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주교. 축일은 11월 3일. 사냥꾼들의 수호 성인이자 광견병의 치유자. 네덜란드 남동부 마스트리히트(Maastricht)의 제31대 주교이며 리에주(Liege)의 초대 주교. 서부 유럽의 고원 지대인 아르덴(Ardennes)의 사도로 여겨진다.
650년경에 태어났으며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프랑스 남서부 아키텐(Aquitaine)의 공작 베르트랑(Berrand)의 장남으로, 툴루즈(Toulouse)의 왕 샤리베르트(Charibert)의 손자이며 파라몽(Pharamond, 410~426) 왕의 후손이라고 한다. 젊은 나이에 네우스트리아(Neustria) 궁에 들어가서 매력적인 몸가짐과 뛰어난 언변으로 사람들의 존경과 칭찬을 받고 높은 직위에 올랐으나, 하루종일 사냥을 하는 등 쾌락과 즐거움만을 추구하였다. 그러다가 당시 많은 귀족들과 백성들이 네우스트리아의 궁재 에브로인(Ebroin, Evrouin, 656~680/683)의 폭압과 폭정에 못이겨 아우스트라시아(Austrasia) 왕국으로 이주하자, 그도 미망인이 된 숙모와 아내인 오다(Oda)를 데리고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 피핀 2세(Pippin Ⅱ, 687~714)를 찾아갔다. 후베르토를 따뜻하게 맞아들인 피핀 2세는 얼마 후 그를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의 기사단장으로 임명하였고, 그는 점점 더 사치와 거짓과 공허함이 가득한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이 같은 허식과 공허함의 생활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정신적 · 영적으로 엄청난 변화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전설에 의하면 후베르토가 파스카 금요일 아침(또는 일요일)에 홀로 사냥을 하러 나갔다가 엄청나게 큰 수사슴을 발견하고 뒤를 쫓았다. 그런데 수사슴이 갑자기 돌아서서 그를 쳐다보았고, 그 모습을 본 후베르토는 깜짝 놀랐다. 사슴의 뿔 사이에 십자가가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수사슴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베르토, 만일 네가 지금 당장 주님께 돌아가 거룩한 삶을 살지 않으면 너는 즉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후베르토는 말에서 뛰어내려 주님께 경배드리고 맹세하였다. "주님, 제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소리가 들려왔다. "람베르토를 찾아가라. 그가 너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 그는 즉시 마스트리히트의 주교 람베르토(Lambertus, 635?~705?)를 찾아가 그에게 영적 지도를 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아내가 죽자 후베르토는 기사단장의 직위와 모든 명예를 포기하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한 자신이 상속받을 모든 재산을 동생에게 양보하면서 어린 아들의 양육과 보호를 부탁하고, 본인은 신학 공부에 전념하였다.
사제가 된 후베르토는 교구 참사위원이 되어 람베르토 주교를 도와 교구 행정을 맡았다. 705년경 그가 주교의 조언에 따라 로마 순례 여행을 떠난 사이, 주교는 피핀의 추종자들에게 살해되었다. 주교가 순교한 바로 그 시각에 교황 요한 7세(705~707)는 전전대 교황 세르지오 1세(687~701)가 나타나서, 람베르토가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될 것임을 알리고 후임으로는 베드로 사도가 죄사함과 광견병을 치유하는 능력을 지닌 열쇠를 준 후베르토를 임명하라고 명하는 환시를 보게 되었다.
705년 주교가 된 후베르토는 람베르토 주교를 살해한 피핀에게 대항하며 순교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찾아다녔지만, 순교의 월계관을 쓰는 영광을 누리지는 못하였다. 그는 주교로서 받는 월급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단식과 기도에만 전념하며 거룩하고 정결한 목자로서의 삶을 살았기에, 항상 훌륭한 설교자라는 명성이 따라다녔으며 모든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였다.
715년에 후베르토는 람베르토의 유해를 마스트리히트에서 람베르토가 순교한 리에주로 옮기라는 내용의 환시를 보고, 이듬해에 인근 지역의 주교들과 사제들과 많은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장엄하고 화려하게 람베르토의 유해를 이장한 후 그가 순교한 자리에 성당을 세워 유품들을 보관하였으며, 다시 그 다음해에는 마스트리히트의 주교좌 성당을 리에주로 옮겼다. 이로써 람베르토의 유해를 모신 리에주의 성당은 주교좌 성당이 되었다. 당시 리에주는 아주 작은 도시였으나, 이때부터 람베르토를 수호 성인으로 모시고 그 명성을 후대에 널리 떨치게될 초석을 마련하였다.
그는 리에주에서뿐만 아니라 우상 숭배가 극심하던 아르덴의 숲 지대와 브라반트(Brabant) 등지에까지도 복음을 전파하였다.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겠다는 열망으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오지까지 찾아 나서는 그의 열정적인 선교로 이 지역에서는 차츰 우상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어느날 새 성당의 봉헌식을 거행하기위해 브라반트로 가던 도중 푸라(Fura, 현재 Tervueren)에 이르렀을 때,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환시를 보고, 고별 강론을 겨우 마친 후 곧 몸져 누웠다. 그리고 6일 뒤인 727년 5월 30일 세상을 떠났으며, 유해는 리에주 베드로 성당의 경당에 안치되었다가 16년이 흐른 745년에 카를만(Karlmann, 741~747)과 그의 신하들에 의해 한 차례 이장되었다. 이후 825년에 오늘날 벨기에 뤽상부르(Luxembourg) 근처의 수도원으로 이장되어, 이때부터 이 수도원을 '성 후베르토 수도원' 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종교 개혁 시기인 16세기에 그의 유해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후베르토는 중세에 가장 많이 공경받던 성인이었다. 그의 이름을 딴 기사 수도회와 궁중 단체들도 있고, 신앙 서적뿐만 아니라 문학 작품 속에서도 자주 주인공으로 등장하였다.
※ 참고문헌 R. Balch, 7, 2003, p. 144/ The Benedictine monks of St.Augustine's Abbey, The Book of Saints, London, Cassell, 1994, pp. 274~2751 David Hugh Farmer, The Oxford Dictionary of Saints, Oxford Univ. Press, 1992, p. 236.[盧成起]
((Reference End))
후베르토
Hubertus(65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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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

람베르토 주교의 유해를 이장하는 후베르토 성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