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영 백서의 연구》
黃嗣永 帛書の 研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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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

《황사영 백서의 연구》.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 1775~1801)의 <백서>(帛書)에 대해 1946년에 일본인 사학자 야마구치 마사유키(山口正之)가 간행한 책. <백서>에 대한 최초의 단행본 논저. 〔형태와 연구 동기〕 국판(菊版) 179면으로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간행된 이 책은 서문, 전편과 후편, 그리고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론에서 저자는 자신이 약 15년 동안 <백서>에 관심을 두고 그 종교적 가치, 중국과의 외교에 있어서의 고차원적 정치성, 당론(黨論)과의 필연적 관계를 살펴왔으며, 작성지인 배론(1936. 8)과 수신자가 있던 북경(1939. 1)을 방문한 후 <백서>에 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연구를 시도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내 용〕 전편 : '연구' (硏究)라는 제목하에, 10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 '백서의 형태와 그 성립' 에서는 <백서> 영인본을 통한 서지학적 검토, 즉 크기, 계수적(計數的) 구성(행수와 글자수), <백서> 및 <진주사등본백서>(陳奏使謄本帛書)의 입수 경위, 제작자, 집필자, 서명자, 수신인, 정본(正本)이 갖는 결함, 내용 구성의 진실성 등을 고찰하였다. 제2장 '<백서>의 내용과 그 사적 검토' 에서는 <백서>가 신유박해 순교자들의 내력, 박해의 직접적 원인인 당쟁의 새로운 전개, 천주교 재건책에 대한 내용들로 이루어졌으며, 그 사적 가치는 북경교구장(1782~1808) 구베아(A. de Gouvea, 湯士選, 1751~1808) 주교의 <조선 왕국에 있어서 천주교의 확립>(1794)과 함께 쌍벽을 이루며 조선 천주교회사의 여명을 장식하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시파(時派)의 전멸을 기도한 벽파(僻派)의 정치적 음모를 파헤친 <백서>의 생생한 서술은 다른 문서에서 볼 수 없는 장관이며, 천주교 재건을 위한 5가지 방책은 정치와 종교의 연관을 외세 의존적 입장에서 원용한 것으로, 특히 조선 감호책은 명말(明末) 서광계(徐光啓, 1562~1633)가 제시한 조선 선교 운동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제3장 '작자 황사영에 대하여' 에서는 황사영의 족보, 신유박해 당시 황사영의 피신 · 체포 · 추국 · 판결안, 그리고 연루된 자들의 순교 및 귀양 등을 언급하였다. 제4장 '서명자 황심에 대하여' 에서는 북경 교회와 통신 및 연락을 담당한 황심(黃沁, 토마스)의 활동, 체포 및 판결안을 언급하였다. 제5장 '백서에 나타난 피자(避字) · 은어(隱語)의 보정(補正)' 에서는 <백서>에 기록된 요한 ·명도회원 · 오 스테파노 · 송재기 · 한 교우 · 현계흠 · 토마스 · 은언군의 부인과 며느리를 입교시킨 여인에 관하여 고찰하였다. 제6장 '<진주사등본백서>에 대하여' 에서는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1752~1801) 신부의 활동과 자수 및 순교를 고찰하고, 〈가백서〉(假帛書, 일명 討邪奏文)의 원문 및 내용을 분석하였으며, <백서>와 <진주사등본백서>의 구성상에서의 계수를 비교하고 <진주사등본백서>의 내용을 분석하였다. 제7장 '동아정교사상에 있어서의 백서' 에서는 진주사의 파견과 등본백서는 종속적 국제 정치 이념의 소산이며, 5가지 방책 중 월해초구(越海招寇, 武力開敎)와 개문헌국(開門獻國, 북경 교회와 연락)만 선택한 것은 종속 관계와 조선 · 청의 법을 원용하여 정치적 알력의 소지를 줄인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청 황제의 유문(諭文, 討邪奏覆)을 싣고 그 내용을 분석하였으며, 구베아 주교의 입장 또한 분석하였다. 야마구치는 주문모 신부의 처형이 <백서>에 알려짐에 따라 조선은 종속으로 인한 질곡의 환상에 사로잡혔고, 청나라는 종주국이라는 환상에 조작되어 발언을 잃었으며, 북경 주교는 교권 동요의 환상 속에 위축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동아시아 근세 초기에 있어서 환상의 국제극이었다고 지적하였다. 제8장 '황사영 백서의 안작설(贗作作) 비판' 에서는 <백서>를 황사영이 아닌 홍희운(洪羲運)이 지었다는 설(안작설, 1818)을 비판하면서 <백서>의 정치 · 사회사적 의의를 고찰하였다. 제9장 '배론 토굴 답사기' 는 이왕직(李王職) 편집실 조선 근대사 연구팀의 일원으로 참여한 1936년 8월 21일부터 8일간의 답사 기록으로 토굴에 대한 자세한 기록과 함께 배론의 50,000분의 1 지도와 무너진 토굴 사진이 실려 있다. 이것은 현재 그 자리가 파괴되어 자취를 찾을 수 없는 유물과 유적의 상태를 감안할 때 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제10장 '이조사상에 있어서 <백서>의 시대적 성격' 은 이 연구의 결론에 해당된다. <백서>는 조선 후기 정치, 외교 및 종교의 사회적 단면도이고, 정조 시대(1777~1800)를 중심으로 한 조선 문예 부흥기에 있어서 종교적 세계관의 발전도이며, 당론 분파의 당적도(黨籍圖)라고 하였다. 또 황사영의 사상적 근저에는 조선 후기의 정신 생활을 지배한 회의적 · 고립적 운명관에 대한 비약과, 대륙 의존적인 모화사상(慕華思想)에서 배태된 생활 정신의 허약성, 천주교 전래에 따른 세계 지식의 확대와 그로 인한 그리스도교 세계주의라는 서방 의존의 비극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후편 : 제목은 '사료' (史料)이며 첫째, <백서>의 영인본에 기초한 원문과 간주(間註)가 실려 있다. 권인(圈印)을 붙여 원주(原註)와 구별하였고, 문중(文中)의 방흑권(傍黑圈)을 쓴 문자는 <진주사등본백서>에서 채택된 문자이며 상부의 숫자는 행수를 표시한 것이다. 둘째, 서울 대목구가 소장하고 있던 <진주사등본백서>의 원본에 의거한 원문을 실었는데, 현재 그 원본이 소실됨에 따라 사료적으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셋째, 구베아 주교의 <조선 왕국에 있어서 천주교의 확립>에 대한 역주본을 수록하며, 전체적 이해를 위해 <백서> 연구와 함께 수록한 것이라고 밝혔다. 저자가 택한 저본은 사천 교구장 생 마르탱(Jean Lidier de St. Martin) 주교가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장에게 보낸 프랑스어본(1820)과 스승 이마니시(今西)에게서 받은 라틴어-포르투칼본 (1808)의 라틴어본이었다. 그리고 부록에는 '황사영 백서(영인)' (표지 속면에 첨부)와 '조선 순조원년 신유대박해 연표' 가 수록되어 있다. 〔평 가〕 우선 '백서에 나타난 피자 · 은어의 보정' 에는 원문에 드러나 있지 않은 인물들에 관한 해설이 나오는 등 곳곳에 미흡한 부분이 있고, 영인본을 토대로 그가 역주한 <백서>에도 일부 오류가 있다. 또한 제시하고 있는 '로마 교황과 북경 주교에 보내는 조선 신자들의 청원서' 중 자료 일람표에는 누락된 것들이 있으며, 근래의 조사에 의해 원문이 밝혀진 것도 있다. 또한 <백서>가 갖는 동아시아 정치 · 교회사, 그리고 조선의 정치 · 사회사적 고찰에서 저자가 내린 결론은 오늘날에는 재고를 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조선 신자들이 처해 있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백서>를 통해 드러내고자 한황사영의 의도가 과연 환상에 사로잡힌 착오적인 것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그러나 저자의 선구적이고 끈질긴 학문적 노력은 뛰어난 것이었으며, 현대적 연구의 시발이 되었다. 특히 그의 연구는 주로 자료의 탐색과 소개를 중심으로 한 실증적인 것으로, <백서>에 대한 그의 서지학적 해설과 전문 역주는 이 방면에 큰 기여를 하였다. 훗날 일본 역사학계의 요청으로 1951년 《조선학보》 2집에 <백서> 해제가 소개되고 또한 전문 역주가 수록되었는데, 이 중 후편에 실린 구베아 주교의 서한에 대한 역주에 오류가 있었다. 이 서한은 당시 조선 신자들의 서신 및 전언자의 구술, 그리고 주문모 신부의 보고와 북경 주재 선교사들의 견문을 토대로 작성한 것인 만큼 사료로서 큰 주목을 받은 것으로 이에 대한 오류는 해방 후인 1961년 <신유치명자열전>(《조선학보》 16집에 수록)을 발표하면서 일부 정정하였다. 그리고 다나카 히데오(田中秀夫) 역시 관련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와 같이 야마구치의 연구는 한국 천주교회사를 밝히는 데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어 왔지만, 그에 대한 이해는 기본적인 사료 비판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며, 그의 다른 연구와도 관련지어서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이를 토대로 그가 이룩한 연구 성과를 능가하는 새로운 조명도 시도되어야 할 것이다. (→ <가백서> ; 구베아 ; <백서> ; 서광계 ; 황사영 ; 황심) ※ 참고문헌 山口正之, 《黃嗣永 帛書の 研究》, 全國書房, 1946/----, 이민원 역, 《황사영 백서 논문선집》, 기쁜소식, 1994, pp.16~118/ 이원순, <한국천주교사연구소사>, 《최석우신부 화갑기념 한국교회사논총》,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차기진, <황사영 백서의 연구 해제>, 《교회와 역사》 158호, 한국교회사연구소, 1988. [呂珍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