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새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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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지역 순교지 황새바위.

공주 지역 순교지 황새바위.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 사적지. 충남 공주시 교동 118-2번지 소재. 박해 기간 동안 신자들의 사형이 집행 된 곳. 이곳 가까이에 황새들이 많이 서식했기 때문에 황 새바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도 하지만, 목에 큰 항쇄 (項鎖)를 쓴 죄수들이 이 언덕 바위 앞으로 끌려나와 죽었다고 해서 항쇄바위로 불리기도 하였다. 〔박해와 황새바위〕 공주에는 조선 건국 직후부터 관찰사가 관할하는 감영(監營)과, 토포사(진영장)가 관할하는 진영(鎭營)이 설치되어 있었다.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자 충청도 전역에서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어 공주로 끌려왔으며, 숱한 신문과 고문과 함께 배교를 강요당하였고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신자들은 옥에서 교수형(絞首 刑)이나 장사(杖死)로 순교하거나 황새바위에서 참수형 (斬首刑)을 당하였는데,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체포된 내포의 사도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이 1801년 4월 9일 이곳에서 처음으로 참수형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보름 후 청주에서 체포되어 온 이종국이 참수되었으며, 5월경에는 문윤진, 7월경에는 이국승(李國昇, 바오로)이 참수형을 당하였다. 이후 공 주에서는 1812년 장대원(마티아)과 황 바오로가 참수된 기록이 있고,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 때에도 전 베드로 등 여러 사람이 체포되어 옥사한 것으로 보아 참수 자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시작되자 공주에는 또 다시 내포 지역을 비롯하여 인근의 전라도 북부와 충청 북도, 경기도 일부에서까지 신자들이 체포되어 끌려왔 다. 지금까지 기록상(1866~1873) 당시 박해로 공주 지역 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1866년 109명, 1867년 56명, 1868년 12명, 1869년 이후 16명 등 총 193명으로, 이는 이름이 밝혀진 내포 지역(공주 해미 · 홍주) 순교자 334명의 57.8%를 차지하는 아주 높은 비율이다. 물론 이들 가운데 몇 명이나 황새바위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는 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해미에서 체포된 이가롤로나 연산에서 체포된 김윤지 등 여러 사람이 이곳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한 듯하다. 〔사적지 조성〕 박해가 끝난 후 황새바위에 처음으로 관심을 기울인 사람은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 초대 수석 아빠스였던 베버(N. Weber)였다. 그는 1911 년 2월부터 약 4개월간 한국에 머물며 서울 백동(栢洞, 현 혜화동) 수도원을 비롯하여 공주 · 평양 · 해주 등 유서 깊은 교우촌과 명소들을 두루 여행하고 본국으로 돌아가 한국에서 겪은 여러 가지 경험과 견문을 바탕으로 《조 선》(Im Lande der Morgenstille)라는 책을 1914년 6월에 간행하였다. 그는 이 책에 공주의 순교지에 대하여 묘사를 하며 <공주의 형장에서 사형수의 무덤을 바라봄>이라는 제목의 삽화를 덧붙였지만, 이에 대하여 당시 한국 교회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공주 지역 순교지에 대한 한국 교회의 관심이 표출된 것은 1937년에 이르러서였다. 공주(현 중동) 본당 5대 주임 최종철(崔宗哲, 마르코) 신부는 1937년 성당 봉헌식을 거행한 후 공주 천주교도 약사, 박해기 천주교도의 은거지, 연도별 순교 약사 및 순교자 명단 등을 수록한 《공주천주교회 연혁》(公州天主敎會 沿革)을 발간하였 다. 특히 이 책에는 이존창이 황새바위에서 순교한 사실 이 기록되어 있었지만, 이후 순교자들이나 순교지에 대한 교회의 관심이 이어지지 못하여 이와 관련된 유적들도 대부분 사라졌다. 교회에서 공주 순교자들의 사적에 대하여 다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1978년 무렵부터였다. 당시 중동 본당 신자였던 지재희는 1978년경 근화유치원을 맡고 있던 오(吳) 수녀의 인척인 한 판사를 통해 황새바위 순교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를 평신도의 날 강론을 통해 신자들에게 이야기하였다. 이로써 황새바위 순교지에 대한 신자들의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인근 노인 들에게 황새바위 순교지의 위치를 물어 확인한 결과 공주 교도소 망대가 세워져 있는 곳임을 알고 이를 대전교 구장 황민성(黃旼性, 베드로) 주교에게 보고하자, 교구에서는 부지 구입 비용을 지원해 주었다. 이에 당시 중동 본당 주임이던 김동억(金東億, 바오로) 신부가 1980년 12월 황새바위 언덕의 땅 2,410.5평을 구입하여 성지 조성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82년 9월 중동 본당에서 교동 본당이 분할됨에 따라 황새바위의 관할은 교동 본당으로 이관되었다. 교동 본당 초대 주임 조장윤(趙璋允, 베르나르도) 신부는 부임 직후부터 성지 개발에 관심을 기울여 1984년 3월 지 재희를 위원장으로 하는 황새바위 성역화 사업 추진위원 회를 결성, 본격적으로 성지 개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년 8개월 만인 1985년 11월, 순교탑과 순교자 248명 의 이름을 내부에 새긴 대리석 경당(무덤 경당)을 완공하 고 경갑룡(景甲龍, 요셉) 주교의 집전으로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이후에도 황새바위 순교지의 성역화 작업은 계속 전개 되어 광장에 12사도를 상징하는 돌기둥을 세우고 경당에 고통의 성모자상을 안치하였으며, 1998년에는 십자가의 길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1999년 3월에는 후원회 기금으로 대지 500평을 구입하여 2002년 11월 대경당을 완 공하고 경갑룡 주교의 주례로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 참고문헌  《공주천주교회 연혁》, 1955/ 대전교구 홍보국 편 역, 대전교구사 자료 제3집 《순교자들의 전기》, 천주교 대전교구, 1991/ 중동 본당 100년사 편찬위원회, 《중동 본당 100년사》, 천주 교 대전교구 공주 중동 교회, 1997/ 서종태, <공주의 순교지와 황 새바위 성지>, 황새바위 성지의 순교자 현양 경당 축복 기념 세미나 요지문, 2002. 〔洪延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