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덜린, 프리드리히

Hölderlin, Friedrich(1770~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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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덜린.

활덜린.

독일 고전주의 시대의 서정 시인.
〔생 애〕 1770년 3월 20일 슈바벤 지방의 네카어(Neckar) 강변에 있는 작은 도시 라우펜(Laufen)에서 하인리히 프리드리히(Heinrich Friedrich Hölderlin, 1736~1772)와 요한나 크리스티나(Johanna Christina Heyn, 1748~1828)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두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는 2년 뒤 재혼을 하였으나, 양아버지인 요한 크리스토프 고크(Johan Christoph Gock, 1748~1779)도 몇 년 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횔덜린 가문은 대대로 뷔르템베르크(Wurttemberg) 주의 목사와 관리들을 배출하였으며, 그의 아버지와 조부 모두 교회법을 포함한 법학 전공자로 수도원 학교의 교사로 일하였다. 또한 외할아버지는 목사였다. 이러한 가풍은 할머니와 어머니를 통해 횔덜린의 소년 시기에 강항 영향을 미쳤으며, 그가 자라난 고장인 슈바벤 지방에 팽배해 있었던 경건주의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젊은 나이에 두 번이나 남편의 상(喪)을 치루어야 했던 그의 어머니는 더욱 종교에 의지하며 큰아들인 횔덜린이 목사가 되는 것을 소원하였기에, 그는 덴켄도르프(Denkendorf)의 수도원 학교(Klosterschule)에서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마울브론(Maulbron)의 수도원 학교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이 시기에 그는 슈바벤 지방에 경건주의를 널리 보급한 성서 주석가 벤겔(Johann Albre-cht Bengel, 1687~1752)의 영향을 받았다. 본래 이 지방의 경건주의는 자연에 대해 친숙한 감정을 배양하는 특수성을 지니고 있었으나, 수도원 학교에서는 경직된 형식과 의무 이행에만 치중하였기에 다정다감한 성격의 횔덜린은 그곳에서의 엄격한 규율과 지나친 통제, 투박한 음식을 혐오하였다. 1778년 튀빙겐 사숙(私塾, 현 튀빙겐대학교 신학부)에 입학하여 1793년 그곳을 졸업한 후에도 그는 수도원 학교에서의 쓰라린 기억을 지울 수가 없어 목사가 되는 것을 망설였다.
당시 횔덜린을 지탱해 준 두 가지 정신적 지주는 자연에 대한 친숙감과 가족에 대한 배려와 소속감이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장학금을 받고 신학대학에 진학하였으며, 첫 2년 동안은 대학 규정대로 주로 철학 강의를 들으며 공부하였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클롭슈토크(F.G. Klopstock, 1724~1803), 실러(J.C.F.von Schiller, 1759~1805), 괴테(J.W. von Goethe, 1749~1832)와 같은 유명한 시인이 되려는 꿈을 갖고 틈틈이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다. 그의 동기로는 헤겔(G.W.F.Hegel, 1770~1831)이 있었고, 그 다음해에는 셀링(F.W.J.von Schelling, 1775~1854)이 입학하였는데 그들은 사상적으로 함께 어울리며 독일 이상주의 철학의 '유명한' 3인방을 이루었다. 그들은 고대 그리스 철학, 특히 플라톤(Platon, 기원전 428/427~348/347)의 철학을 섭렵하였고, 당시 사상적 대변혁을 일으키고 있던 칸트(I. Kant, 1724~1804)의 철학에 몰두하였다. 이와 연계해 스피노자(B. de Spinoza, 1632~1677)의 범신론, 즉 "자연 그 자체가 신" (Deus sive natura)이라는 지론에 심취하였다. 횔덜린은 스피노자의 비판적 합리론에 상당 부분 동조하면서도, 당대의 예리한 비평가인 야코비(F.H. Jacobi, 1743~1819)가 공박한 그의 무신론적 특징을 간과할 수가 없어 상당히 고심하였다.
횔덜린은 야코비로부터 신앙의 확신 원칙(GewiBheits-prinzip)을 받아들이고, 스피노자의 범신론을 나름대로 수정하여 자신의 특유한 자연관과 종교관으로 수용하였다. 그는 1793년 튀빙겐 사숙을 졸업한 후 종교국을 통해 목회를 하는 대신 가정 교사직을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시 작품과 여러 편의 미학적(美學的) 논문을 집필하였다. 프랑스 혁명(1789~1799)의 추이를 지켜보며 세계 평화를 갈망하고 신성한 힘들의 현현(顯現)과 하느님의 재림(再臨)을 원했던 그는 1804년경부터 정신 분열 증세를 보이다가 급기야 1806년에는 튀빙겐의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1843년 6월 7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어야 하였다.
〔작품과 사상〕 활덜린의 생전에 출판된 작품은 많지 않지만,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을 전후하여 그의 전집이 출간되었고 그의 작품에 대한 비판적 연구가 병행되어, 현재는 매우 충실하게 그의 작품 세계를 밝혀 주고있다. 그의 프로테스탄트 신앙과 사상 체계는 서한들과 시 작품들에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자신의 믿음을 내적으로는 자신의 마음(Herz) 속에서, 외적으로는 자연 계시속에서 찾았다.
횔덜린의 서한들에 나타난 그의 신앙 개념은 "우리 가슴의 근저에서 일고 있는 신선한 충동" (〈서한〉 96, 15), "부단한 노력" (〈서한〉 97, 85) 또는 "내가 소양으로 지니고 있는 가장 좋은 것"(〈서한〉 162, 24) 등으로 표현되는가 하면,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언급되었다. "하느님과 불멸에 대한 이성적인 믿음은 우리 안에 있는 저 신성한 법칙에 근거하고 있다" (〈서한〉 97, 57 이하).
횔덜린은 스피노자와 신앙을 앞세우며 그를 비판한 야코비를 통하여 자신의 신앙 개념을 정리하여, 소설 《히페리온》(Hyperion)에서 '헨 카이 판 (hen kai pan, One and All)이라는 범신론적 용어를 수용하였다. 그러나 범신론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그는 이 용어를 그리스도교의 대표적인 교리인 원죄와 최후의 심판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용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의 생동적 계시의 상징으로 사용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1799년 어머니에게 보낸 서한에서, 죽은 신앙이 아닌 "은밀하고 생동적 신앙"의 정당성을 내세우며 성경 해석상의 문자주의를 공박하였다. 그가 말한 "은밀하고 생동적 신앙"은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일 뿐만 아니라 자연에서 느끼는 생명의 신비와 결부된, 우리 밖에 있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이것은 또한 과거의 이상향을 미래에 투사하는 "아름다운 인간성의 날들"(〈서한〉 228, 14)에 대한 믿음이다. 이러한 견해는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미학적 신앙관이며 신관(神觀)이다. 당시에는 그 타당성에 대해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었겠지만, 현대에는 나름대로 신학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그리고 휠덜린에게 있어서 믿음의 또다른 측면은, 찬가인 〈평화의 축제〉(Friedens-feier)에서 잘 나타나듯이 인간의 소망과 희망이 믿음으로 변하여 다른 이들이 믿지 않는 '기적' 의 가능성을 선취한다는 것이다. 또한 〈빵과 포도주〉(Brot und Wein), 〈파트모스〉(Patmos), 〈유일자〉(唯一者, Der Einzige) 등 그의 시들에는 '평화와 질서의 정신' 에 대한 믿음이 역사 철학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 독일)

※ 참고문헌  염승섭, 《휠덜린, 삶과 문학》, 건국대학교 출판부, 1996/ -, 《휠덜린에 있어서 믿음의 의미》, 《독일 문학》 36권 1 호(통권 55집), pp. 22~39/ Friedrich BeiBner hrsg. V., Holderlin Samtliche Werke, Große Stuttgarter Ausgabe, 8 Bde., Stuttgart, Kohlhammer, 1943~1985. 〔廉承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