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고, 클뤼니의

Hugo Cluriacensis(1024~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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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우르바노 2세에 의해 봉헌된 클뤼니 성당(그림 오른쪽이 성 후고) .

교황 우르바노 2세에 의해 봉헌된 클뤼니 성당(그림 오른쪽이 성 후고) .

성인. 클뤼니 수도회(Ordo Cluniacensis)의 제6대 아빠스. 성인. 축일은 4월 29일.
1024년에 프랑스 부르고뉴(Bourgogne) 오툉(Autun) 근처 세뮈르(Semur)의 달마시오(Dalmatius) 백작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친척들 중에는 아키텐(Aquitaine)의 공작과 부르고뉴 귀족들이 있었다. 따라서 세속에서 상당한 지위를 차지할 행운을 타고난 사람인 것처럼 보여졌으나, 그는 기사가 되기에는 너무 학구적이었다. 오세르(Auxerre)의 후고 주교에게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후고는 1038년에 오딜로(Odilo Cluniacensis, 961/962~1049) 아빠스가 있던 클뤼니 수도회에 입회하여, 2년 후인 1040년에 첫 서약을 하고 1044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1048년 오딜로의 지명으로 부원장이 되었는데, 이것은 다른 수도자들보다 더 빠르게 주요 직책을 맡은 것이었다. 그는 능력과 인정이 많은 사람으로, 그가 하는 일들은 그가 순수하고 집착이 없으며 내면적 안정과 균형을 갖춘 사람임을 증명해 주었다.
1049년 1월 오딜로 아빠스가 세상을 떠나자, 후고는 클뤼니 수도회의 신임 아빠스로 선출되어 2월 22일 브장송(Besangon)의 대주교인 후고의 주례로 아빠스로의 축복을 받았다. 당시에도 클뤼니 수도회는 산하에 50개의 수도원을 거느린 매우 중요한 수도회였으나, 후고가 아빠스로 재직하던 60년 동안 더욱 확장되어 그가 죽음을 맞이하였을 때에는 이탈리아, 스페인, 영국, 프랑스 등지에 산하 수도원이 약 2,000개에 달하였다. 11세기 클뤼니 수도회의 확장은 12세기에 일어난 시토회(Ordo Cisterciensis)의 확장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이것은 후고가 아빠스로 재임하는 기간 동안 이룬 회칙의 재개정과 운영 방식의 발전으로 인한 것이며, 이로써 여러 곳에서 많은 기부를 받아 새롭고 거대한 성당과 수도원을 건축할 수 있었다. 이때 새로 세워진 성당은 1095년 10월 25일 교황 우르바노 2세(1088~1099)에 의해 봉헌되었으며, 당시 교회에서 가장 큰 성당이었다.
후고의 영향은 수도원 밖에서도 매우 컸다. 그는 아홉명에 달하는 교황의 고문 역할을 하였고, 클뤼니 수도회는 교황 레오 9세(1049~1054)와 그레고리오 7세(1073~1085)가 시작한 '그레고리오 개혁' (Reformatio Gregori-ana)을 충실하게 후원하였다. 1050년에는 성변화와 유아 세례를 반대하여 이루어진 투르(Tours)의 베렌가르(Berengar, 1010~1088) 단죄에 참여하였고, 라테란 교회 회의(1050, 1059, 1080) , 비엔 교회 회의(1050)에 직접 참석하였으며, 헝가리(1051~1052), , 툴루즈(Toulouse, 1062, 1068), , 스페인(1073)에 교황 사절로 파견되었다.
또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1056~1106) 사이의 불화를 해결하기 위한 중재 역할을 하였다. 황제의 세례 대부인 그는 토스카나(Toscana) 백작 부인이자 카노사(Canosa) 성의 소유자인 마틸데(Mathilde)와 함께 하인리히 4세에게 문서상의 약속을 요구하며, 교황의 용서를 간청하도록 설득하였다. 그 결과 3일 동안 황제가 성문 앞에서 교황의 파문 철회를 갈구한 '카노사 사건' (1077)이 일어났다. 그리고 후고는 클뤼니 수도회 소속으로 교황이 된 우르바노 2세가 추진한 제1차 십자군 전쟁(1096~1099)이 1095년의 클레르몽(Clermont) 교회 회의에서 결의되도록 하는 데에도 관여하였다.
후고는 수사들과 교회를 위해 바쁜 활동을 벌였지만, 역시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의 인간적인 면에 끌린 여러 사람들로부터 우정을 얻고, 보다 낮은 신분의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받았다. 또한 신중하고 인정이 많은 품성은 전례 거행을 관장하고 수도원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특히 도움이 되었다.
1109년 4월 29일 클뤼니 수도원에서 세상을 떠난 그의 저서는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11세기 후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음은 틀림없다. 그는 1120년 1월 1일 교황 갈리스도 2세(1119~1124)에 의해 시성되었다. (→카노사 사건 ; 클뤼니 수도회)

※ 참고문헌  R. Grégoire, 7, pp. 150~151/ J. Oberste, 《LThK》 5, 1996, pp. 306~307/ D. Farmer, Oxford Dictionary of Saints, Oxford Univ. Press, 1996, pp. 236~237. [편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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