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평

黃沙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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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평 순교자 묘역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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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평 순교자 묘역 전경.


1901년 5월 봉세관(封稅官)의 조세 수탈과 천주교회 의 교폐(敎弊)에 제주도민들이 반발하여 발생한 제주 교 안(濟州敎案, 신축 교난)으로 희생된 천주교 신자들을 매장한 곳. 제주도 제주시 화북2동 5618 소재. 교안 당시 피살된 신자들 가운데 연고 없는 시신들이 매장되어 있으며, 당시 그 수는 분묘 26기에 시신 28구였다. 1990 년대의 성역화 사업을 거쳐 현재는 제주교구 성직자와 평신도들의 공동 안장지로 사용되고 있다. 〔매장지 결정 과정〕 제주 교안 당시 제주 민군(民軍) 과 천주교 신자들 간의 치열한 공방으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는데, 그 대부분이 천주교 신자들이었다. 교안 직후 제주에 파견된 평리원(平理院) 안종덕(安鍾惠) 검사가 작성한 희생자 명단〔濟民物故成冊〕에 따르면 희 생자 317명 가운데 천주교 신자가 309명에 이르렀다. 게다가 이들 희생자들의 시신이 제주목 관아 관덕정 앞에 그대로 방치되어, 시신을 매장할 부지 마련이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당시 제주에 급파된 프랑스 쉬르프 리즈(Surprise)호의 함장인 모네(Mornet)와 알루에트 (Alouette)호 함장 발로이(Balloy)는 제주 목사 이재호(李 在護)에게 방치된 시신을 매장할 부지 제공을 요구하였고, 논의 끝에 부지 양도가 합의되었다. 하지만 제주 목사는 희생자들의 시신을 별도봉(別刀峯)과 화북천 사이 기슭에 옮겨 가매장한 후, 친인척이 있는 희생자들의 시 신은 이미 수습되었으며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거나 친인척이 없는 시신도 매장된 상태이기 때문에 굳이 묘지를 양도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1902년 8 월 9~11일 제주를 방문한 뮈텔(G.-C.-M. Mutel, 閔德孝) 주교는 매장지 확보를 강력하게 요구하였고, 9월 1일 프 랑스 공사 플랑시(V.C. de Plancy, 葛林德) 또한 한국 정부에 매장지 제공을 요청하였다. 결국 1903년 4월 29일 외부 대신 이도재(李道宰)와 플랑시 공사의 위임을 받은 이인영(李寅榮)이 논의한 끝에 황사평을 매장지로 결정하였다. 1903년 9월 14일경 외부(外部)에서는 제주 목사에게 황사평을 천주교인 매장 조계지로 확정하여 중앙에 보고하라는 훈령을 내렸고, 제주 목사 홍종우(洪鍾宇)는 제주 본당(현 제주 중앙 주교좌 본당) 2대 주임인 라크루(M. Lacrouts, 具瑪瑟) 신부와 협의하여 황사평을 매장지로 확정하고 이를 중앙 정부에 보고하였다. 11월에는 외부 대신 서리 이하영(李夏榮)이 매장지를 지급하되 교안에 학살되지 않은 천주교 신자의 매장은 불허하며 외국 선교사들의 영장지로 사용하는 것 또한 불허한다는 점을 조건으로 제시하였고, 프랑스 대리 공사 풍트네(M. Fontenay, 憑道來)가 이를 수락함으로써 제주 교안 희생자 매장지 문제는 타결되었다. 이후 매장지 측량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교회측에서는 한 면이 400m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200m로 결정되었다. 1904년 6월 7일 라크루 신부는 뮈텔 주교에게 묘지 장소 측량과 양도가 끝났다고 보고하였고, 11월에는 제주 교안 희생자들의 유해가 이장되어 장례식이 치러졌다. 〔성지 조성〕 제주 교안 희생자들의 묘역이었던 황사평에는 이후 독립 유공자이자 신성여자중 · 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던 최정숙(崔貞淑, 베아트릭스, 1902~1977) 등 애국 지사들과, 1976년 3월에 선종한 제주 지목구장 헨리(H.W. Henry, 玄海) 대주교가 안장되었다. 1977년 9월 제주교구가 황사평에서 한국 순교 복자 현양대회를 개최한 이래, 이 대회는 연례 행사로 정착되어 신자들이 제주 교안을 이해하고 순교자들의 순교 정신을 배우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황사평을 천주교 성지로 정비하려는 움직임이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1980년 제주 교구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제주교구 준비위원회를 구성하는 가운데 20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황사평 묘역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였고, 1982년 9월과 1983년 9월에 개최된 순교자 현양 대회에서 성역화 사업에 필요한 기금을 모금하였다. 1983년 10월에는 황사평 묘역 내에 있는 어린이 및 무명자의 묘를 서쪽으로 옮겨 공동 묘역으로 조성하는 한편, 11월 6일부터 14일까지 무명 순교자들의 묘에 대한 확인 조사 작업을 실시하 였다. 1984년 7월에는 일반 신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황사평 묘역의 묘지 분양 신청을 받기 시작하였고, 8월에 추첨을 통하여 분양자를 선정한 후 9월부터 신규 매장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1987년부터 묘역 공원화 계획을 수립하고 연고가 없는 묘지의 정리 작업을 진행하였으나 완료하지 못하여, 1993년 5월부터 그 무덤들을 무연고자 묘역으로 이장하기 시작하였다. 1993년 8월에는 1899년 제주 본당의 설립과 성직자 들의 제주 입도를 기념하기 위해 발족된 '제주 선교 100 주년 기념 사업 준비위원회' 에서 주요 사업의 일환으로 교구 성지의 성역화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그 리하여 그해 12월에는 제주 교안의 희생자 김 토마스와 라크루 신부의 복사였던 신재순(申才淳, 아우구스티노) 의 묘를 순교자 묘역으로 이장하였고, 1995년 5월에는 무명 순교자 유해를 한 곳에 합장하고 유해 봉안식을 거행하였다. 또한 11월에는 헨리 대주교 묘와 서흥리 본당 (현 서귀포 본당) 등에서 사목 활동을 하였던 라이언(T.D. Ryan, 羅) 신부 묘를 이장하고 축복식을 거행하였으며, 진입로 확장, 정지 작업, 배수로 작업 등 묘역을 단장하 였다. 그리고 1998년 9월 20일에는 제주도 선교에 많은 공헌을 한 파리 외방전교회와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을 위한 공덕비 제막식을 거행하였고, 9월 27일 에는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당시 순교한 김기량 (金耆良, 펠릭스 베드로)의 순교비 제막식을 가졌다. 현 재 황사평에서는 순교자 현양 대회를 비롯한 제주교구의 주요 행사가 거행되고 있으며, 해마다 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을 순례 방문하고 있다. ※ 참고문헌  <한국가톨릭대사전> 10권, pp. 7659~7660/ 金玉姬, 《濟州島 辛丑年 教難史》, 天主敎 濟州教區, 1980/ 천주교 명동교 회편,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뮈텔 주교 일기》 III(1901~1905), 한국교회사연구소, 1993/ 제주선 교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 회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역, 《신축교안과 제주 천주교회》, 1997/ 一, 《초기 본당과 성직자들의 서한》 (1), 1997/ 一, 《초기 본당 과 성직자들의 서한》 (2), 1997/ 《제주 천주교회 100년사》, 천주교 제주교구, 2001/ 1901년 제주항쟁 기념사업회 편, 《신축 제주항쟁 자료집》 I, 2003/ 李忠雨, 《다시찾는 한국의 聖地》, 분도출판사, 1993. 〔梁仁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