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감목 대리구
黄海道監牧代理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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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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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렴과 머내 사이의 언덕에 세워진 매화동 성당 전경
1928년 1월 21일 설정되어 1942년 1월 18일 폐지될 때까지 황해도를 사목 관할하던 감목 대리구. 〔역대 감목 대리〕 초대 김명제(金命濟, 베드로) 신부(1928. 1~1942. 1). 〔교 세〕 1928년 7,361명, 1944년 12,853명. I. 천주교의 전파와 박해 황해도 출신 신자가 처음 순교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이다. 당시 평산(平山) 출신 고광성(高光晟)은 서울에 올라와 지내던 1800년 겨울에 손인원(孫仁元)으로부터 권면을 받아 입교하였다가 포졸들에게 붙잡혀 평산으로 이송된 후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에 처형되었다. 봉산(鳳山) 출신 포수(砲手) 황씨는 군영(軍營)에 복귀하기 위하여 상경하였다가 천주교를 알게 되어 입교하였으며, 박해가 시작되자 곧 붙잡혀 봉산으로 이송된 후 순교하였다. 또한 1819년 서울에서 순교한 고 바르바라는 재령 출신이었고, 고광성의 딸인 고순이(高順伊, 바르바라) 성녀는 1839년에 순교하였다. 이처럼 황해도 지방에는 일찍부터 천주교가 알려졌지만, 본격적으로 신자 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1860년대 초 신천(信川) 출신 이덕보(李德甫, 마태오)의 선교 활동에 의해서였다. 그는 서울에서 교리를 배우고 1862년 경 베르뇌(S.F. Berneux, 長敬一)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고향에서 선교를 하여 수십 명을 영세시켰으며, 백천(白川) 출신 이의송(李義松, 프란치스코)과 함께 황해도를 순회하며 12개 마을에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시기에 수안 출신 김기호(金起浩, 요한)와 신천 출신 박내호(朴來浩, 사도 요한)도 주위의 많은 외교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켰다. 이처럼 황해도의 선교 활동이 활발해지자, 1863년 9월 초 베르뇌 주교가 황해도를 직접 방문하여 그해 11월 말까지 사목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시작되면서 황해도 지방의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희생되었다. 즉 1866년 3월 새남터에서 순교한 서흥(瑞興) 출신의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 성인을 비롯하여 이의송과 부인 김이쁜(마리아), 아들 이붕익(李鵬翼, 베드로) 박내호는 10월에 양화진(楊花鎮)에서 순교하였고, 해주에서는 백자정, 조 서방, 이성도(아우구스티노), 권 서방, 이 서방과 그의 동생, 정군칠, 정토마스, 이 시몬, 안 서방, 이학대, 김 베드로, 김영백(시몬), 김택보(마르코), 이심여(요한), 이여도, 최운학 등이 순교하였다. 그리고 황주(黃州)에서는 황주 아전의 아들과 그의 친구, 풍천(豊川)에서는 이 초시(初試), 곡산(谷山)에서는 고 첨지와 그의 아내, 수안에서는 이길준(요한), 서흥에서는 김여선 등이 순교하였다. Ⅱ. 황해도 천주교회의 발전과 시련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 1877년 9월 로베르(A.P. Robert, 金保祿) 신부와 두세(C.-E. Doucet, 丁加彌) 신부 등 이 입국하여 선교 활동을 전개하면서, 황해도 지방은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하였다. 로베르 신부는 당시 백천에 있던 김기호에게서 한국어와 관습을 배워 익히면서 선교활동을 하였고, 두세 신부는 구월산(九月山) 등지에서 신자들에게 성사를 베풀었다. 이어 1880년 11월 조선에 입국한 리우빌(L.N.A. Liouville, 柳達榮) 신부는 극락리(極樂里)에 머물면서 풍천, 은율(殷栗), 백천 등지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이들 선교사들은 입국 과정에서 황해도에 잠시 머물러 선교 활동을 한 것일 뿐, 황해도 지방의 사목을 전담한 것은 아니었다. 1883년에 마침내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의 사목을 전담하기 위해 푸아넬(V.L. Poisnel, 朴道行) 신부가 부임하여, 수안의 진고개에 정착한 후 선교 활동에 진력하여 1884년에 성인 61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 후임으로 1885년 진고개에 부임한 쿠데르(V. Couderc, 具瑪瑟) 신부는 콜레라와 심한 기근으로 피폐해진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의 복구 작업에 참여하며 교세를 확장시켰고, 그의 선교로 1887년까지 장련의 금복이 · 창바위 · 중골 등지에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1887년 부임한 로(J.L. Rault, 盧若望) 신부는 장련 금복이에 정착하여 구월산 주위에 5개의 공소를 세우고 40여 명의 예비자들에게 영세를 주었으며, 1889년 수안으로 거처를 옮겨 100여 명의 어른에게 영세를 주었고, 마을마다 학교를 세워 한글과 교리를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892년 6월까지 황해도의 신자수는 611명에 이르렀고, 황해도 서부 지역인 안악의 마렴, 장연의 두섭, 문화의 아현 등에 공소가 설치되었다. 1893년 4월에 6년 동안 황해도 지방에서 활발한 선교 활동을 벌여 나가던 로 신부가 원산으로 전임되자, 후임으로 르 장드르(L.G.A.A. Le Gendre, 崔昌根) 신부가 부임하였다. 수안 덕골에 거처를 정한 르 장드르 신부의 선교 활동으로 수안의 효자동에 또 하나의 공소가 설치되었고, 마렴 공소는 신자수 99명의 황해도에서 가장 큰 공소로 성장하였다. 1894년에 동학 농민 운동이 발생하자 르 장드르 신부는 잠시 서울로 피신하였다가 이듬해 다시 돌아와 동학 농민군으로부터 지방관과 주민들을 보호 하였는데, 이러한 활동은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에서 개종 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특히 평안도 숙천(肅川)과 안주(安州)에서 천주교 개종 운동이 두드러지자, 르 장드르 신부는 이들 지역의 신자들을 좀 더 가까이에서 사목하기 위해 1895년 9월 거주지를 수안의 덕골에서 평양 외성(外城)으로 옮겼다. 그는 선교사 한 명이 두 도(道)를 담당하고 있고, 또 선교의 중심지인 선교사의 거처를 잘못 택하였기 때문에 다른 지방에 비해 이 지역의 발전이 뒤쳐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그는 황해도 서부 지역의 10개 공소, 즉 안악의 안흘, 마렴, 상촌, 장련의 인덕동, 송화, 장연의 두섭, 은율, 문화, 신천의 신설도, 재령 등을 하나의 선교 지역으로 하고 나머지 평안도의 6개 공소와 황해도의 동부 지역인 수안의 4개 공소를 합하여 또 하나의 선교 지역으로 할 것과, 선교사의 거처도 안악과 평양으로 정할 것을 교구장에게 제의하였다. 선교 지역 구분 기준은 교통의 편의를 전제로 한 것으로, 황해도 동부 지역인 수안 지방이 평안도에 편입된 것은 이 지방이 평양으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이며 황해도의 서부 지역을 하나로 묶는 동시에 안악을 선교 중심지로 삼으려 한 것은 마렴이 가장 크고 가장 활발한 공소였고 동료 선교사가 있는 평양에도 쉽게 왕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본당의 설립〕 1895년 9월 르 장드르 신부가 평양 외성(外城)에 정착함으로써 황해도와 평안도가 분리되었으나, 황해도에 선교사가 파견된 것은 1년 후인 1896년이었다. 8월에 빌렘(N.J.M. Wilhelm, 洪錫九) 신부가 황해도 최초의 본당인 마렴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것이다. 마렴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된 이유는 평양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고 교통이 편하며, 안악 지방 천주교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부임 첫 해인 1896년 8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300여 명이 영세를 받았고 마렴 본당 관할 공소의 신자는 800여 명으로 증가하였지만, 빌렘 신부는 보다 좋은 본당의 입지 조건을 찾아 1897년 여름에 마렴 본당을 폐지하고 용문면 매화동(玫花洞)으로 본당을 이전하였다. 이듬해인 1898년에는 후임자인 우도(P. Oudot, 吳保祿) 신부에게 매화동 본당을 맡기고, 빌렘 신부는 신천군 두라방 청계동(淸溪洞)으로 거처를 옮겨 청계동 본당을 새로 설립하였다. 당시 이 지역의 세력가이자 우국지사인 안태훈(安泰勳, 베드로)과 그 가족들을 중심으로 개종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1898년 7월에는 장연 본당이 설립되어 초대 주임으로 파이야스(C.-C.-P. Philhasse, 河敬朝) 신부가 부임하였고, 1899년 5월에는 재령 본당이 설립되어 초대 주임으로 르 각(C.J.A. Le Gac, 郭元良) 신부가 부임하였다. 이어 1902년 5월에는 은율 본당이 설립되어 초대 주임으로 르 장드르 신부가, 같은 시기에 황주 본당이 설립되어 주임 신부로 한기근(韓基根, 바오로) 신부가 부임하였다. 〔해서 교안〕 황해도에서의 천주교 신자가 크게 증가함에 따라 지방관과 향반 토호층, 특권 상인층들은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교회 측과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896년 12월 해주 관찰부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단속하라는 훈령이 잇달아 내려오자, 포교 중심지였던 신천과 안악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97년 신천 군수가 천주교 신자를 잡아 다스리자, 안태훈이 신자들을 모아 군수 대신 향장(鄕長)을 잡아들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안태훈이 체포되었으나 빌렘 신부 가 군수에게 항의하고 그를 석방시켰다. 또한 1899년 안악군의 교졸(校卒)이 천주교 신자 4명에게 도적 혐의를 씌워 체포하자 이 역시 빌렘 신부가 강력하게 항의하고 사건에 개입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이러한 천주교회와 관 · 민과의 충돌은 1900년 이후 해주, 재령, 서흥, 장연, 신천, 송화 등 황해도의 각 지역에서 발생하였다. 게다가 천주교에 대해 적대적인 이용직(李容植)이 1902년 6월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고 또한 천주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대립이 고조되면서, 해서 교안(海西敎案)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902년 6월에는 상무사(商務社) 두령(頭領)인 박정모(朴貞模)가 황주 본당 한기근 신부의 사제관을 습격하여 신부와 신자들을 위협하였으며, 1902년 5월과 8월에는 재령에서 천주교 신자와 프로테스탄트 신자들 간에 경제적 이해 관계가 얽힌 충돌이 발생하였다. 이 밖에 1903년 서흥에서 수세(收稅) 문제로 천주교회와 향반 토호층이 대립하였던 사건과 이종국(李鍾國, 바오로) 신부가 관권(官權)을 능멸한 사건 등, 다양한 양태로 교안이 발생하였다. 교안이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1903년 1월 정부에서는 사핵사(査覈使) 이응익(李應翼)을 파견하였고, 교회 측에서는 두세 신부를, 이어서 프랑스 공사관에서는 서기관 테시에(S. Teissier, 秀乙郎)를 조정자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정 노력은 실패하고 사핵사는 해서 교안에 연루된 신자 다수를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 하지만 1904년 프랑스 공사와 외부대신 사이에 선교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교안은 점차 진정되었고, 선교사들은 임지로 돌아가 다시 활동을 전개하였다. 해서 교안으로 황해도 지방의 천주교회는 큰 타격을 입어 신자들의 3분의 2가 배교하거나 냉담하였으며, 특히 교안이 집중되었던 청계동 본당, 재령 본당, 황주 본당 등의 신자수는 급속도로 격감하였다. 반면에 프로테스탄트는 재령을 중심으로 하여 교안 이후 급속한 성장을 거두었다. 하지만 교안이 진정되면서 다시 선교사들의 전교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천주교의 교세는 다시 꾸준히 증가하였고, 그 결과 1912년 9월 해주 본당, 1915년 9월 서흥 본당, 1916년 6월 사리원 본당, 1925년 5월 사창 본당 등이 설립되었다. 〔교육을 통한 선교 활동의 전개〕 교육 사업의 중요성을 인식한 서양 선교사 및 한국인 신부들이 초등학교를 설립하고 뜻 있는 평신도들 또한 자발적으로 교육 사업을 일으키고 후원하여, 본당뿐 아니라 산간벽지의 공소에까지 학교가 세워졌다. 황해도 지방 천주교회가 세운 최초의 학교는 1898~1899년에 매화동 본당 우도 신부가 종교 교육과 문맹 퇴치를 위해 개설한 봉삼학교(奉三學校)로, 설립 초기에는 신자 및 예비자 자녀들을 대상으로 교리와 한문을 가르치다가 1906년부터 신학문을 가르치는 초등 교육 기관으로 탈바꿈하였다. 그 이후 경애학교(敬愛學校, 장연 본당, 1907), 일신학교(日新學校, 신천군 노월면 마명동 공소, 1907), 월산학교(月山學校, 문화군 아현 공소, 1907), 명신학교(明新學校, 송화 공소, 1908), 봉양학교(鳳陽學校, 봉산 은파 공소, 1908), 숭희학교(崇熙學校, 수안 사창 공소, 1908) , 해성학교(海星學校, 봉산 검수, 1909), 인성학교(仁成學校, 송화 풍천, 1909), 정심학교(靜心學校, 장연군 낙도면 도습동 공소, 1907~1909?), 장흥학교(長興學校, 장연군 장연면 장방동 공소, 1907~1909?) 등이 설립되었으며, 봉삼학교, 경애학교, 명성학원 등은 여자부를 병설하여 여성들에게도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하지만 이들 학교 중에서 1945년 광복 때까지 유지된 학교는 봉삼학교, 경애학교, 해성학교(강습소), 명성학원뿐이고, 나머지 학교들은 인가를 받지 못하거나 경영상의 어려움으로 모두 이전에 폐지되었다. 황해도 내 여러 본당에서는 일반 유지들의 권유와 지원을 받아 학교뿐만이 아니라 유치원도 설립 운영하였다. 대부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운영을 맡았고, 교육도 수녀들과 유자격 보모들이 담당하였다. 1920년 3월 해주 공소에서 장연 본당 김명제 신부의 후원과 주선으로 유치학교(幼稚學校)란 이름의 유치원을 설립하여 보통학교 전의 아동들에게 한글과 교리 등을 가르쳤고, 이 밖에 경애유치원(敬愛幼稚園, 장연 본당, 1917~1922년 사이에 설립), 봉삼유치원(奉三幼稚園, 매화동 본 당, 1926) 등이 설립되었다. 〔독립 운동〕 1905년 을사 보호 조약(乙巳保護條約) 체결 이후 일제는 토지 조사 사업 등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한국에 막대한 차관을 제공하였지만, 당시 한국의 재정으로는 국채를 상환할 능력이 없었다. 이에 1907년부터 외채를 상환하여 일제의 침략을 막고 국권을 회복하자는 모금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으며, 황해도 신자들도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봉산 검수, 서흥, 평산, 신천, 장연, 백천, 안악, 장련, 곡산 등지에서 경향 신문사에 성금을 기탁하였다. 이처럼 국채 보상 운동을 비롯하여 다각적으로 국권 회복 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일제에 의한 한국 병합이 현실화되자 황해도 지방의 천주교 신자들은 독립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안중근(安重根, 토마스)은 1906년 진남포(鎮南浦)에서 삼흥학교(三興學校)와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설립하여 교육 사업을 전개하였고, 1909년 10월 26일 초대 조선 통감을 역임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하였다. 한편 한일 합방 직후인 1910~1911년에는 항일 민족 운동의 거점이었던 안악에서 항일 민족운동가들에 대한 대규모 검거가 있었는데, 이때 독립군 양성을 계획하고 자금을 모으던 안명근(安明根, 야고보)을 비롯하여 원행섭(元行燮, 타대오), 한순직(韓淳稷), 최익형(崔益馨) 등이 구속되었다. 그 외 황해도 지방 출신 독립 운동가로는 장연 출신으로 교육자이자 교회 회장이던 장규섭(張奎燮, 바오로), 신천 출신으로 독립 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른 김경두(金慶斗, 요한) 등이 있다. 장규섭은 1908년 장연군 사립 우신학교(又新學校)에서 교사로 재임할 당시 학생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치다가 일본인 교장과 언쟁을 벌이고 사임하는 등 학생들에게 애국 정신을 심어 주는 데 힘썼고, 1921년경 상해 임시 정부 적십자사의 황해도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독립군 자금을 모금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투옥되기도 하였다. 김경두는 3 · 1 운동이 일어나자 동지들과 함께 800여 명의 군중을 조직하여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출감한 이후에는 독립 운동 단체인 의혈단(義血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와 같이 주로 신자들을 중심으로 독립 운동이 전개되었지만, 청년들에게 독립 사상을 고취시키고 동료 신부들과 신자들에게 독립 운동에 협력할 것을 권유하여 상해 임시 정부의 군자금을 모은 은율 본당의 윤예원(尹禮源, 토마스) 신부처럼 독립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성직자도 있었다. Ⅲ. 감목 대리구의 설립과 폐지 〔감목 대리구의 설립〕 서울 대목구장 위텔 주교(G.-C.-M. Mutel, 閔德孝)는 1928년 1월 21일자 교서로 황해도를 서울 대목구에 속한 감목 대리구(監牧代理區, Vicariatus Foraneus)로 설정하고, 초대 감목 대리에 장연 본당 주임 김명제 신부를 임명하였다. 감목 대리구의 설정은 장차 한국인 주교를 탄생시켜 자치 교구로 승격시키려는 교회의 토착화를 전제로 한 것으로, 한국 교회 창설 140여 년 만에 최초로 시행된 제도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신자들은 감목 대리구를 '준교구' (準敎區)로 호칭하면서 후원을 아끼지 않았고, 황해도 내 본당들은 물론 서울 종현(현 명동) 본당 등 여러 본당에서도 축하 미사를 봉헌하였다. 감목 대리구 설정 당시 황해도 지방에는 본당이 7개(매화동, 장연, 재령, 은율, 사리원, 해주, 사창), 성직자는 8명(김명제, 이선용〔李善用, 바오로〕, 신성우〔申聖雨, 마르코〕, 이보환〔李普煥, 요셉〕, 백남희〔白南熙, 베드로〕, 이순성〔李順成, 안드레아〕, 박정렬〔朴貞烈, 바오로〕, 퀴를리에〔J.J.L. Curlier, 南一良〕)이었으며 1928년도 보고서에 따르면 신자수는 7,361명이었다. 〔감목 대리구의 발전〕 김명제 감목 대리는 각 본당을 순방하며 신자들에게 감목 대리구 설정의 의의를 설명하고, 장차 자치교구로의 승격에 대비한 신자들의 본분을 역설하였다. 그는 신자들에게 교회 자립 정신을 고취시켰고 전교 활동을 합리적이고 조직적으로 전개함으로써 자치 교구 승격에 대비한 교회 공동체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하여, 1928년 3월 7일 '황해도 감목 대리구 자치 기성회(自治期成會)' 를 조직하고 3월 9일자로 15세 이상의 신자는 의무적으로 입회할 것을 권고하는 권유서를 발표하였다. 이어 3월 27일에는 재령 본당에서 제2차 황해도 각 본당 및 주요 공소 대표자 회의를 소집하여 자치 기성회 임원을 선출하는 한편 창립 총회 때 제정한 회칙을 수정하였다. 임원은 총재에 감목 대리 김명제 신부, 회장에 임영익(林英益) 서무부장에 박정걸(朴挺傑) 재무부장에 서경순(徐敬淳), 서기에 홍영섭(洪永燮) 등이 었으며, 각 본당 대표는 장연 본당 최봉구(崔鳳九), 박예규(朴禮奎), 곡산 본당 장위창(張渭昌), 수안 본당 박승희(朴承熙), 사리원 본당 김계선(金啓善), 재령 본당 김찬호(金燦浩), 해주 본당 최원희(崔遠熙) 안악 본당 최익형(崔益馨) 등이다. 자치 기성회는 장연 본당에 본부를 두고 각 본당과 공소에 분회를 설치하였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분회는 1928년 10월에 결성된 송화군 하리면 안농리 농암촌 공소 분회(회장 장창호(안토니오))였다. 1928년 4월 27일에 자치 기성회 각 지부장과 분회장들의 회의가 '신자 대회' 라는 이름으로 사리원 본당에서 개최되어, 앞서 감목 대리가 각 지방을 방문할 때 제시한 교회 현안들을 토의하였다. 김명제 신부는 황해도에서만이 아니라 전에 사목하던 경상도 지방까지 가서 자치 기성회 설립 취지를 계몽하고 회원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한편 감목 대리구의 설립 이후 본당 설립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1928년 5월 곡산 본당과 삼차동 본당, 1930년 6월 신천 본당, 1936년 5월 안악 본당, 1938년 5월 연안 본당, 1939년 5월 장련 본당과 옹진 본당, 같은 해 7월 송화 본당과 송림 본당 등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각 본당에서 교육 사업을 추진하여 1929년 은율 본당에서는 가난한 아이들에게 초등 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해성야학원(海星夜學院)을 개원하였고, 1933년 곡산 본당에서 소화유치원(小花幼稚園), 1936년 신천 본당에서 미화유치원(薇花幼稚園), , 1937년 사리원 본당에서 봉화유치원(鳳和幼稚園) 등을 설립하였다. 재령 본당에서는 1930년대 후반~1940년대 초반 사이에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아이들을 위해 《중등강의록》으로 중학 과정을 가르치는 사설 학교를 개설하였다. 또한 순교자 현양 사업도 전개하여 1938년 은율 본당에서는 순교자 이달회(李達晦, 베드로)의 후손들의 증언을 듣고 본당 관내인 송화군 천동면 대야리에 있는 이달 회의 무덤을 참배하였으며 이어 1939년 6월에는 기해박해(己亥迫害) 백 주년을 맞아 은율 본당이 주축이 되어 구월산에서 순교자 현양 행사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윤의병(尹義炳, 바오로) 신부와 신자들이 은율군 서부면 장암리 후편 야산 중턱에 있는 치명자 황 모의 묘소를 참배하고 묘비를 건립하였다. 이 밖에 1931년 10월 조선 대목구 설정 100주년 경축 대회에 참석한 일본 주재 교황 사절 무니(E.F. Mooney, 1882~1958) 주교가 감목 대리구 본당인 장연 본당을 방문하였고, 1934년 5월 황해도에서는 처음으로 장연 본당에서 성체 거동 행사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1933년 2월에는 3년 만에 주임 신부가 부임하여 재령 본당이 그 기능을 회복하였고, 1935년 11월 삼차동 본당이 정봉으로 이전되어 '정봉 본당' 으로 개칭되었으며, 1939년 사창 본당이 폐쇄 11년 만에 다시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1940년 9월 재령 본당에서는 성심의원을 개원하여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운영을 맡겼고, 후일 성심의원을 무료 진료소로 개설하여 지역 주민들에게 의료 봉사를 실시하였다. 〔감목 대리구의 폐지〕 감목 대리 김명제 신부는 황해도를 자치 교구로 승격시키기 위하여 정상적인 성무 집행 외에 본당 내에 평신도 단체를 결성하여 신심 운동을 일으키는 한편 교육 · 건축 · 개간 사업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계획을 수립하고 실천에 옮겼다. 그는 특히 교육과 건축 사업에 역점을 두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장연 경애학교(敬愛學校)의 육성과 황해도 각 본당에 교회를 건축하는 사업이었다. 하지만 의욕적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업적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주요 사항들을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집행하는 등 몇 가지 문제들이 있어 각 본당 신부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6년 5월 사리원 본당에 부임한 김명제 신부는 황해도가 독립 교구로 승격될 것에 대비하여 주교좌 성당으로 설계한 새 성당을 건축하였다. 그러던 중 1942년 1월 3일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가 서울 대목구장 겸 평양 · 춘천 지목구장 서리로 임명되고, 1월 5일 라리보(A.J. Larribeau, 元亨根) 주교가 교구장직에서 사임하였다. 같은 해 1월 18일 노기남 주교와 윤형중(尹亨重, 마태오) · 이복영(李福永, 요셉) · 강주희(姜周熙, 방그라시오) · 유영근(俞榮根, 요한) 신부 등이 참석한 교구 참사회의에서 황해도 감목 대리구 제도의 폐지가 결정되었고, 이에 김명제 신부는 감목 대리직에서 자동 해임되었다. 서울 대목구에 한국인 주교가 임명되었으므로 본래 한국인 교구 설정을 목적으로 설정되었던 황해도 감목 대리구가 그 의미를 상실하였고, 자치 교구로 승격된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정세로 보아 일본인 주교가 임명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감목 대리구가 폐지된 뒤에는 노기남 주교가 직접 황해도를 관리하였으나, 1945년 해방 후부터 교구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게 되자 사리원 본당의 박우철(朴遇哲, 바오로) 신부가 교구장을 대리하여 황해도 천주교회를 감독하였다. 그러나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이후, 과거 황해도 감목 대리구 소속이었던 대부분의 본당들은 침묵의 교회가 되었다. ※ 참고문헌 韓國教會史研究所 編, 《黃海道 天主教會史》, 黃海道 天主敎會史刊行事業會, 1984/ 《서울敎區年報》Ⅱ, 明洞天主教會, 1987/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샬트르 성바오 로 수녀회, 1991/ 朴贊殖, <韓末 天主教會와 鄕村社會>, 서강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95/ 崔奭祐, <일제하 한국천주교회의독립 운동>, 《敎會史研究》 11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車基真, <安重根의 천주교 신앙과 그 영향>, 《教會史研究》 16집, 한국교회사연구소, 2001/ 방상근, <19세기 중반 한국 천주교사 연구>, 경희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4. [呂珍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