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교구 소속 침묵의 본당. 함경북도 회령군 회령읍 소재. 1925년 10월에 창설되었다가 1949년 5월에 폐쇄되어 침묵의 교회가 되었다. 주보는 성 야고보. 〔역대 신부〕 초대 히머(K. Hiemer, 任竭忠) 갈리스도(1926. 1~1931. 11), 2대 그라프(O. Graf, 金大振) 울라프(1931. 11~1938), 3대 치머만(F. Zimmerman, 閔德基) 프리돌린(1938~1942), 4대 파렌코프(W. Farrenkpf, 朴偉明) 비트마로(1942~1945.8 , 5대 구대준(具大浚) 가브리엘(1949. 1~1949. 5).
〔전 사〕 회령 지역에 처음 천주교가 전파된 것은 1890년대 중반으로, 당시 간도(間島)에 거주하던 동학도 김이기(金以器)는 동학(東學)을 가르치면서 제자들에게 천주교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다. 그러다가 동학도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1895년 3월 25일 회령 감옥에서 옥사하고, 그의 제자였던 김영렬(金英烈, 요한)은 스승의 권유대로 천주교를 배우기 위해 1896년 봄 서울로 가던중 원산에서 베르모렐(J. Vermorel, 張若瑟) 신부를 우연히 만나 교리를 배워 5월에 영세를 받고 고향인 간도의 호천개 지역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친척과 동료들에게 전교하던 김영렬은 회령 지역에도 공소를 마련하고 최규녀(崔規汝, 그레고리오) · 유패룡(劉覇龍, 라우렌시오)과 함께 생활하다가 호천개 지역으로 돌아가 입교를 원하는 자들을 회령으로 데려왔다. 그 결과 1897년 초 이지역에는 교우 3명과 예비자 30여 명의 신자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자 1898년 1월 2일 원산 본당의 브레(L.E.A. Bret, 白類斯) 신부가 공소 순방의 일환으로 회령 지방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당시 천주교를 적대시하던 주민들은 교우와 예비자들을 괴롭혔을 뿐만 아니라, 공소로 사용하기 위하여 구입한 집에 교우들이 출입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이에 브레 신부는 회령 부사의 도움으로 공소 문제를 해결하고 교우들에게 성사를 베푼뒤 회령을 떠났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외교인들이 다시 천주교 신자들과 공소를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이를 안 브레 신부는 서울의 뮈텔(G.-C.-M Mutel, 閔德孝)주교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뮈텔 주교는 주한 프랑스 대리 공사였던 플랑시(Collin de Plancy)를 통하여 조선의 외부 대신 이도재(李道宰)에게 항의하고 보상을 요구하여, 1899년 초 회령 공소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후에도 외교인들의 박해가 계속되자 신자들은 간도로 이주하였으며, 이에 1902년 무렵 회령 공소는 폐쇄되었고 이 지역의 신앙은 몇몇 신자들에 의해 명맥만 유지될 뿐이었다.
〔본당 설립 및 활동〕1920년 원산 대목구가 설정되면서 함경남북도 지역은 베네딕도회에서 관할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함경북도에는 본당이 전무한 상태였다. 이에 사우어(B. Sauer, 辛上院) 주교는 간도로 가는 길목에 있는 회령에 본당을 세우기로 결정하고, 1925년 10월 6일 히머 신부에게 회령 지역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히머신부는 회령읍에 부지를 매입한 후 1926년 1월 6일 이주하여 작은 집을 임시 성당 및 사제관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부활절 이후에 본격적으로 성당 공사에 돌입하여 7월 말부터는 새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게 되었는데, 당시 신자수는 약 190명 정도였으며, 1926년 7월부터는 함경북도의 남쪽을 청진 본당으로 이관하였다. 또한 히머 신부는 장례식 봉사가 병원과 학교를 지어 봉사하는 것만큼의 전교 효과가 있다고 판단하여 1927년부터 장례식 봉사를 시작하였으며, 이어 1928년에는 본당 옆 부지를 구입하여 성당을 증축하는 한편 새 부지에 딸려 있던 가옥으로 사제관을 옮겼다. 이 무렵 회령 본당의 교세는 빠르게 증가하여 1928년에는 종성과 웅기를 비롯하여 공소가 13개에 달하였고 1929년에는 신자수가 760여 명 정도까지 되었다. 이처럼 신자수가 늘어남에 따라 다시 성당을 확장하는 한편 웅기에 공소 건물을 마련하였고, 1931년 봄에는 광산과 경흥에도 공소 강당을 마련하였다. 2대 주임 그라프 신부는 1932년 7월부터 '명악학교' (일명 해성학교)의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3월 19일에 완공한 후 학생들을 모집하였고, 1932년 말에는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1935년 10월에 완공하였다. 또한 1934년 8월부터는 지하와 1층에 집회실과 소년 회관, 여학생 재봉실, 주방을 갖춘 사제관(지하 2층, 지상 2층)을 신축하여 성당과 함께 완공하였고, 1935년 10월 27일 사우어 주교의 주례로 성당의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이어 1936년 10월에는 원산 수녀원의 분원을 설치하여 전교 및 명악학교의 교육을 담당하도록 하였으며, 나남 본당을 분할하여 나진 · 웅기 · 나남 지역을 이관하였다. 3대 주임 치머만 신부와 4대 주임 파렌코프 신부가 사목하던 1930년대 후반~1940년대 초반에는 일제의 교회 탄압이 가중되면서 많은 제약이 있었지만, 교세는 계속 증가하여 1945년에는 계림 본당이 분할되었다. 그러나 그해 8월 23일 파렌코프 신부가 소련군에 의하여 피살되면서 회령 본당의 주임 신부 자리는 공석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1949년 1월 구대준 신부가 회령 본당과 계림 본당의 주임 신부로 부임하여 다시 본당이 부활하였으나, 원산 수녀원에 피정을 지도하러 갔던 구 신부가 5월 10일 덕원 수도원의 독일인 신부 · 수사들과 함께 체포되어 평양 감옥에 수감된 이후 행방을 알 수 없게 됨으로써 회령 본당은 침묵의 교회로 남게 되었다. ( → 구대준 ; 그라프 ; 원산 대목구 ; 함흥교구)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全元燮, <성 분도교 담임 이후>, 《가톨릭 연구》, 1936. 91 백 브레트, 임충신 역, 《원산에서 북간도까지》,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1970/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어 자료집》,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사업회, 1989/ 一, 《원산교구연대기》,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사업회, 1991/ 一, 《함경도 천주교회사》,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사업회, 1995/ 《뮈텔 문서》, 베르모렐 신부의 1897년 4월 19일자 서한,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Chronik. 1927년 Nr. 4, pp. 42~46. 〔金가람〕
회령 본당
會寧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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