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교황주의
皇帝敎皇主義
〔라〕caesaropaismus · 〔영〕caesaropap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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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

베드로와 그 후계자로 이어지는 수위권에 대한 전통적이고 종교적인 개념인 황제 교황주의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 시기에 전성기를 맞았다.
교회와 국가의 상호 관계에서 전제 군주가 교회의 합법적인 전통적 가르침을 거스르고 교황권에 개입하거나 교회에 대한 최고의 지배권을 가진다고 인정하는 경향. 즉 국가 권력과 교회의 최고 통치권(統治權, potestas regiminis)이 황제에게 통합된 형태, 또는 교회와 국가 그리고 국민의 통합이 이루어진 형태. 〔의 미〕 황제 교황주의는 한 사람의 평신도인 군주가 세속적인 최고 왕권은 물론이고 최고의 사제 직분에 있는 사람이 가져야 할 권한을 모두 갖고 행사하는 통치권 개념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용어는 만들어진 지 오래되지 않은 신조어지만 그 개념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 온 것으로,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행사한 통치권을 말할 때 사용하는 개념이다. 황제 교황주의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주로 교회의 지배보다 국가법의 집행이 더 우위에 있던 시기, 특히 제정 혼합(祭政混合) 시기에 나타났다. 국가는 교회에 물질적인 도움을 제공하면서 그 대가를 요구하는 등 국가와 교회라는 최고 권력 간의 상호 관계는 항상 민감한 사안이었다. 또한 시대적 변화와 함께 나타나는 새로운 문제들과 공공 생활에서 드러나는 요구로 인해 양측 관계를 명확히 해야 할 필요도 있었다. 로마제국 시대 초기에는 그리스도교가 위험한 불법 종교로 간주되어 국가와 교회의 관계는 적대적이었으나, 콘스탄틴 대제(Magnus Constantinus I, 306~337)의 밀라노 관용령(Edictum Milanensie, 313)을 계기로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그는 교회에 생계 수단을 제공하고 교회를 내외의 적들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요 명예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대 급부도 있었다. 즉 교회 문제에 간섭하고 통제하려 하였으며, 필요할 때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교리 문제에까지도 개입하였던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교가 국교가 된 이후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그리스도교 국가의 최고 수반으로서 통치권이 미치는 영역 안에서 제국에 영향을 주는 모든 문제에 관심을 갖고 이를 잘 통제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제국의 권력으로 교회 문제의 판관 역할을 맡기도 하였으며, 어떤 경우에는 주교들이 독자적으로 결정하도록 종용하기도 하였다. 황제들의 이러한 태도는 제국 황제에게 '폰티펙스 막시무스 (Pontifex Maximus, 대사제)라는 지위를 부여하는 로마의 전통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많은 주교들이 황실에 머물면서 황제권을 칭송하거나 과잉 찬양한 것에서 기인한다. 〔발 전〕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4세기 이후 백성들이 신앙을 잘 지키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고위 성직자들 특히 총대주교와 주교들을 임명 · 해임하며 그리스도교 국가의 정체성 유지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성직자 임명권의 근거는, 황제는 이 땅에서 신성을 대리하도록 성별(聖別)된 사람이며 전세계의 통치자로서 그리스도교 제국 안에 통일과 평화 그리고 질서를 확립하고 유지하여야 할 책임자로 부름을 받은 유일한 군주라는 믿음에 의거한다. 마치 천상의 모든 권한이 유일한 분에게 귀속되어 질서가 유지되는 것과 같이, 지상의 모든 권한들도 황제에게 귀속됨으로써 세속의 질서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olis)에서는 황제 교황주의의 두 번째 발전이 이루어졌다. 교회에서 베드로와 그 후계자로 이어지는 수위권(首位權)에 대한 전통적이고 종교적인 개념이 정치-국가적 통치 개념으로 대체되어 제국 교회적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제논(Zenon, 474~491) 황제 때부터 유스티니아누스 1세(527~565) 황제 시기에 전성기를 맞았다. 황제의 성직 임명권이 확실하게 드러난 것은 5세기 전반이었지만, 제논이 482년에 발표한 <헤노티콘>(Henotikon)으 로 성직 임명권은 뚜렷하게 황제의 권한이 되었다(이 문서의 발표로 인한 이른바 아카치우스 이교로, 동방과 서방 교회는 35년 동안[484~519] 분열되었다). 제논은 그리스도 단성설(monophysitismus)에 대한 칼체돈 공의회(451)의 결정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백성들에게 신앙의 방향을 규정하고 고위 성직자를 황제의 권한으로 임명 또는 해임하였다. 더 나아가 군주란 모든 면에서 왕이고 또한 사제로서 처신하여야 한다는 사상에 젖어 있던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에 이르러 황제의 성직 임명권은 극에 달해, 그가 통치하던 시절에는 '하나의 왕국, 하나의 법, 그리고 하나의 교회' 만이 있었다. 동로마 제국 천 년의 역사 동안 황제의 고위 성직자 임명권은 여러 면에서 수정되기도 하였지만 제국을 통치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계속 남아 있었다. 동서방 교회 사이에서 분열이 발생한 원인 가운데 상당 부분이 바로 동로마 제국 황제의 성직 임명권 때문이었다. 각 나라의 신자들이 신앙인으로 생활하도록 보살피고 지켜 주어야 할 책임자로서 직무를 수행해야 할 교황이, 황제가 고위 성직자를 임의로 임명하는 것을 묵묵히 따르기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세 서유럽에서 가톨릭 교회는 유일한 국가 종교로서 자체적으로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였으며, 항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 것은 아니었지만 서방의 여러 국가들은 적어도 영적인 분야에서는 교회의 독립을 보증해 주었다. 따라서 황제의 성직 임명권은 교의상 용납되지 않는 것이었다. 특히 르네상스 전성기에는 새로운 교회론들이 나타나면서 지상에서 세속과 싸우는 가시적 교회의 개념 이 부정되고, 교회를 참된 의미의 새로운 국가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나타난 프로테스탄트는 국가의 권위에 밀접히 연결되어 독립성을 지니지 못한 채 형성되었으며, 영국 성공회 또한 가톨릭 교회와 같은 교계 제도만 그대로 유지하였을 뿐 프로테스탄트의 여러 교파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었다. 이는 그 가르침과 형성 자체가 정치 권력의 지배자들과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동로마 제국이 행사한 성직 임명권은 동로마 제국이 멸망(1453)한 후 '제3의 로마' 라고 자처한 러시아 황제 에게로 이어졌다. 프로테스탄트 군주들도 '영지의 종교는 영주의 종교' (cujus regio, eius religio)를 적용하여 성직 임명권을 행사하였다. 황제 교황주의는 서방 가톨릭 국가들에서도 나타나는데, 비록 동로마 제국처럼 극단적인 황제 교황주의와 같은 형태는 아니더라도 17세기에 의도적으로 교황의 권한을 교황령이라는 한정된 지역으로 축소시키면서 각 국가 군주들의 권한을 강화하려 한 것이 그 예이다. 독일의 페브로니우스주의(Febronianismus), 오스트리아의 요셉주의(Josephinismus),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갈리아주의(Gallicanismus)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 체제들은 세속권에 대해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교회의 교도권에 대하여 특별한 적대감을 나타냈으며, 교황청과 자국 주교들과의 관계를 가능한 한 일반화시키고 소원하게 만들려고 하였다. 또한 수도자들의 면책권을 제한하고, 교회 서한들과 행정 조치들은 국가의 동의가 있어야 실행되도록 하였다. 교회의 재단 설립과 존속 그리고 그 재산의 구입과 양도 문제도 국가의 권한 아래 두었다. 그리고 교황과 주교들의 교회법적 판결에 대해서도 국가에 항소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교구와 본당의 관할 구역도 새롭게 설정하고 혼인 장애에 대한 교회법도 새롭게 제정하기를 요구하였다. 이러한 조치들이 내려진 배경에는 교회 권력이 지니는 결점을 보충할 필요성, 군주의 품위를 고양시키는 일, 교회의 과대한 요구와 국가 재정의 축적에 유해한 교회 특권들에 반대해서 신중하게 대처하려는 것이었다. 이처럼 영적 권한의 합법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국가들에 대해 황제 교황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는 없다. 이들 국가에 있어서 종교는 순전히 정치상의 이익을 위하여 이용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평 가〕황제 교황주의라는 용어는 서방 교회나 서방지역에 속한 사람들이 동방 교회의 제도를 평가 절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형태를 취하였던 동방 교회 내에서는 일방적인 종속 관계보다 교회 권력과 국가 권력의 상호 의존 관계가 지배적이었다고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교의 문제에 대한 절대적인 권한이 황제에게 주어졌던 것도 아닐 뿐더러, 자신의 교의적 입장을 관철하려다 좌절을 겪은 황제도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통 신앙에 충실하지 못한 황제는 폭군으로 치부되었다. 물론 황제 교황주의가 교회에 부정적인 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이는 황제가 자신의 영토와 백성의 일치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수도 있다. (←제정 일치 ; → 갈리아주의 ; 동로마 제국 ; 동방 교회 ; 비잔틴 교회 ; 에피스코팔리즘 ;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 콘스탄틴 대제 ; 폰티펙스 막시무스) ※ 참고문헌 A. Galante, Manuale di diritto ecclesiastico, vol. 2, ed. a cura di A.C. Jemolo, Milano, 1923/ A.C. Jemolo, Lezioni di diritto ecclesiastico dello Stato italiano, Città di Castello, 1933/ V. Del Giudice, Corso di diritto ecclesiastico, Milano, 1946/ E. Friedberg, Trattato del diritto ecclesiastico cattolica ed evangelica, trad. it., P. Hinschius, Esposizione generale delle relasioni tra lo Stato e la Chiesa, Torino, 1894. [全壽洪]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