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철학자.
〔생 애〕 1859년 4월 8일 오스트리아령 모라비아의 프로스니츠(Prossnitz, 현 체크의 Prostĕjob)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1870년부터 올무츠(Olmütz)의 김나지움에서 공부한 뒤 1876년부터는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천문학, 수학 그리고 물리학과 철학 강의를 들었다. 이듬해 베를린(Berlin)으로 가서 당시의 유명한 수학자인 바이어슈트라스(K. Weierstrass, 1815~1897)의 강의를 들었으며, 이어 빈(Wien)에서 계속 수학을 공부하여 변분(變分, variation) 이론에 관한 논문으로 학위를 받았다.
1884~1886년까지 브렌타노(F. Brentano, 1838~1917)의 철학 강의를 수강하면서 그의 지향성 이론에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소개로 알게 된 슈툼프(C. Stumpf, 1848~1936)의 지도하에 1887년 교수 자격 취득 논문을 완성하였다. 이후 할레(Halle) 대학의 사강사(Priatdozent)로 교수 활동을 시작하면서 논리학과 수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으며, 말비네(Malvine)와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1891년에는 교수 자격 취득 논문을 바탕으로 《산술의 철학》(Philosophie der Arithmetik)을 출간하고, 이어서 1900~1901년에 대작인 《논리 연구》(Logische Untersuchungen) 제1권인 《순수 논리학 서언》을 출간하여 괴팅겐(Göttingen) 대학의 조교수가 되었다. 당시 논리학계의 지배적 관심이었던 심리학주의를 비판하고 논리학의 토대를 반심리주의적 입장에서 정초함으로써 학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으며, 이 시기에 독일 철학, 특히 칸트(I. Kant, 1724~1804)의 철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활발한 활동을 하였지만 저술은 거의 하지 않았다.
《논리 연구》를 출간한 지 10년이 지난 후, 후설은 《로고스》라는 철학 잡지에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Philosophie als strenge Wissenschat)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1913년에는 3권으로 구상된 《순수 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Ideen zu einer reinen Phänomenologie und phanomenologischen Philosophie)의 제1권을 출간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중인 1916년에 장남이 전사하고 이듬해에는 아내 말비네도 사망하는 등, 개인적으로 힘겨운 시기를 보냈다.
1916년 신칸트 학파의 리케르트(H. Rickert, 1863~1936)의 후임으로 프라이부르크(Freibug) 대학교에 부임하였으며, 1923년에 베를린 대학교의 초청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계속 머물면서 현상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1929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Encyclopaedia Britannica)에 '현상학' 항목을 집필하였으며, 하이데거(M. Heidegger, 1889~1976)에게 프라이부르크 대학 교수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하였다. 1933년, 나치 정권은 후설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그가 대학과 맺고 있던 모든 관계를 단절시키고 공적 활동도 금지시켰으며, 하이데거가《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1927)에서 후설에게 바친 헌사를 삭제하도록 하였다. 같은 해 12월에 미국의 로스엔젤레스 대학교로부터 교수로 초빙을 받았으나 이 또한 나치 정권의 개입으로 포기하게 되는 등, 후설은 정치적 시련을 맞게 되었다. 1935년 후설은 <유럽 인간성의 위기와 철학>이라는 제목으로 빈에서 강연을 하였고, 이것이 《유럽 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Die Krisis der europäischen Wissenschaften und die transzendentale Phänomenologie, 1936)으로 보완 · 출간되었다. 그는 1938년 4월 27일 생을 마칠 때까지 강연을 계속하였다.
그의 사후에 제자인 반 브레다(H.L.Van Breda) 신부가 후설의 장서와 유고를 비밀리에 벨기에 루뱅(Louvain) 대학교로 옮겨, 현재의 '후설 문고 를 만들었다. '후설 문고 의 사본은 후설의 제자 란트그레베(L. Landgrebe)가 있던 쾰른 대학교와 핑크(E. Fink)가 있던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파버(M. Faber)가 있던 미국의 버팔로 대학교와 프랑스 파리 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다. 루뱅과 쾰른 대학 후설 문고는 그의 유고를 정리하여, 1948년부터 후설 전집인 《후설리아나》(Husserliana)를 출간하고 있다.
〔사상의 발전〕 할레 시기(1886~1900) : 빈에서 브렌타 노와 2년간(1884~1886)의 연구를 마치고 슈툼프와 연구하기 위해 할레(Halle)로 간 시기로, '전(前)현상학기' 이다. 즉 후설의 현상학적 사유가 성숙되기 이전으로, 그의 현상학적 사유에 대한 지적 동기를 발견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수 개념 역시 수적 계산이라는 심적 활동의 산물로 보아 수 개념의 기원을 심리학적으로 정당화시키려는 것이 당시의 지배적 경향이었고, 후설 역시 이러한 심리학주의의 그늘에서 수학의 토대를 정초하려 하였다.
또한 이 시기는 후설이 심리학적 사유와 반심리학적 사유를 함께 경험한 동요의 시기였다. 그는 당시의 지배적 경향인 심리학주의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지만, 동시에 이를 버리지 않고서는 논리학과 인식론의 객관적 토대를 확립할 수 없다는 생각에 매우 갈등하고 있었다. 그는 브렌타노의 기술 심리학을 이용하여 수 개념이 심적 작용의 산물이라는 주관성 측면과 수 개념 자체의 객관성 측면을 함께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였지만, 후설은 여기에 머물지 않았다. 브렌타노는 '지향성' (Intentionalität) 개념으로 심적 작용의 특성을 설명하였지만, 이 개념이 아직 심리학적 연관을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간파한 후설은 자신의 지향성 개념을 정립하고자 하는 지적 충동을 가지게 되었다.
괴팅겐 시기(1900~1916) : 1890년대 말 순수 논리학의 이념을 개진하던 후설은 1901년에 괴팅겐으로 옮겨간 후, 라이프니츠(G.W. Leibniz, 1646~1716)나 볼차노(B. Bolzano, 1781~1848)와 로체(R.H. Lotze, 1817~1881)의 영향을 받아 수학의 공리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순수 논리학의 토대를 마련할 계기를 발견하였다. 그는 《논리 연구》에 논리학의 이념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이를 지향성 개념에 근거하여 분석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이 시기에 그는 인식론에 대한 현상학적 설명을 개진하였는데, 할레 시기와는 달리 수학보다는 인식 현상에 대한 분석에 초점을 맞추어 인식하는 주관의 활동과 객관적인 인식 내용 사이의 상관 관계를 지향적으로 분석하였다.
1905~1910년은 후설이 변화를 겪은 시기였다. 1904~1905년 사이에 후설은 <현상학의 주요점과 인식론>(Hauptstüke aus der Phänomenologie und Theorie der Erkenntnis)의 강연을 통해, 수학과 논리학 연구에서의지각, 기억, 상상과 같은 인식론 문제를 다루었다. 1905년 그는 '환원' 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하였으며, 1906~1907년 논리학과 인식론 강의에서 환원의 방법을 처음으로 적용하였다. 이로써 주로 노에시스(noesis)에 대한 연구에 집중하던 경향에서 벗어나 노에마(noema)에 대해 연구할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1907년 가을 학기의 한 원고에서 노에시스-노에마의 상관 관계에 대해 처음으로 분명히 언급하였다. 이 시기 동안 후설은 지각, 상상 그리고 시간과 사물 등의 주제에 대한 연구를 하여 <사물과 공간>(Ding und Raum)이라는 강의를 하였고, 지각과 상상에 대한 연구는 시간 의식의 연구로 연결되었다. 1905년 초 괴팅겐에서의 강의를 시작으로 시간 의식에 관한 강의는 계속되었다. 그의 시간 연구는 크게 두 방향으로 이루어지는데, 1909년 이전에는 브렌타노의 영향하에서 시간 국면을 내용적으로 해석하였지만, 1909년 이후부터는 시간을 '흐름' (Fluß)으로 이해하였다.
1913년의 《순수 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은 1905년에 착상한 환원의 개념을 적용하여 체계적으로 출판한, 구성의 개념과 노에시스-노에마 이론 그리고 선험적 주관성 개념을 구체화한 첫 번째 저서이다. 비록 후설 자신이 이 저서에서 '선험적 관념론' 과 '현상학적 관념론'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의식을 구성의 단초로 설정한다는 점에서는 관념론의 형태를 띤다. 그러나 환원에 의해 모든 초월적인 것이 괄호쳐지고 남은 의식이 모든 의미 구성의 단초가 되기 때문에, 심리학주의적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오해를 받을 수밖에 없음을 후설 자신도 인지하였다. 그는 《순수 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을 3부로 구상하였는데, 1913년에 제1권을 출판한 후 제2권은 1912년에 구상만 하였을 뿐 그의 생전에 출판되지 못하였다. <자연과 정신>이라는 원고에서 구성 문제를 너무 상세하게 다룬 결과 현상학과 자연 과학의 관계를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출판이 유보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제3권은 현상학과 자연 과학의 관계에 관한 내용이다.
프라이부르크 시기(1916~1928) : 후설은 1916년 봄 프라이부르크로 옮긴 후 1928년까지 교수 활동을 하였다. 이 시기는 그의 사상이 무르익는 전성기였으며, 괴팅겐 시기 동안 정립하고 발전시킨 여러 생각들이 보다 심화된 시기로, 새로운 통찰의 시도보다는 1905년부터 착상한 여러 구상들 하나하나를 완성해 간 시기였다. 즉 할레 시기에 구상한 반심리학주의, 의미의 이념성, 인식과 진리론 환원, 구성 이론, 시간 의식 이론, 근본적 정초 이념 그리고 선험적 주관성 개념 등을 철저화시키는 시기였다. 프라이부르크 시기에는 역사 문제, 상호 주관성 문제, 발생적 구성 문제, 선험 논리학의 이념, 생활 세계 개념 등과 같은 주제들이 발견되지만 이 주제들은 이전의 주제들을 심화 · 확장시키는 것일 뿐 근본적인 변화는 없다. 즉 할레 시기의 정태적 현상학을 발생적 현상학으로 더욱 철저화시킨 시기였다. 이 시기 동안 나타나는 몇 가지의 변화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 보편적 환원의 현상학 : 괴팅겐 시기에 출판된 《순수 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의 제1권에 의하면 현상학적 환원은 절대적으로 확실한 원리로서의 의식을 위한 데카르트적 환원이었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적 전제, 즉 모든 것은 의심해도 의심하고 있는 의식만큼은 의심할 수 없다는 전제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의식이 세계의 확실성에 비해 명증적인 영역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지평 속에 있을 뿐이다. 즉 아무리 생생하게 현전하는 명증적인 의식이라 하더라도 그 의식 자체는 이미 현전하지 않는 것으로 흘러가 버리고 또한 이 현전하는 의식의 저변에는 어두운 과거의 지평들이 침강되어 있다. 이처럼 의식은 항상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에, 한순간의 명증적인 의식을 포착하려는 환원은 근본적으로 포기될 수밖에 없다. 결국 이 현전하는 의식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지평 지향성에로의 환원이 요구된다. 후설은 《제일 철학》(Erste Philosophie, 1923~1924)에서 이 환원을 '보편적 환원' 이라고 하였다.
② 선술어적 경험의 현상학 : 프라이부르크 시기 동안 후설은 여러 차례 논리학 강연을 하였다. 괴팅겐 시기의《논리 연구》는 주로 논리학의 학적 타당성을 정태적인(statisch) 관점에서 정초하는 것이었으나, 프라이부르크 시기의 논리학은 발생적(genetisch) 분석으로 이어졌다. 즉 논리적 개념의 발생적 토대가 되는 선술어적(vorprädikativ) 경험에 대한 분석을 하였다. 그래서 능동적이고 술어적인 판단의 기제인 수동적 종합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을 하여 《논리 연구》의 정태적 입장을 발생적으로 보완 · 발전시켰다. 이 시기의 논리학 강연들은 《수동적 종합의 분석》이라는 제목으로 편집 · 출판되었다. 《경험과 판단》 역시 주제는 같다. 특히 《형식 논리학과 선험논리학》(Formale und transzendentale Logik, 1929)에서는, 아무리 추상적인 형식 논리학이라 하더라도 논리적 개념들은 이미 세계에 관련되어 있음을 강조하였다. 즉 논리학의 존재론적 해명을 자신의 선험 논리학 주제로 삼았다. 후설은 이 선험 논리학을 칸트적 의미의 '선험적 감성론' (transzendentale Ästhetik)이라고 하였다.
③ 상호 주관성의 현상학 : 이 시기 동안 후설이 집중한 또 하나의 주제는 상호 주관성의 구성 문제이다. 환원과 선험 철학을 철저화시키는 과정에서 부딪칠 수밖에 없는 문제가 선험적 유아론이다. 이 유아론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는 중요한 문제가 《데카르트적 성찰》(Méditations cartésiennes, 1931)의 <다섯 번째 성찰>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어졌다. 이는 물론 프라이부르크 시기에 와서 새롭게 부각된 문제가 아니라 괴팅겐 시기 때부터 문제화되어 온 것이었다. 그는 타자 구성의 방법인 감정 이입에 관해서 이미 괴팅겐 시기부터 언급한 바 있었다. 케른(L. Kern)에 의하면 상호 주관성에 관한 후설의 최초 연구는 1905년부터 시작되었으며, 1909년에 감정 이입에 관한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1910~1911년의 <현상학의 근본 문제>라는 강의에는 상호 주관성에 관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데카르트적 성찰》에서는 환원의 방법을 상호 주관성의 차원으로 확장시켜 구체적으로 다루었으며, 여기에서 머무르지 않고 1931~1932년의 원고에서는 이 상호 주관성의 문제를 사회적 의사 소통의 문제로 확장하였다.
④ 생활 세계의 현상학 : 《유럽 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은 후설의 마지막 저술이다. 빈에서 <유럽 인간성의 위기와 철학>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한 것은 그의 나이 76세 되던 해이며, 그해에 그는 프라하에서 네 차례의 강연을 하였다. 이 강연들이 《유럽 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의 제1~2부를 구성하였고, 제3부는 생전에 출간되지 못하였다. 《유럽 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은 출판되자마자 '생활 세계' 라는 주제 때문에 유명해졌다. 많은 사람들은 이 책이 후설 사상의 새로운 전환점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는 처녀작인 《산술의 철학》에서부터 이 생활 세계의 개념에 대한 착상을 가지고 있었다. 후설은 이 책에서 수학에 토대한 근대 과학의 의미 지반이 생활 세계임을 다시 한 번 구체적으로 해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 셀러 ; 실재론 ; 현상학)
※ 참고문헌 P. Mccormick . F. A. Elliston eds., Husserl(shorter works), Notre Dame University, 1981/ J.J. Kockelmans, Edmund Husserl's Phenomenology, Purdue University, 1994. 〔趙珠煥〕
후설, 에드문트 (1859~1938)
Husserl, Edmund
글자 크기
12권

후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