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주의

懷疑主義

scepticismus · skeptic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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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인식 능력은 주관적이거나 상대적일 뿐이므로 그것을 통해서는 보편타당한 진리를 얻을 수 없다고 보는 사상적 경향 혹은 학설.
초기 철학자들은 외부 세계에 대한 인식에 열중하여, 인식하는 정신 자체의 능력에 대해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감각과 지각의 불완전함이 드러나고 진리에 대한 철학자들 사이의 이견이 심화되면서 독단적인 진리 이론들이 난립하게 되자, 점차 인식의 확실성이 의심받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더 나아가 진리의 절대성을 부인하고 학문의 성립도 불가능하다는 주장까지 낳게 되었다. 회의주의는 철학사에서 큰 세력을 이루었으며, 때로는 독단적인 지식 체계에 맞서 인간 정신을 계몽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종 류〕 회의주의는 두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방법적 회의주의로, 기존의 모든 관념이나 학설을 근본적으로 의심해 보는 과정을 통해 더 이상 의심할 수없는 어떤 확실한 근거인 제1 원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토대로 새로운 진리 체계 내지 학문 체계를 세우려는 태도이다. 다른 하나는 절대적 회의주의로, 보편타당한 진리 자체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또는 설사 그러한 것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진리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태도이다. 이것이 이른바 본래적 회의주의이다. 그러나 모든 진리 인식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태도는 자기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의심스럽다면 모든 진리 인식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자기 자신의 주장 또한 의심스러운 것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예는 이것을 잘 보여 준다. 어떤 크레타 사람이 "크레타 사람들은 언제나 거짓말쟁이"라고 주장하였다(디도 1, 12). 그런데 이러한 주장을 한 당사자 또한 크레타 사람이었기 때문에 만일 그가 한 말대로 모든 크레타 사람이 언제나 거짓말을 한다면, "크레타 사람들은 언제나 거짓말쟁이"라는 그의 말도 거짓말이 된다. 따라서 이 사람은 자신의 주장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게 된다. 이 예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철저한 회의주의는 사실상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철학사에서 나타나는 모든 회의주의는 실생활의 모순을 완화하기 위한 판단 중지(epoche) 이론으로 나타나거나, 절대적 진리의 인식 가능성은 부정하지만 개연적 진리의 인식 가능성은 인정하는 태도인 개연론으로 나타나곤 하였다. 또 이러한 회의주의는 윤리와 종교 분야에 적용되어 도덕적 규범이나 종교적 체험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윤리적 회의주의 혹은 종교적 회의주의로 발전되기도 하였다.
〔역 사〕 회의주의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철학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소크라데스(Socrates, 기원전 470/469~399)와 동시대의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기원전 485?~410?)의 '인간은 만물의 척도' 라는 말에서, 그가 절대적 진리의 가능성을 의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소피스트인 고르기아스(Gorgias, 기원전 483~375)도 진리의 존재와 그 인식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회의주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잘 알려진 것처럼 소크라테스, 플라톤(Platon, 기원전 428/427~348/347),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83~322/321)는 소피스트들의 회의주의에 맞서 참된 지식 및 학문의 가능성을 역
설하였다.
그 후 에피쿠로스(Epicuros, 기원전 341~270)와 스토아학파의 시대를 거쳐 회의주의 시대가 성립되었는데, 크게 초기, 중기, 후기의 세 시기로 구분된다. 회의주의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피론(Pyrrhon, 기원적 360?~272?)의 학설은 피론주의(Pyrtominim)라고 하여 회의주의의 대명사로 사용될 정도로 유명하다. 그는 인간은 실제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절대로 인식할 수 없고 오직 나타난 대로의 사물만을 알 수 있을 뿐인데, 이 나타난 것들(현상)은 주관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단정하였다. 이러한 주장이 낳은 결과는 판단 중지이며, 이는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 이상적 상태(Apathie)의 추구와 연결되어 있다. 결국 이러한 사상은 혼란한 현실 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고자하는 염원과 관련되는 것이다. 중기에 속하는 사상가로는 아르케실라우스(Arcesilaus, 기원전 316?~241?)와 카르네아데스(Carneades, 기원전 213~129)가 있다. 이들은 특히 스토아 학파가 주장했던 신의 존재 및 그 섭리와 정의에 대한 논증들을 공격하였으나, 실천 분야에 있어서는 개연적 지식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비판과 회 의의 결과 역시 판단 중지였다. 그런데 이 개연적 지식(객관적 진리는 아니지만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 즉 단순히 그렇게 믿어지는 것, 그렇게 믿어지면서 모순이 없는 것, 그렇게 믿어지고 모순이 없으며 여러 측면에서 검증된 것 등이다. 이것은 흡(D. Hume, 1711~1776)의 믿음(belief)과 검증(proof)에 관한 언급을 연상시키는데, 실제로 흄은 이들 아카데메이아(Akade-meia) 학파의 회의주의와 관련이 깊다.
후기의 신(新)회의주의 시대에 이르자 회의주의는 극단적 경향을 띠게 되며, 이에 절대적 회의주의가 등장하였다. 그 가운데 아이네시데모스(Ainesidemos, 기원전100~40)는 판단 중지의 10개조를 들어 감각의 무능력과 진리의 상대성을 논증하였다. 10개조는 인간의 감각과 지각이 다음 열 가지의 경우에 각기 상이한 결과를 나타낸다는 점을 예시한 것이다. ① 쾌락과 고통 혹은 손해와 이익의 관점에서 본 생명체들의 상이성, ② 신체적 구성의 특수성에 따른 인간 본성의 상이성, ③ 감각 기관에 따른 인상의 상이성, ④ 건강이나 질병 또는 기쁨이나 슬픔 등 심신의 상태에 따른 상이성, ⑤ 자기가 속한 사회의 전통이나 관습에 따른 상이성, ⑥ 공기, 빛, 액체, 고체 등의 영향에 의한 상이성, ⑦ 시간적 · 공간적 제약에 따른 상이성, ⑧ 양적 · 질적 상태(따뜻함, 차가움, 빠름, 느림 등)와 관련된 상이성, ⑨ 경험의 지속이나 반복 내지 희소성에 따른 상이성, ⑩ 서로 상대적인 비교의 정도에 따른 상이성 등이다. 그 후 서기 1~2세기에 활동한 그리스의 철학자 아그리파(Agrippa)는 아이네시데모스의 10개조를 5개조(의견의 불일치, 논증의 무한성, 감각의 상대성, 전제의 불확실성, 추론의 순환)로 요약하여 확실한 지식의 불가능성을 역설하였다. 2세기 말경에 활동한 그리스 철학자 섹스투스(Sextus Empiricus)가 그리스의 회의주의 이론을 종합 · 설명한 《피론주의 개관》(Hypotyposees, Out-lines of Pyrrhonism)은 이후 근대 회의주의의 중요한 전거가 되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지배한 중세에는 회의주의 사상이 나타날 여지가 적었으나, 간혹 종교를 옹호할 목적으로 회의적 사고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Hipponensis, 354~430)도 한때 마니교(Manichae-ismus)에 빠져 진리 자체를 의심한 적이 있다. '우리는 확실한 진리를 발견할 수 없고 또 그런 것은 원래 있을수 없기 때문에 차라리 억견(臆見, doxa)으로 이해하는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억견이 상대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신아카데메이아 학파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고 그는 생각하였다. 사실 아우구스티노는 전 생애에 걸쳐 절대적 진리의 가능성을 추구하였다. 그는 고대 철학의 방식처럼 초월적 진리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후에 데카르트가 그랬던 것처럼) 인간의 의식에 주어져 있는 직접적이고 분명한 사실들로부터 출발하였다.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대상에 관해서는 의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가 살아 있고, 기억하고, 바라보고, 의욕하고, 생각하고, 알고, 판단한다는 것을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바로 그가 의심하는 순간이야말로 그는 살아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의심하고 있는 대상에 대해 의심할 수는 있을지라도, 자기가 의심하고 있다는 이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을 할 수가 없다.' 그는 또 '내가 방황할 때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고 말하였다. 이리하여 아우구스티노는 새로운 종류의 진리, 즉 의식의 진리를 발견하였으며, 자신이 회의주의를 원리적으로 극복하였다고 믿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접어들자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교리와 신앙에 반발하고 불신하는 경향이 심해지면서 회의주의가 다시 부활하였다. 특히 당시의 새로운 과학과 발명의 성과에 영향을 받은 사상가들은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세계관과 새로운 과학적 세계관 사이에서, 인간이 참으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였다.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는 이른바 '방법적 회의' 를 통해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을 확립하려 하였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면서도 이 의심하고 있는 자아의 존재만은 의심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나는 모든 것들이 다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당장 그렇게 생각하는 내가 필연적으로 그 어떤 것' 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라고 하는 진리는 너무나도 확고하고 확실하기 때문에, 회의주의자들의 지나친 의견도 이 진리를 뒤흔들 수는 없다. 나는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거침없이 이 진리를 내가 찾고 있던 철학의 제1 원리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18세기에 흄은 로크(J. Locke, 1632~1704)의 경험론을 극단으로 밀고나가 회의주의의 파국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인간의 인식 능력은 경험의 영역을 넘어서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인과 법칙을 부정하고 인식과 행위에 있어 이성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칸트(I. Kant, 1724~1804)에게서도 회의주의적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 그는 흄의 문제 의식을 받아들여 인간의 인식을 경험의 범위 안으로 제한하였으며, 경험의 범위 안에서도 사물 그 자체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현상만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한편으로 볼 때 경험할 수 없는 대상을 인식하려 하는 이성의 월권을 경계하는 데 그 뜻이 있다고 하겠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인식의 절대성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19세기에는 실험과 관찰을 토대로 한 과학적 방법이 널리 적용되면서 실증주의(positivism)와 유물론(mate-rialism)이 득세하고, 이에 모든 현상은 불변하는 자연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독단론(과학 지상주의, 유물론적 환원주의)이 성행하였다. 그래서 19세기 말부터는 이러한 독단론에 대항하여 반(反)주지주의(생의 철학, 실존 철학), 심리주의, 역사주의, 실용주의 등의 회의주의적 사조가 다시 등장하였는데, 이러한 사상들은 모두 과학 적 이성 만능주의를 비판하였다.
〔평 가〕 회의주의는 독단적 사상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나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것은 한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 종교, 이데올로기에 맞서서 참된 진리 혹은 올바른 길을 찾아내려는 비판적 지성의 발로라 할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학문과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회의와 비판이 극단으로 치우쳐 절대적 회의론, 불가지론, 윤리적 상대주의 내지 무정부주의로 나아감으로써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점도 간과할수 없다. (→ 개연론 ; 상대주의 ; 에피쿠로스 ; 의심 ; 흄)

※ 참고문헌  Joachim Ritter . Karlfried Grunder herg. von, Historisches Worterbuch der Philosophie, Bd. 9, Basel, 1995/ Edward Craig ed., Encyclopedia of Philosophy, vol. 7, New York · London, 1975. 〔朴贊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