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이 경신례를 거행할 목적으로 모이는 장소 또는 기도처. 제2 성전 시대(기원전 536~서기 70)에는 경신례를 드리고자 모이는 회중이나 회중이 모이는 장소 모두를 의미하였다.
회당은 본래 어떤 장소나 건물이라기보다는 경배와 종교적 목적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나 집단을 일컫는 것으로, 특히 서기 1세기에는 팔레스티나 유대인들의 생활의 중심이 되는 매우 중요한 기관이었다. 《예루살렘 탈무드》(Jerusalem Talmud)는 로마 제국의 황제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69~79) 시대에 예루살렘에 회당이 480개가 있었다고 전하며, 같은 시기에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천 개가 넘는 회당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Brinbaum, Jewish Concepts, 81). 또 제2 성전 시대에는 예루 살렘에만 회당이 365개나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Wilkinson, 1976). 1913~1914년에 발굴된 서기 1세기경의 유물로 추정되는 그리스어 비문에는 그 시대의 회당이 수행한 여러 기능이 기술되어 있으며(Levine, 1987), 요세푸스(F. Josephus, 37/38~100?) 또한 제2 성전시대에 성서 읽기와 학문의 중심지가 회당이었음을 강조하였다(《아피온 반박》 2. 175). 신약성서에서는 이를 예수와 바오로의 회당 방문을 통하여 암시하고 있다. 그 시대에 그들은 모세 오경이나 예언서 같은 성문서를 읽고 해 석하였다(루가 4, 16-22 ; 사도 13, 13-16).
〔기 원〕 회당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구약성서나 신약성서 어느 곳에도 회당의 기원을 암시하는 구절은 없으며, 성서 밖의 자료들(외경이나 비문 등) 또한 마찬가지이다. 랍비 문헌들은 회당의 기원과 활동을 모세와 에즈라에 연결시킨다(《예루살렘 탈무드》 메길라4. 1 차명 요나단 타르굼 출애 18, 20). 그러나 회당이라는 용어가 모세와 에즈라 시대에는 사용되지 않았으며, 율법을 듣기 위해 회중이 모였다고 해서 회당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회당이 유배 시기에 바빌론에서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과 성전이 함락되고 유대인들의 바빌론 유배가 시작되면서, 성전과 나라를 잃은 유대인들은 사독 계열의 사제(하개 1, 1) 밑에서 경전을 수집하고 필사해야 하였다. 더군다나 나그네살이를 하던 유대인들에게 닥친 또 다른 문제는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곳에서 어떻게 제사를 지내느냐 하는 것이었다. 부정한 곳으로 여겨지던 이방인의 땅에서 희생 제사를 올릴 수는 없었다. 많은 학자들은 "주 하느님 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그들이 가있는 여러 나라에서 얼마간 그들에게 성전(מַקֵרָּשׁ)이 되어 주겠다"(에제 11, 16)라는 내용을 바탕으로 에제키엘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신례를 지낼 지역과 장소를 설립하는 데 주축이 되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다른 학자들은 예레미야서에 나오는 모임 장소, 즉 "민가" (בַּיִת, a39, 8)가 성전을 잃은 유대인들에게 경신례를 위한 장소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유배 상황이 어떠했든지간에 기원전 538년 본국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많은 어려움이 있기는 하였지만(하께 2, 1-9) 성전 재건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회당이 성전을 대신하였다는 암시는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에즈라, 느헤미야, 유배 이후의 예언서에서도 역시 회당에 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
한편, 이스라엘로 돌아가지 않고 바빌론에 남아 예루살렘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유대인들에게 있어 기도는 제사를 대신할 만큼 중요시되었다. 유배 이후의 예언서들, 제2 경전과 위경, 쿰란 문서들에서 제2 성전 시대 초기에 기도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그리하여 일부 랍비들은 "기도가 모든 희생 제사보다 더 중요하다"(《탄후마 레위》 1, f. 31b)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여러 문서들을 살펴보면 이들 유대인 공동체는 성전이 없는 곳에서도 신앙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유지시키는 데 성공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회당이 사회 구조나 제도로 기능하였음을 밝혀 주는 문서나 고고학적 자료들은 없다. 또한 성전 경신례와 성전 재건립을 강력히 추진하였던 에제키엘(에제 40-48장)이 예루살렘 성전을 대신하는 장소를 설립하고자 하였을 것이라는 가정에는 신빙성이 없다.
서기 1세기 이후부터 회당에 관해 증언하는 문헌들이 많이 발견되는데, 필론(Philon Alexandrinus, 기원전 20?~서기 50?)은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 많은 회당이 있었다고 하였다(《가이우스 사절단》 132 이하). 요세푸스는 티베리아(Tiberiadis)와 가이사리아(Caesaria)에 있는 회당들을 언급하였고, 신약성서에는 팔레스티나에 있는 나자렛(루가 4, 16)과 가파르나움(마르 1, 21), 디아스포라 (Diaspora)에 있는 다마스쿠스(사도 9, 2), 살라미스(13, 5),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13, 14), 이고니온(14, 1), 데살로니카(17, 1), 베레아(17, 10), 아테네(17, 17), 고린토(18, 4), 에페소(18, 19) 등이 등장한다.
바빌론 유배기에 유대인들이 함께 모여 성서를 읽고 낭독하며 야훼를 경배하던 회당은 재난과 몰락을 경험한 백성들이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최근에 발견된 시나이의 쿤틸레트 아즈루드(Kuntillet Ajrud)나 쉐펠라의 라기스(Lachish) 같은 예루살렘 밖의 여러 성소는 중앙 집중화된 경신례를 민간 신앙 차원에서 다시 비추어 보고자 하는 신명기적 개혁의 결과를 암시한다. 페르시아 시대에 이집트의 엘레판틴, 헬레니즘 시대의 레온토폴리스, 그리짐 산의 사마리아 성전같이 팔레 스티나 밖에 경신례를 위한 중심지가 있었다는 사실은 앞에서 언급한 민간 신앙 차원의 종교 활동이 제2 성전시대에 널리 확산되었음을 알려 준다. 이런 의미에서 이집트 파음에서 발견된 기원전 3세기경의 그리스어 비문에 회당이 언급되어 있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한 경신례 중심지와 초기 회당들은 헬레니즘 시대부터 함께 존재하였다. 이 기간 동안 예루살렘 성전의 유일성은 지켜질 수 없었지만, 팔레스티나와 유배된 유대인들의 삶의 중심지가 여전히 예루살렘 성전이었음은 의심
할 여지가 없다.
〔용 어〕 회당을 가리키는 여러 용어를 살펴보면 당시 회당이 어떠한 기능을 수행하였는지 유추해 볼 수 있다. 최초의 용어들은 제2 성전 시대에 사용된 그리스어 '시나고게' (συναγωγή, 회중의 집)와 '프로세우케' (προσευχή, 기도의 집)이다. '시나고게' 는 칠십인역 성서에서 히브리어 '에다흐' (עֵדָה)를 그리스어로 옮긴 것으로, 천사(시편 82, 1)나 사람(7, 8), 또는 동물(68, 31 : 판관 14, 8)의 '집단' 을 일컫는 말이다. 히브리어에서 '집회, 소집, 모임' 등을 가리키는 '카할' (קָהָל)을 번역한 용어이기도 한데, '카할' 은 보통 '에클레시아' (ἐκκλησία)로 옮겨졌다. '시나고게' 는 주로 경배를 목적으로 모인 종교 공동체나 국가적 차원에서 입법의 목적으로 모인 이스라엘 회중 전부를 가리켰으나 제2 경전과 위경에서 지역적 '회중' 을 뜻하는 말로 나와(집회 4, 7 ; 《솔로몬의 송가》 10, 7 ; 17, 16), 그 의미가 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경전과 제2 경전, 외경을 통틀어 '시나고게' 가 회중이 모인 장소나 건물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 적은 없으나, 신약성서에서는 보통 회중이 모이는 건물을 가리킨다(마태오 9번 : 마르코 8번 ; 루가 15번 ; 요한 2번 : 사도행전 16번 ;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19. 6. 3).
히브리어 '기도하는 집' (בַּיִת בֵּמַּלָּה: 이사 56, 7)에 대응하는 '프로세우케' 는 신약성서에서 "기도의 집"(οί͂κος : 마태 21, 13 등), 또는 단순히 "기도처"(προσευχή : 사도 16, 13. 16)로 나온다. 제2 성전 시대에 공동체보다 개인 기도가 발달하였다는 주장에는 논의의 여지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자들은 '프로세우케' 가 기원전 3세기경부터 유행한 더 오래된 용어라고 주장한다. 어쨌든 '시나고게' 는 서기 초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여 2세기에는 '프로세우케' 를 대신하게 되었다. 헹겔(M. Hengel)은 '프로세우케' 가 특별히 디아스포라 회당을 가리키는 데 반해서 '시나고게' 는 신약성서와 요세푸스와 랍비 문헌들에서 팔레스티나 회당을 암시한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이 두 용어를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회당을 가리키는 그리스어 용어가 하나가 아닌 이유는, 팔레스티나와 디아스포라 두 지역에서 회당이 수행하였던 기능이 여러 가지였기 때문이며, 또한 유대인과 비유대인이 그들 사회에서 회당의 역할을 어떻게 이해하였느냐의 차이에서 오는 결과이기도 하다. 서기 70년 이후에 회당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 아람어 용어가 다양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70년 이후 회당이 급속도로 늘어나면서, 그것을 가리키는 용어는 그 안에서 이루어지던 다양한 공동체 생활상을 반영해 주었던 것이다. 2세기에 들어오면서 회당의 전례 활동은 문서화되고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디아스포라와 이스라엘-팔레스티나의 회당〕 디아스포라에서 가장 오래된 회당은 그리스의 작은 섬인 델로스(Delos)에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기원전 2세기에 자유 무역항이었던 델로스에 그리스어를 말할 줄 아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많이 옮겨와 살면서 기원전 1세기 무렵 회당이 건립된 것이다. 이곳에서 발굴된 건물 잔해가 과연 회당 유적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었으나, 현재는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크다.
소아시아의 에게 해변 프리에네(Priene)에서 발견된 작은 교회 형태의 건물은 서기 3~4세기경의 회당이었음이 밝혀졌으며, 촛대들을 양쪽에 조각한 벽감(壁龕, niche)이 토라 두루마리를 두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소아시아의 가장 큰 유대인 공동체는 사르디스(Sardis)에 있었다. 거대한 장방형의 사르디스 회당은 서기 2~3세기경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며 616년에 무너졌는데, 가장 잘 보존된 유적이며 그 발굴에 관한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서기 3세기경 마케도니아(Macedonia)에 있던 폴리카르모스 회당 또한 매우 중요하며, 서기 4세기경의 마케도니아 회당은 바닥을 모자이크로 처리하고 벽에는 프레스코 벽화를 그려 넣은 장대한 건물이었다. 고대 로마의 항구였던 오스티아(Osia)에도 서기 4세기 형식의, 중앙 연단이 출입구 정면에 있으며 토라를 넣어 두던 거대한 성감(聖龕)이 있었던 회당이 잘 보존되어 있다.
동방 디아스포라를 대표하는 회당은 시리아 유프라테스 강 서쪽에 위치한 두라-에우로포스(Dura-Europos)에서 발굴된 회당이다. 두라-에우로포스는 256년에 멸망하였으나 회당 유적지는 잘 보존되어 있다. 토라 성감이 있는 이 거대한 회당은 이집트 탈출 이야기, 엘리야 예언자가 과부를 살린 이야기, 사무엘이 다윗을 임금으로 세운 이야기, 불레셋인들이 계약의 궤를 탈취한 이야기 등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려 넣은 아름다운 벽화로 유명하다. 가장 유명한 것 가운데 하나는 당신의 백성을 유배 생활에서 해방하고 예루살렘 재건을 약속하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적힌 에제키엘의 두루마리에 관한 그림이다. 회당 벽화는 3세기의 유대교를 이해하고 회당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두라에서 발견된 건물과 유사하고 이교 건축 양식을 띠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당시의 다신 신앙 풍조를 엿볼 수 있다.
그리스-로마 디아스포라 회당들의 경우, 다양한 건축양식을 보여 주기는 하지만 회당을 장식하는 상징들은 한결같다. 특히 눈에 띄는 점은 토라를 넣어 두는 성감이 벽의 중앙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 조국을 떠나 생활하던 유대인들에게 회당은 '성서 중심의 디아스포라 신학'을 배우고 이를 그리스-로마 사회 안에 새기는 중심축이 되었기에 유대교는 다신 숭배 사회 안에서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남아 서기 7세기에 무슬림에 의해 정복될 때까지 시리아-팔레스티나에서 융성할 수 있었다. 고대 회당들이 그리스-로마 시대에 유대교의 생명력을 암시하는 증거라고 볼 때, 로마 시대 말기로 가면서 팔레스티나의 유대 사회가 몰락하였다는 기존의 주장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회당들은 후대로 가면서 성장하였지만 초기에는 미미하였다. 제2 성전 시대에 이스라엘-팔레스티나에 있던 회당은 감라(Gamla), 마사다(Masada), 헤로디움(Herodium) 등 세 개뿐이었다. 골란고원의 감라에 있는 회당은 제1차 유대 독립 전쟁(66~70) 때 최전방이었던 도시에,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형태로 세워졌다. 삼각형 모양의 건물인 마사다 회당은 언덕의 북서쪽에 위치해 있는데, 예루살렘 쪽으로 나 있는 남동쪽 출입구는 이곳이 신성한 곳임을 암시한다. 예식에서 사용하지 않는 두루마리를 넣어 두었던 회당 북서쪽의 작은 방에서 성서 필사본들이 발견되었다. 헤로디움에 있던 건물도 삼각형 모양으로 마사다 회당과 비슷한 것으로 보아 회당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제2 성전 시대 초기의 회당은 고대 문헌에 기록된 엄청난 수와는 매우 대조적으로 그 수가 매우 적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은 회당을 사회 · 종교적 기관으로서 다른 일반 구조물과 구별되는 건축 형태의 건물로 잘못 이해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2 성전 초기에는 예배와 회중 집회를 위해 특정한 건물 이외에 가정집이 사용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회당' 으로 구별되는 건물이 드물었던 것이다. 팔레스티나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백여 년이 지난 뒤에야 유대인들의 일상 생활에 구심
점 역할을 하는 고유한 회당 건물이 생겨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사실 제2차 유대 독립 전쟁(132~135) 때의 피해는 훨씬 컸기 때문에 팔레스티나의 유대인들은 2세기 중반 이후에야 전쟁의 혼란에서 벗어나 사회 · 경제적 복구를 할 수 있었다. 이때 비로소 회당 건물이 생겨나기 시작하여 당시 유대인이 가장 많았던 갈릴래아에 첫 뿌리를 내린 것이다. 갈릴래아에는 회당으로 사용되었을만한 여러 종류의 건물이 있는데, 건축 양식과 내부 장식은 저마다 다르지만 예루살렘 쪽의 벽에 계약의 궤를 모셔 두는 등 유대인들에게 회당이 어떤 의미였는가를 묘사해 주는 데에는 일치점을 보여 준다. 건축 양식과 내부 장식이 다양한 것은 팔레스티나에서 회당이 세워진 시대와 장소의 특징을 드러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건물 형태와 기능〕 고대 회당들의 건물 구조는 여러 단계를 거쳐 매우 다양하게 변화 · 발전되었다. 토라 두루마리와 낭독자를 위한 중앙 연단(베마)은 보통 후기 회당에만 나타난다. 예를 들어 서기 3세기의 구슈 할라브 회당에는 베마가 없었으나, 4세기에 회당을 확장하면서 이를 만들었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이 회당들의 중요한 공통점은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전통은 구약성서(1열왕 8, 44. 48 : 2역대 6, 34. 38 등)에서 유래한 것 같다.
건물 형태는 낮은 회당 벽이 예루살렘으로 향해 있는 바실리카(Basilica) 양식, 길고 넓은 벽으로 둘러싸인 폭이 넓은 건물 양식(Broadhouse) 아스피달(Aspidal) 양식 등 세 가지로 구분된다. 특히 아스피달 양식은 후기, 즉서기 5~7세기의 지배적인 회당 건축 양식으로, 회당 지도자와 통역자와 낭독자를 위한 넓은 중앙 연단을 갖추어 정교하게 지어진 회당이었다. 최근 발굴된 바에 의하면 이 세 형태의 회당은 시기적으로 구분되었다기보다는 동시대에 공존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상부와 하부 회당이 구분된 회당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회당도 있는데, 이처럼 상부 회당을 따로 둔 이유가 청중 가운데 여자와 남자가 따로 앉아 경신례를 드리기 때문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다. 보통 회당에는 벽을 따라 돌로 만든 긴 의자들이 있었으며, 토라를 넣어 두는 상감도 본래는 들고 다닐 수 있었지만 후대에는 붙박이로 건물 한 부분에 자리하게 되었다.
탈무드에 의하면 회당은 높은 장소에 지어졌고 창문이 있었다고 한다(《예루살렘 탈무드》 메길라 4, 227). 그러나 실제로 회당들이 항상 지리적으로 높은 곳에 세워진 것은 아니고, 강이나 바다 가까이에 위치한 회당들도 많았다. 회당은 전례 장소이지만 동시에 학교이자 문화 공간이기도 하였다. 공동체 구성원의 교육과 징벌을 담당하는 원로들이 회중을 이끌어 가는 우두머리였으며, 유다 공동체의 최고 관리는 회당장이었다(참조 : 마르 5, 22 ; 사도 18, 8 : 23, 15).
회당에서 거행되는 전례는 근본적으로 기도와 토라의 봉독으로 이루어졌는데, 미쉬나(4, 3)에 따르면 먼저 신앙 고백인 '이스라엘아, 들어라!' (שִׁמְע יִשְׂרָאֵל)를 낭송한 후(신명 6, 4-9 : 11, 13-21 ; 민수 15, 37-41) 기도가 이어진다. 기도는 시편과 '18조 기도문' 을 외우는 것이다(2마카 1, 24-25 참조). 세 번째로 토라(오경)를 봉독하고, 그 다음에는 '결론' 이라고 불리는 순서로서 구약성서 중 예언서를 골라 읽었다. 회당 경신례의 마지막은 축복(민수 6, 24-26)으로 끝맺는다. 축복문이 한 구절씩 낭송될 때마다 회중은 '아멘' 으로 응답한다. 이 다섯 가지 주요 부분에 더하여 후에는 성서를 통역하거나 간단한 설명이 덧붙여지기도 하였다. 회당에서 경신례를 드리려면 최소한 성인 남자 열 명은 모여야 한다. 남자 회중은 기도를 인도하거나 성서를 봉독하고 통역할 수 있었다. (⇦ 시나고가 ; → 라기스 ; 사마리아 ; 산헤드린 ; 시나이 반도 ; 유대교 ; 이스라엘 ; 타르굼)
※ 참고문헌 M. Avi-Yonah, Ancient Synagogues, Ariel 32, pp. 29~43/ P. Brinbaum, Daily Prayer Book, Ha-Siddur Ha-Shalem, New York, 1949/ M.J.S. Chiat, Handbook of synagogue Architecture, Brown Judaic Studies 29, Chico, CA/ H. Danby, The Mishnah, Oxford, 1977/G. Foerster, The Synagogue at Masada and Herodium, 《EI》 11, pp. 224~228/ J. Gutmann, The Synagogue : Studies in Origins, Archaeology, andArchitecture, New York, 1975/ M. Hengel, Proseuche and Synagoge, J. Gutman, The Synagogue : Studies in Origins, Archaeology, and Architecture, New York, 1975, pp. 27~54/ A.T. Kraabel, Unity and Diversity among Diaspora Synagogues, L.I. Levine, The Synagogue in Late Antiquity, Philadelphia, 1987, pp. 49~61/ L.I. Levine, The Synagogue in Late Antiquity, Philadelphia, 1987/ E.M. Meyers, Ancient Synagogue in Galilee Their Cultural and Religious Setting,《BA》43, pp. 97~108/ E.M. Meyers · J. Strange · C. Meyers, Archeology, the Rabbis, and Early Christiantiy, Nashville, 1981/ G.F. Moore, Judaism I, Cambridge, 1927, pp. 281~308/ J. Wilkinson, Christian Pilgrims in Jerusalem During the Byzantine Period, 《PEQ》108, pp. 75~101/ R. Zadok, The Jews in Babylonia During the Chaldean and Achaemenian Periods, Haifa, 1979/ 《EJ》 XV, pp. 580~632. 〔姜善男〕
회당
會堂
〔그〕 συναγωγή · 〔라〕 synagoga · 〔영〕 synagogue
글자 크기
12권

1 / 3
고대 회당들의 건물 구조는 매우 다양하게 변화 발전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