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두 黃錫斗(1813~1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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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두 성인.

황석두 성인.


성인.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은 루가. 자(字)는 재건. 회장. 충청도 연풍의 부유한 양반집에서 태어났다. 15세에 혼인하였으며, 21세 때 한문 선생의 권고로 교회 서적을 읽고 감동하여 입교하였다. 그러나 부친의 반대로 신앙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3년간 벙어리 노릇을 하며 교리 서적을 탐독하는 한편, 박해하던 부친과 가족 들도 권면하여 입교시켰다. 그리고 1845년 페레올(J.-J.J.-B. Ferréol, 高) 주교가 입국한 이후에는 주교에게 절제와 금욕을 위해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받았으며, 신부 가 되기 위해 다블뤼(M.N.A.A. Daveluy, 安敦伊) 신부에게 몇 년 동안 신품 공부를 하였다. 그러나 아내가 있기 때문에 교황청에서 허락하지 않자 공부를 그만두고, 서천 산막골로 이사하여 1858년부터 페롱(S. Féron, 權) 신부의 복사로 활동, 이어 베르뇌(S.F. Berneux, 張敬一) 주교와 조안노(P.M. Joanno, 吳) 신부의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형의 아들인 황천일(黃千日, 요한)을 양자로 삼아 페롱 신부의 복사 일을 맡기고, 그는 다블뤼 주교의 복사로 전교 활동을 도왔으며 함께 교회 서적을 번역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나 3월에 다블뤼 주 교와 위앵(M.L. Huin, 闕) 신부 · 오메트르(P. Aumaitre, 吳) 신부가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었다. 이때 포교들은 그를 체포하지 않았지만, 본인이 주교를 따라가겠다고 하여 함께 홍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다. 포도청의 신문 과정에서 그는 대군대부(大君大父)인 천주를 배반할 수 없다고 신앙을 증거하였으며, 3월 23일 사형 선고를 받고 3월 30일 충남 보령의 갈매못으로 이송되어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장주기(張周基, 요셉) 등과 함께 군문 효수형(軍門梟首刑)으로 순교하였다. 양자인 황천일이 그의 시신을 거두어 본가로 옮겼다가 홍산 삽틔에 장사지냈다.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 참고문헌  《치명일기》(724번)/ 《포도청 등록》/ 《병인치명사 적》 샤를르 달레,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 천주교회사》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현대문),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方相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