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주 본당

黃州本堂

글자 크기
12

1902년 5월 설립되었다가 1919년에 폐쇄된 본당. 황해도 황주군 구락면 인훈리 원동 소재. 관할 구역은 황주군 · 서흥군 · 중화군 일대. 〔교 세〕 1903년 1,246명, 1910년 460여 명, 1917년 708명. 〔역대 신부〕 초대 한 기근(韓基根) 바오로(1902. 5~1913. 5), 2대 김윤근(金 允根) 요셉(1913.5~1915.6). 1865년 제4대 조선 대목구장 베르뇌(S.F. Berneux, 張 敬一) 주교가 전교 여행을 다녔을 만큼, 황주 지역은 신앙의 뿌리가 깊은 지역이었다. 그러나 1866년 병인박해 (丙寅迫害)로 큰 타격을 받았고, 이때 '정수니촌' 신자들, 황주 아전의 아들 등이 치명하기도 하였다. 병인박해 로 극심한 피해를 당한 황주 지역의 신앙 공동체는 1890년대 초반까지도 회복되지 못하다가 1898년 5월 황주군 삼전면 철도리에 공소가 설립되면서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당시 청계동 본당의 관할이었던 황주 지역은 매화동 본당의 관할로 이관되었고, 1901년까지 적은동 · 황주읍 · 황토개 · 덕수물 · 돌고개 · 정방 · 갈담 등지에 공소가 설정되었다. 이와 같이 곳곳에 공소가 설 정되고 신자들이 증가하면서 본당의 설립이 추진되어, 1902년 2월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한기근 신부가 신설될 본당의 초대 신부로 부임하였 다. 그러나 한 신부는 본당 사목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2 월부터 5월까지 봉산 검수 본당 이종국(李鍾國, 바오로) 신부의 보좌로 활동하면서 이 신부와 함께 황주 지역의 본당 설정 후보지를 물색하였다. 1902년 5월, 마침내 한 신부는 본당 설정지로 황주읍을 선택하고, 황주읍 남문 밖 외남부 마을에 한옥에 마련하여 황주 본당을 설립하였다. 당시 황주 본당의 관할 지역은 황주군 전역과 봉산 서흥군 일부였으며, 본당 설립 이듬해인 1903년 관 할 공소는 33개이고 신자수는 1,246명이었다. 한편 본당 설립 전후인 1900년부터 1903년까지 3년 간 황해도에서는 지방민과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여, 그 여파가 황주 지역까지 미쳐 1902년 6월에는 박정모(朴貞模) 등이 한 신부의 집을 습격하여 신부와 신자들을 위협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사목 활동에 많은 어려움을 겪은 한 신부는 1904년 2월 본당을 황주군 삼전면 외송리 적은동으로 이전하였다. 그는 황주군에 인접한 평안남도 중화군의 몇몇 공소들을 진남포(鎮南浦) 본당의 포리(J.B. Faurie, 方) 신부로부터 인수받아 관리하였고, 성당 인근에 초가 집을 짓고 신학문을 가르치는 해성학교(海星學校)를 개설하였다. 아울러 본당에 권면회(勸勉會)를 발족시켜 신 자들의 전교 활동을 독려하였다. 그러다가 황주군 구락면 인훈리 원동에 사는 이 알로 이시오가 원동에 성당을 신축하고 신부의 생활비도 부담하겠다는 제안을 하자 한 신부는 본당 발전과 후임 신부 를 위해 1911년 9월 본당을 원동으로 이전하였고, 성당을 신축하는 동안 이 알로이시오의 집에 머물면서 미사를 집전하였다. 1913년 5월에 한 신부가 경향잡지사 제2대 사장으로 임명되어 전임하게 됨에 따라 평안북도 비현 본당의 김윤근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김 신부는 1913년 10월 조선식 기와집에 서양식 내부 구조를 접목한 넓고 큰 성당을 완공하였으며, 매일 저녁 성당에서 신자들에게 교리와 문답을 가르치는 등 사목 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1915년 6월 김 신부가 강원도 이천 망답 본 당으로 전임된 후에도 후임 신부가 배정되지 않아 1918 년까지 사리원 본당의 이기준(李起俊, 토마스) 신부가 사목을 맡아 수행하다가, 1919년 결국 폐쇄되었다. ※ 참고문헌  《한국가톨릭대사전》/ 《병인치명일기》 韓國教會 史研究所 편, 《黃海道 天主教會史》, 黃海道 天主教會史 刊行事業 會, 1984/ 《경향잡지》 1226호(1970. 5). 〔梁仁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