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

會長

〔라〕Catechis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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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원 본당 공소 회장 피정 기념(횡성, 1937.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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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원 본당 공소 회장 피정 기념(횡성, 1937. 3. 21)

신자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본당 신부를 보좌하고 교우들과 신부 사이의 중계 역할을 하며, 신부가 없을 때에는 신부를 대신하여 교회 일을 담당하던 사람. 한국 천주교 회의 초기 때부터 존재하였으며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1752~1801) 신부에 의해 제도화되었다.
회장들은 박해 시대 때 교회를 유지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신앙의 자유기를 거치면서 체계화되어 1923년 《회장직분》(會長職分)이 간행될 즈음에는 한국 교회의 고유한 제도로 확립 · 정착되었다. 회장을 표현하는 라틴어 '카테키스타' (Catechista)는 본래 교리 교사를 의미한다. 그들은 신대륙과 동방으로 복음이 전파되면서 그 역할이 확대되어 사제가 없는 신자 공동체의 책임을 맡게 되었고,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회장이라는 칭호로 불렸다.
〔역 사〕 한국 교회의 회장이라는 명칭과 언급이 처음 나타난 기록은, 1797년 8월 15일자로 구베아(A. de Gouvea, 湯士選, 1751~1808) 주교가 사천교구장인 생 마르탱(Jean Lidier de Saint-Martin, 1743~1801)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인데, 여기에서 최인길(崔仁吉, 마티아, 1765~1795)을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1756~1801)이 임명한 최초의 회장 중 한 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어 1801년에 작성된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 1775~1801)의 〈백서〉(帛書)에는 최창현(崔昌顯, 요한, 1759~1801) 을 총회장으로,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 1760~1801)을 명도회장(明道會長)으로, 강완숙(姜完淑, 골롬바, 1760~1801)을 여회장(女會長)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이 외에 내포의 정산필(鄭山弼, 베드로, ?~1799), 서울의 김승정 · 황사영 · 손경윤(孫敬允, 제르바시오, 1760~1801)도 초기 교회의 회장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 천주교회는 창설된 이래 여러 명의 회장들이 활동하였는데, 이는 주문모 신부가 지역 · 단체 · 여성 등 사목상의 필요에 따라 회장을 임명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즉 신부가 한 명뿐이었기 때문에 지방의 경우는 회장을 임명하여 신부 대신 신자들을 관리하도록 하였고, 교리 교육과 선교를 위해서 명도회와 같은 단체를 설립하여 정약종에게 맡겼으며, 여회장을 임명하여 여성 신자들을 가르치고 돌보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입국 당시 4,000명이었던 신자수가 1801년 신유박해(辛
酉迫害) 직전에는 10,000명으로 증가하였으나, 주 신부를 비롯하여 회장이었던 강완숙, 황사영, 정약종 등이 박해로 순교함으로써 조선 천주교회는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신자들은 피난한 산곡(山谷)에서 교우촌을 형성하며 신앙 생활을 계속하는 한편,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831년에 조선 대목구(朝鮮代牧區)가 설정되었고, 1833년에는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조선 선교를 담당하게 되면서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하였다.
선교사들은 입국 후 공소를 순방하면서 가는 곳마다 회장들을 임명하거나 승인하였고, 이어 어린이 대세(代洗)와 혼인, 장례, 주일과 축일의 모임, 싸움과 소송의 판단 등에 관한 규칙을 정해 주었다. 여기서 회장을 임명하거나 승인하였다는 것은 당시 교우촌이 회장을 중심으로 운영되었고, 또 기존에 교우촌을 이끌던 회장은 신부가 임명하여야 정식 회장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대세 · 혼인 · 장례 · 주일과 축일의 모임 등에 대한 규칙을 정해 주었다는 것은, 신부를 거의 만날 수 없는 교우촌의 경우 회장이 신부를 대신하여 교회 일을 처리하도록 위임받았다는 뜻이다. 당시 이러한 역할을 하던 회장으로는 서울의 이광헌(李光獻, 아우구스티노, 1787~1839) · 남명혁(南明赫, 다미아노, 1802~1839) · 박종원(朴宗源, 아우구스티노, 1793~1840) · 남경문(南景文, 베드로, 1796~1846) · 이문우(李文祐, 요한, 1809~1840), 용인의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 1796~1839), 수원 양간의 정화경(안드레아, 1807~1840), 양지 은이의 한이형(韓履亨, 라우렌시오, 1799~1846), 과천 수리산의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1805~1839), 내포의 홍병주(洪秉周, 베드로, 1798~1840) · 홍영주(洪永周, 바오로, 1801~1840) 형제 등이 있으며, 민극가(閔克可, 스테파노, 1787~1840)도 회장으로서 각지를 다니며 선교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로 3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다수의 회장들이 순교하였고, 이어 1846년 병오박해(丙午迫害)가 겹치면서 한국 천주교회는 또 한 번의 시련을 겪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페레올(J.-J.-J.-B.Ferréol, 高, 1808~1853) 주교와 다블뤼(M.N.A. Daveluy, 安敦伊, 1818~1866) 신부가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또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 신부 등 새로운 사제들이 곧이어 입국함으로써, 1850년에는 선교사들이 185개의 공소를 방문하여 성사를 줄 정도로 한국 천주 교회의 교세는 회복되었다. 이후 신자수는 계속 늘어 1865년에는 23,000명으로 증가하였는데, 이 시기의 유명한 회장으로는 서울의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1795~1866) , 배론의 장주기(張周基, 요셉, 1803~1866), 문경의 이윤일(李尹一, 요한, 1816~1867), 서흥의 김기호(金起浩, 요한, 1824~1903) 등이 있다.
한편 교세가 확대되고 공소 회장수가 증가하면서, 이들에게 합법적인 권한을 부여하고 또 회장의 직분을 충분히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교육시킬 필요성이 생겨났다. 이에 베르뇌(S.F. Berneux, 張敬一, 1814~1866) 주교는 1857년에 반포한 사목 서한 《장주교윤시제우서》(張主教輪示諸友書)에서 어린이 세례, 혼인에의 입회, 영해회(嬰孩會)의 운영 등 회장의 직무에 대해 최초로 명기하였다. 그리고《장주교윤시제우서》에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당시 회장들은 교우들을 통솔하고 신부와 신
자 사이를 연결해 주는 일을 회장의 기본 직무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어 박해 시대 때 작성된 《회장규조》(會長規條)와 1873년 중국에서 간행된 《회장규조》의 한글본에는 회장의 임명 · 덕목 · 본분에 대한 내용들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는데, 이러한 내용들은 1887년 블랑(G.-M.-J. Blanc, 白圭三, 1844~1890) 주교에 의해 법조문화되어 《한국 교회 지도서》(韓國敎會指導書, Directorium Ecclesiae Coreae)에 수록되었다. 이와 함께 블랑 주교는 선교를 좀 더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유급의 '순회 전교 회장 을 양성하고자 하였고, 이에 1890년에는 시골에서 선발된 9명의 신자가 서울에서 두세(C.-E. Doucet, 丁加彌, 1853~1917) 신부의 후원하에 공부를 하게 되었다.
1910년대에는 회장의 직분을 중점적으로 다룬 지도서들이 등장하였다. 1912년 김원영(金元永, 아우구스티노, 1869~1936) 신부가 행주 본당의 공소 회장들을 위해《회장필지》(會長必知)를 저술하였으며, 1913년에는 대구 대목구에서 《회장의 본분》을 교구의 회장 지침서로 만들었다. 그렇지만 이 책들은 행주와 대구 대목구라는 지역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고, 이에 전국적으로 통일된 회장 제도의 마련을 위해 《경향잡지》에 <회장직분>이 연재되었으며(1917~1918), 이것을 토대로 1923년 《회장직분》이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이 책에 본당 회장 · 전교 회장 · 여회장 등의 명칭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회장직분》은 당시까지 출판된 모든 지도서의 내용을 종합하고 체계화하여 저술된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한편 1954년에 간행된 《한국 가톨릭 지도서》에서도 '전교 회장' 이 '전도사' 로 바뀌었을 뿐 《회장직분》의 회장에 대한 부분이 거의 그대로 기술되어 있고 1965년에도 개정 없이 발행된 것으로 보아, 한국 교회의 회장제는 적어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이전까지는 큰 변동 없이 유지되면서 교회 발전에 기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역 할〕한국 천주교회 창설 당시부터 교회를 이끌었던 회장은 신부를 대신하여 지방의 공소를 관리하였고, 모든 신앙 활동이 비밀리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신자 관리와 함께 신자와 신부, 신자와 신자 사이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박해 시대의 한국 천주교회는 회장들에 의해 유지 ·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회장제는 '교회 지도서' 나 '회장을 위한 지침서' 를 통해 법제화, 체계화되었다.
회장에는 크게 본당 회장(本堂會長)과 공소 회장(公所會長)이 있고, 이 밖에 특수한 직무를 수행하는 전교 회장(傳敎會長)과 여회장이 있다. 본당 회장은 본당에서 신부를 보좌하며 신부 부재시에는 본당 사무를 맡아보고, 예비자 교육, 병자 방문, 냉담자 권면, 유아 세례 · 대세(代洗) · 병자성사 · 혼인성사 집전 등 신부가 위임한 직분을 수행하였다. 공소 회장은 신부를 대신하여 공소를 관리하는 사람으로 예비자 교육, 춘추 판공 준비, 공소 재산 관리, 공소 예절 주관, 공소에서의 유아 세례 · 대세 · 병자성사 · 혼인성사 집전 등을 맡아 하였다. 그리고 전교 회장(전도사)은 대외적인 선교 활동을, 여회
장은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을 주로 담당하였다.
회장에 대한 임명 및 해임권은 본당 신부와 교구장에게 있었으며, 특히 본당 신부의 의향이 중요하였다. 회장은 본당 신부와 교구장이 직접 적임자를 선출하거나 혹은 교우들의 추천이나 투표를 통해 본당 신부가 임명하였는데, 회장에 임명된 사람은 본당 신부와 교구장이 서명 날인한 임명장을 받았다. 그는 직무 수행을 위해 신덕(信德) · 열심 · 지덕(智德) · 순명 · 진실 · 지식 등의 덕행을 의무적으로 닦아야 하였으며, 매년 회장 피정을 통하여 특별한 소명을 받은 자로서의 자질을 향상시키도록 노력해야 하였다. 교우들에 대해 항상 겸손하고 양선한 태도를 취해야 하며 형제처럼 애정으로 대해야 하고, 양심에 따라 교우들의 잘못을 꾸짖고, 물리칠 것은 물리치며, 본당 신부에게 알릴 것은 알려야 하였다. 신자들은 회장에게 지도자로서 경의를 표하고, 그의 지도에 따를 것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회장에 대한 규정은 1887년의 《한국 교회 지도서》에 이어, 1914년 《대구교구 지도서》(Directorium Missionis Taikou), 1923년 《서울교구 지도서》(Directorium Missionis de Seoul), 1932년에 간행된 《한국 교회 공동 지도서》(Directorium Commune Missionum Coreae) 등의 지역 교회법에 포함되어 그 지위와 역할이 법적으로 보장되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 본당 사목 협의회 등의 제도가 도입되면서 변화를 겪었고, 그 결과 1995년에 간행된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에는 더 이상 회장에 대한 규정을 두지않고 있다. 그러나 이는 평신도의 교회 내 역할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교회 지도층의 결정으로 여겨진다. 현재 본당 사목 협의회가 본당 신부의 자문 기관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 회장을 통상적으로 '총회장' 이라 부르고 있는만큼, 총회장 또는 본당 사목 위원들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언급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또한 과거에 회장 또는 전교 회장이 하던 역할을 본당의 구역 · 반장이 하고 있는 현 상황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그들의 역할과 활동에 대한 보다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여 줄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 공소 회장 ; → 명도회 ; 《장주교윤시제우서》 ; 《회장의 본분》 ; 《회장직분》)
※ 참고문헌  《張主敎輪示諸友書》/ 《會長規條》 /《會長必知》 최루수, 《회장직분》, 성서활판소, 1923/ 《韓國가톨릭指導書》, 서울교구출판부, 1954/ 김승주, <한국 교회 지도서들을 통하여 본 공소회장의 위치와 역 할>, 대건신학대학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79/ 최석우, <한국 교회 회장의 위치와 역할>, 《교회와 역사》 246호, 한국교회사연구소, 1995. 11. [方相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