단시설(端始說)에 근거한 것으로, 정약용이 훗날 이를 해석하면서 단시설 을 제시한 것은 권철신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 다. 뿐만 아니라 주자가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주로 이 (理)나 덕(德)으로 해석한 데 반해 권철신은 "인의예지 란 일을 행함에서 이루어진 말"이라 하여, 이를 성리학적 측면에서 해석하지 않고 실행의 바탕으로 삼고자 했다. 권철신은 또 《중용》의 처음과 끝을 군자와 천명의 관계로 연결지으면서 군자가 계신공구(戒愼恐懼)하는 것은 곧 하늘의 속성과 은미함을 염두에 둔 때문이라 설명했다. 경전 해석에서 나타나는 그의 학문적 특징은 예론(禮 論)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그의 예론은 주로 가례에 대 한 것이지만, 복제예송(服制禮訟)에 대해서는 "기해 방 례(己亥邦禮)는 끝내 참최(斬衰)가 옳다"고 하여 윤휴의 참최 3년설을 따르고 있다. 가례를 설명함에 있어 권철 신은 우선 《주자가례》 대신 고례(古禮)에서 근거를 찾으 면서 《주자가례》와는 달리 혁신적인 내용을 담게 되었으 며, 한편으로는 현실 개혁의 의지를 표명하게 되었다. 한편 권철신은 1766년 무렵부터 이미 양명학(陽明學) 에 접하고 있었다. 이 사실은 《대학》에 대한 이해에서 잘 나타나는데, 세부적으로는 주자의 해석과는 달리 《대학》 고본을 개정할 필요가 없다고 한 점, 격물치지장(格物致 知章)은 보망할 필요가 없다고 한 점, 치지(致知)를 양명 학의 입장에서 설명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물 · 사 (物事)에 대한 이해, 이병휴의 설을 따라 명덕(明德)을 효제자(孝弟慈)로 해석한 점, 성의(誠意)를 격물〔求至 善〕과 치지의 요체로 삼은 점 등은 윤휴 · 이병휴 · 정약 용과 유사한 해석으로 이들 사이의 학문적 영향 관계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그 결과 권철신은 1769년에 이르 러 주자학의 핵심적인 문제에서 양명학을 따르게 되었 다. 그렇지만 윤휴나 정약용에서 보는 것처럼 그 또한 양 명학을 수용한 바 있으나 신봉에까지 이른 것은 아니었 다. 실제로 그가 이해한 《대학》의 내용은 신후담이나 이 병휴의 견해를 따라 주자의 의견에 반대하면서 자주적인 해석을 폈던 것으로 파악된다. 〔천주교 수용과 신앙 생활〕 권철신과 천주교와의 관계 는 그의 생애에 있어 두번째 시기, 즉 이병휴의 사후 녹 암계(鹿菴系)를 형성하는 후반기에서 나타난다. 일단 권 철신은 이병휴와 《대학》에 대해 문답하는 1773년까지는 양명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부터 는 양명학에서 벗어나 천주교를 접하면서 우선 학문적인 서학(西學)으로 이해하였고, 더 나아가 이를 신앙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1779년(기해년) 겨울에 개최된 주어사 (走魚寺) 강학은 바로 권철신 주도의 녹암계 인물들이 종래의 유교적 강학 형태를 빌려 서학이나 양명학에 대 해 처음 토론한 자리였다. 그러나 이전부터 이미 그들은 여러 형태로 천주교 신앙을 담은 한역 서학서(漢譯西學 書)에 접해 오고 있었다. 권철신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1784년 9월경(음) 천주교 서적을 들고 집으로 찾아온 이벽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때부터 얼마 동안 그는 천주교를 신앙으로 신 봉하였으나, 드러나게 활동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황 사영(黃嗣永, 알렉시오)의 〈백서〉(帛書)에서는 "권철신 이 천주교 신앙에 접촉한 뒤 일단 온 가족이 이를 믿어 따랐고, 그중에서도 특히 그의 아우인 권일신이 신앙 생 활에 열중하였지만, 아우 일신이 1791년의 탄압으로 사 망하자 감히 드러내 놓고 수계하지는 못하였다" 기록 하였다. 또 안정복은 1784년 권철신에게 보낸 서한에서 "근래 받은 그대의 서한이 전에 것과 크게 다르다"고 하 면서 권철신이 천주교를 가까이함을 탓하였다. 안정복이 이렇게 권철신을 탓한 이유는, 첫째 그가 종래에 궁구해 오던 학문을 모두 버리고 오직 마음을 닦는 일에만 힘쓰 겠다고 한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로는 권철신이 '세상을 마치는 법' 을 궁구하겠다고 한 것을 불가(佛家)의 방법 즉 천주교의 방법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안 정복은 다른 서한에서 정약전 · 이승훈 · 이벽 · 이총억은 물론 이가환(李家煥) · 이방억(李龐億)뿐만 아니라 권철 신도 천주교에 빠졌음을 질책하였다. 이후 천주교 문제가 거론될 때면 언제나 권철신은 주 동자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었다. 특히 정미년(1787)의 반회 사건(泮會事件) 이후 같은 기호 남인 안에서 공서 파(攻西派) · 신서파(信西派)의 대립이 노골화되고, 신 서파의 이승훈 · 정약용 · 이가환이 사학(邪學)의 3흉으 로 거론되면서 권철신도 자주 그들을 인도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우 권일신은 1791년의 신 해박해(辛亥迫害) 때 유배형을 받고 길을 가던 도중에 사망하였으며, 양자 권상문도 1800년 6월(음)에 체포되 었다. 그러므로 1801년(순조 1)에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그에 대한 비판이 비등하게 되었 고, 마침내 3월 24일(음 2월 11일) 양근에서 체포되어 이 가환 · 정약용 · 이승훈 · 홍낙민 · 정약종 등과 함께 문초 를 받게 되었다. 이때 그는 국청의 추국에서 배교로 일관 하였으며, 4월 4일(음 2월 22일 혹은 25일) 매를 맞아 옥 사하였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시칭》(詩稱) 2권, <대학 설》(大學說) 1권 등 여러 저서가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 권상문 ; 권일신 ; 신유박해 ; 이벽 ; 주어사 강학) ※ 참고문헌  《與猶堂全書》/ 《推案及勒案》/ 《달레 교회사》/ 《順菴 集》/ 《星湖先生全集》/ 《貞山雜著》/ 《昭南先生文集》/ 李佑成, <鹿菴 權哲身의 思想과 그 經典 批判>, 《韓國의 歷史像》, 창작과 비평사, 1986/ 河聲來, 《윤유일 · 정은 평전》, 성황석두루가서원, 1988/ 徐鍾 泰, <鹿菴 權哲身의 陽明學 受容과 그 影響〉, 《國史館論叢》 제34집, 1992/ 車基眞, <鹿菴 權哲身의 학문과 西學〉, 《清溪史學》 제10집, 1993. 〔車基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