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스, 얀 Hus, Jan(1369/1370~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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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스(오른쪽)는 교황과 교회 제도에 대해 불순종하고 평신도들에게도 양형 영성체를 해 주었다.

후스(오른쪽)는 교황과 교회 제도에 대해 불순종하고 평신도들에게도 양형 영성체를 해 주었다.

체크(Ceska)의 종교 개혁자.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에서 이단으로 단죄받은 인물.
[생 애] 초기 생애 : 1370년경 보헤미아 남부 후시네츠(Husinecz)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1403년까지의 생애에 대해서는 불확실하다. 프라하티츠(Pracha-titz)에서 본당 학교를 다닌 후 1386년에 프라하 대학에 입학하여 1393년 문학사 학위를 받았고 1396년에는 문학 석사가 되었다. 1398년경부터 신학을 공부하여 1400년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1401/1402년에는 교양학부 학장, 1408년에는 신학사 학위를 받았고, 1409/1410년에 대학 총장이 되었다. 1402년부터 후스는 매주일과 축일들에 프라하의 베들레헴 경당에서 체크어로 설교를 하면서 성직 매매로 서임된, 주로 독일인들인 보헤미아의 고위 성직자들과 사적인 그리스도 신심에 대한 비판을 설교하여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
위클리프 논쟁 : 1367년부터 프라하 대학의 철학부에서는 파리와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들의 강의록이 연구되었고, 영국의 종교 개혁가인 위클리프(J. Wycliffe, 1330?~1384)의 견해와 저서들이 알려졌다. 후스는 1398년부터 위클리프의 철학적 실재론을 다루었다. 그런데 1403년에 프라하 대학 측에서는 위클리프의 사상이 확산되는 것에 반대하여, 1382년에 개최된 런던 교회 회의가 단죄한 위클리프의 24개 조항과 프라하 대학교 교수인 휘브너(Jan Hiibner)가 위클리프의 저서들에서 인용되었다고 공언한 다른 21개 조항을 단죄하였다. 논쟁의 대상은 그의 성체성사론으로, 축성 후에도 빵과 포도주의 본질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잔류설(Remanenztheomie)이었다. 이는 실체 변화(Tanssubstaniaio)를 부정하는 것이었기에 대학교 당국에서는 이 45개 조항을 설교하거나 가르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이때 후스는 위클리프의 잔류설을 옹호하지는 않았지만 논쟁의 자유를 변호하면서, 단죄된 조항 안에 위클리프의 가르침이 왜곡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12세(1406~1415)는 1407년에 프라하 대주교인 츠비네크(Zbymek)를 통하여 위클리프의 45개 조항을 다시 단죄하도록 하고 프라하 대학 교수들이 위클리프 저서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나, 후스는 위클리프의 단죄를 거부하는 편에 속해 있었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단죄를 비난하였기 때문에 결국 츠비네크 대주교는 1408년에 후스에게 설교를 금지시켰다. 그런데 1409년, 프라하 대학교에서 체크 학생들을 제외한 바이에른, 작센, 폴란드의 학생들이 대거 자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보헤미아 학생들이 강렬한 민족 감정에 편승하여 타민족 학생들에게는 투표권을 1인 1표만 주되 자신들에게는 세 표를 주어야 한다고 요구하였기 때문이었다. 보헤미아의 왕인 바출라프 4세(Vaclav, Karl IV, 1363~1419)가 당시까지 독일계 학생들이 갖고 있었던 특권을 파기하는 훈령(Kuttenberger Dekret)을 내리자 많은 교수들과 학생들이 자퇴하였고, 독일인들은 라이프치히(Leipzig)로 가서 새로운 대학교를 세웠다. 사건의 선두에 나서지는 않았으나 후스는 프라하 대학교에서 발생한 민족 운동의 공인된 지도자로서 새 체제하의 초대 총장으로 선출되었으며(1409/140), 그때부터 종교 개혁 운동의 지도자로 나서게 되었다. 1410년에 츠비네크 대주교는 피사 공의회에서 선출된 교황 알렉산데르 5세 (1409~1410)의 칙서에 따라 위클리프의 저서들을 압수 · 소각하였으며, 개인 경당에서도 일절 설교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후스가 후임 교황인 요한 23세(1410~1415)에게 설교 금지와 서적 소각에 대하여 항소하자, 츠비네크 대주교는 후스를 비롯하여 위클리프의 저서들을 넘겨 주기를 거부하는 모든 이들을 파문하였다(1410.7. 18).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스는 대주교와 교황의 칙서를 무시한 채 베들레헴 경당에서 설교를 계속하였다. 프라하의 교회들과 거리에서는 동요가 일어났으며, 프라하대학 신학부 교수들은 위클리프의 작품 여섯 권을 공식적으로 옹호하기 시작하였다. 교황 요한 23세는 후스를 로마로 소환하여 그에 대한 고소의 답변을 듣고자 하였으나, 후스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이단 심의를 맡은 콜론나(O. Colonna, 1368~1431) 추기경(후의 교황 마르티노 5세[1417~1431)은 교황의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후스를 파문하였으며, 프라하에서 금지 제재(Interdictum)가 내려졌다(1411.2). 이에 바클라프 4세는 소요를 진정시키고 자신의 영토에서 이단을 뿌리뽑기 위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이 분쟁에 가담하였다. 1411년 9월 초순에 후스는 자신이 교회의 가르침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으므로 교황청으로 출두하라는 명을 거두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교황 요한 23세에게 보냈다. 후스와 서구 대이교 : 1411년에 교황 요한 23세는 아비용 교황 그레고리오 12세(1406~1415)와 그의 동맹자인 나폴리의 왕 라디슬라오(Ladislao, 1386~1414)를 파문하며 그들을 정벌하기 위한 십자군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십자군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대사를 약속하였다. 바출라프 4세와 프라하 대학 당국은 이에 찬동하였고, 1412년 5월 대사 설교가들이 프라하에 나타나 대사 부여증인 고해성사표를 주면서 십자군을 위한 모금 운동을 시작하였다. 이때 후스는 십자군 전쟁을 비판하면서 교황에게는 그 전쟁과 대사를 연관지을 권한이 없다고 설교하였다. 그 결과 공개 토론이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동요가 일어났고, 십자군 모집과 대사 부여에 관한 교황의 두 칙서를 소각하여 거리에 뿌린 사건에 가담한 세 사람이 국왕에 의해 처형되었다. 프라하 대학 교수들, 특히 후스의 오랜 친구들이며 위클리프주의자로 1408년 교황청에 소환되었던 츠나임의 스타니슬라우(Stanillus)와 팔레츠(Stephan Paletz)는 이때부터 후스와 대립하여, 1412년에 위클리프의 45개 조항과 후스의 공적 발언에서 추려낸 6개 조항을 다시 단죄하였다. 실제로 후스의 발언 자체가 이단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열정적으로 위클리프를 지지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위클리프의 수제자라고 여기게된 것이다. 또한 그가 보헤미아 이단의 핵심 인물이라고 파악한 교황청에서는 결국 그를 배척될 파문자' (excom-municatus vitandus)로 선고하였으며, 1412년 7월 29일 금지 처벌을 받았다. 후스는 이에 대해 대응하지 않고 1412~1414년까지 프라하를 떠나 귀족들의 후원을 받으면서 체크어로 설교하며 영성과 신학적 논쟁 문제에 대한 작품들을 저술하였다.
후스와 콘스탄츠 공의회 : 세 명의 교황이 난립하는 교회의 이교 상황을 종식시키고자 콘스탄츠 공의회가 개최되었을 때,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보헤미아 왕권의 상속자였던 지기스문트(Sigismund, 1411~1437)는 보헤미아의 종교적 평화를 회복하기 위하여 후스가 공의회에 참석하여 스스로를 변호할 것을 권고하면서, 그에게 안전 통행권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에 후스는 보헤미아 개혁 운동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1414년 콘스탄츠 공의회에 출두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천명하였으나, 그가 이단으로 단죄될 경우 다시 보헤미아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은 아무도 보장할 수 없었다. 즉 그의 안전은 오직 그의 손에 달려 있었기에 콘스탄츠(Konstanz)로 가는 길은 극히 위험한 것이었다.
1414년 11월 3일 후스는 동료인 클룸의 요한(Johan-nes von Chlum), 두바의 벤철, 라천보크(Heinich Lacen-bok) 등 보헤미아 귀족들과 함께 콘스탄츠에 도착하였다. 교황 요한 23세는 후스의 파문을 철회하고 그가 시내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도록 허용하였으나, 사람들의 거부감을 유발하지 않기 위하여 공식적인 종교 예식에는 참석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였기 때문에 후스는 숙소에서 자유롭게 미사를 거행하였다. 그 사이 미카엘(Michael de Causis)과 팔레츠는 성체성사론과 관련해 '잔류론' 을 주장하며 양형 영성체가 필요하다고 가르친 점, 사제가 대죄의 상태에서 성사를 집전할 경우 효력이 없음을 가르친 점, 교회 · 교황 및 교계 제도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오류를 주장한 점, 파문과 설교 금지가 반복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설교하는 등 교회 권위를 존중하지 않은 점, 프라하 대학에서 독일 학생들이 추방당하도록 부추긴 점, 단죄된 위클리프의 45개 조항의 정통성을 옹호한 점, 성직자에 대항하여 백성들을 선동한 점 등 일곱 가지 문제를 들어 후스를 고발하였다. 결국 11월 28일, 후스는 왕명에 따라 그를 보호하던 기사들이 저항하고 왕의 호송 편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체포되어 도미니코회 수도원의 지하감옥에 감금되었다. 이에 클룸의 요한은 교황에게 항의하였으나, 교황은 자신은 아무런 힘이 없다고 하면서 건강 상태가 나빠진 후스에게 주치의를 보냈을 뿐이었다. 황제 지기스문트도 클룸의 요한이 황제의 합의를 짓밟았다는 내용의 벽보를 주교좌 성당에 붙였다는 소식을 듣고 대노하였다고 밝혔을 뿐, 어떤 사후 조치도 없이 1415년 1월 5일 후스를 상대로 소송하려는 공의회의 권한을 인정하였다. 후스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결성된 위원회는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와 카스텔라마레와 레부스의 주교들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피고에게 유리한 면책 증인들의 증언을 심문하면서도 후스의 반대자들이 낸 고발 내용에 더 큰 비중을 두었으며, 후스의 《교회론》(De ecclesia, 1412)에서 42개 조항을 뽑아 심문하였다. 당시 관습에 따라 피고인 측 변호사는 없었으며 어느 누구도 이단자의 보호자로 나설 권한이 없었다.
한편 교황 요한 23세는 공의회에서 자신의 입지가 약해졌음을 알고 1415년 3월 20일 도주하였으나 붙잡혀서 다시 콘스탄츠로 압송된 뒤, 고트리벤(Gotileben)으로 이송된 후스와 함께 그곳에 수감되었다. 이후 공의회 우위설의 정점이라 일컫는 교령 <헥 상타〉(Haec sancta, 1415. 4. 6)를 발표하고, 새로운 기반 위에서 공의회는 아이(P. d'Ailly, 1350~1420) 추기경을 위원장으로 하여 정력적으로 위클리프와 후스 문제를 다루어 5월 4일에는 위클리프의 45개 조항과 그의 저서들, 그리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이미 단죄한 260개의 조항을 다시 배척하였다. 그리고 황제의 요청에 따라 1415년 6월 5~8일에 후스에 대한 공개 심문이 프란치스코회 수도원 식당에서 이루어졌다. 후스는 위원회가 이단적 주장들이라고 새롭게 제시한 39개 조항, 특히 성체성사론과 관련된 조항들이 왜곡된 것이라 강력히 항의하였다. 그리고 이단적인 의미라는 것들을 정통 신앙으로 해석하려 하였고, 자신이 주장하지 않은 가르침에 대해서는 철회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왜냐하면 철회한다는 것은 그것들을 주장하였음을 자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그러려면 거짓 증언을 해야 하는데 이것 또한 그의 양심이 용납하지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6월 15일 공의회 제13차 총회에서는 종교 개혁가들의 영향으로 보헤미아에 널리 퍼진 양형 영성체에 대한 금지 지시가 내려졌으며, 같은 달 27일에는 공의회의 명령으로 후스의 저서들이 소각되었다. 그의 친구들과 반대자들 모두 후스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도록 애썼으며, 아이 추기경과 자라렐라(F. Zara-rella, 1360~1417) 추기경은 완화된 철회 형식, 즉 그가 전에 그런 주장을 하였음을 명백히 자인하지 않는 진술서를 제안하며 퇴로를 남겨 주려 하였지만 후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1415년 7월 6일 공의회 제15차 총회는 후스가 저서에서 인용한 30개 조항이 비가톨릭적이며 오류를 담고 있고 이단적이라며 후스를 단죄하고 이단자로 선포하였다. 그리고 그날 거행된 화형의 마지막 순간까지 철회에 대한 제의가 되풀이되었지만, 후스는 거절하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며 죽어갔다. 재는 수습되어 라인 강에 뿌려졌다. 이듬해인 1416년 5월 30일에 그의 친구인 프라하의 히에로나무스(HEroronymus, 1365?~1416)도 공의회의 단죄를 받아 화형되었다. 후스의 처형에 대해 보헤미아 민족은 공의회에 항의 편지를 보냈으며, 공의회의 결정에 따르지 않을 것을 통보하고 개혁 운동을 보호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 그들은 후스를 민족의 영웅이자 순교자로 드높이며 후스파(Hussitae)를 결성하고(Taboriten, Calixtiner 혹은 Utraquisten, Unitas Fratrum 혹은 Bohmische Briider), 후스 전쟁(1420~1431)을 일으켰다. 결국 1433년 바젤 공의회(1431~1437)에서 '프라하 협정' (Prager Kompaktaten)이 체결되어 평신도의 성혈 배령을 허용받았으나, 1462년 교황청에의해 다시 철회되었다.
[사 상] 교회론 : 후스는 자신의 신학 근거를 위클리프의 가르침에 두었다. 위클리프의 사상이 이단적이라고 공식적으로 배척하는 것을 거부하였고, 그가 때때로 오류에 빠졌으며 그가 저술한 문장들이 거짓이고 오류임을 반박하지도 않았다. 후스는 위클리프의 사상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인상을 주었으며 특히 그의 사상은 《교회론》에서 잘 나타난다. 후스에게 있어서 성서는 유일한 진리의 원천이었고, 교황이나 추기경들도 구원이 예정된 사람들이 아니라면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또한 실제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신자들은 그들의 명령이 하느님 말씀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 시험한 후에 순종하거나 불순종해야 한다. 교회는 구원이 예정된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교황은 교회의 존속을 위한 본질적인 존재가 아니며, 교회는 교황 없이도 존속할 수 있다. 교황은 가톨릭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이지만 그것이 신앙의 진리는 아니다. 교황이 예정된 사람이며 그리스도의 후계자로서 목자 직무를 행사할 경우 그는 지상 교회의 머리이지만, 그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위배되는 생활을 한다면 강도이며 위선자이고 가장 악한 반그리스도이다. 후스는 가톨릭 교회나 교황 그리고 추기경들이 믿을 교리라고 정의하고 가르치는 모든 것을 존경심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만, 그 교리가 그리스도의 법에 합당하지 않다면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교황도 교황청도 신앙의 진리에 관하여, 또한 윤리 문제에서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황의 대사 선포에 관하여 교황에게 전쟁을 벌이거나 세속 권력에 도움을 청할 권한은 없다고 주장하였으며, 죄를 사하는 권한은 어떤 인간에게도 속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따라서 교황과 가시적 교회의 무류성을 부정하고 천국의 문을 여닫을 수 있는 사제들의 권한을 배척함으로써, 후스는 서방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널리 통하던 이론을 깨뜨렸다. 결정적으로, 위클리프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교황과 교계 제도에 대하여 불순종하고 그에 대한 공격을 서슴지 않은 것이 그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단죄받은 명제 : 후스의 주장 중 단죄받은 명제는 다음 30가지이다.
1.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는 오직 하나이다. 이 교회는 구원이 예정된 사람들 전체이다. 구원이 예정된 모든 사람들의 숫자가 오직 하나인 것 같이, 보편되며 거룩한 교회도 오직 하나이다.
2. 바오로가 교회의 적이 한 행동과 유사한 어떤 행동을 하였을지라도 결코 사탄의 일원은 아니었다.
3. 저주받을 것이 예정된 사람들은 교회의 부분이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부분을 이루는 어느 누구도 결국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기 때문이고 교회를 묶는 예정된 사랑은 스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4. 신성과 인성, 두 본성은 한 그리스도이다.
5. 저주받을 것이 예정된 한 사람이 때때로 현재의 정의에 의하여 은총의 상태에 있을지라도, 그는 결코 거룩한 교회의 일부가 아니다. 그것과는 반대로 구원이 예정된 사람은 항상 교회의 일원으로 남아 있다. 비록 구원이 예정된 사람이 때때로 '예기치 않은 은총' (gratia adven-titia)에서 벗어날지라도 그는 예정된 은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6. 교회가 현재의 정의에 의하여 은총의 상태에 있는지 없는지에 상관없이, 교회를 구원이 예정된 사람들이 모인 집회로 여긴다면 교회는 신앙 조목이다.
7. 베드로는 과거에도 지금에도 거룩한 가톨릭 교회의 머리가 아니다.
8.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죄를 짓고 사는 성직자는 사제의 권한을 욕되게 하며,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이들과 같이 교회의 칠성사, 열쇠권, 직무, 검열, 관습, 전례 예식, 교회의 거룩한 일들, 성인 유해의 공경, 대사, 서품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9. 교황의 품위는 황제에게서 기원하며 교황의 임명과 제정은 황제의 권위로부터 나왔다.
10. 아무도 계시 없이 합리적으로 스스로나 다른 사람에 의하여, 그가 거룩한 개별 교회의 머리이며 또한 로마 주교는 로마 교회의 머리가 아니라고 주장하지 못한다.
11. 하느님이 로마 주교를 예정하지 않았다면 거룩한 한 개별 교회의 머리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12. 어느 누구도 품행에서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자리나 베드로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 다른 어떠한 방법으로 따른다 하더라도 그보다 더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어떠한 방법으로든 하느님으로부터 대리 권한을 받지 않는다. 이 대리 직무에는 품행과 임명하는 자의 권위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13. 만약 교황이 품행에서 베드로와 반대로 생활한다면, 그는 첫 사도인 베드로의 진실하고 명백한 후계자가 아니다. 만약 교황이 탐욕을 추구한다면 그는 유다 이스카리옷(Judas Iscariot)의 대리자이다. 마찬가지로 추기경들이 사도들의 방식대로 살지 않고 우리 주님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과 권고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다른 사도단의 진실하고 명백한 후계자가 아니다.
14. 교회 검열을 통하여 개선되어야 할 사람이 교정을 원하지 않는다면 세속 법정에 넘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확실히 대사제, 율법학자, 바리사이파들을 따르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것에서 그들에게 순종하지 않으려 하였던 그리스도를 세속 법정에 넘겼고,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누구를 죽일 권한이 없소"(요한 18, 31). 그러한 사람들은 빌라도보다 더 나쁜 살인자들이다.
15. 교회적 순종은 성서의 명백한 권위에 반대되며 교회의 사제들의 착상을 따르는 순종이다.
16. 인간 행위의 직접적인 구분은 덕이 있느냐 부도덕 하냐에 있다. 부도덕한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한다면, 그는 부도덕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덕이 있는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한다면, 그는 덕이 있게 행동하는 것이다. 범죄 또는 대죄라고 일컫는 부도덕이 부도덕한 사람의 행동들을 전반적으로 중독시키는 것과 같이, 덕은 덕이 있는 사람의 모든 행동들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17. 그리스도의 계명에 따라 살고 성서 지식을 갖고 있으며 백성을 교화할 욕망을 지닌 그리스도의 사제는 명목상의 파문을 고려하지 말고 설교해야 한다. 교황이나 어떤 고위 성직자가 임명된 사제에게 설교하지 말라고 한다해도, 수하의 사람은 순종해서는 안 된다.
18. 사제직에 들어선 사람은 누구나 위임을 통하여 설교직을 수여받는다. 그는 명목상의 파문을 고려하지 않고 이 위임받은 것을 수행해야 한다.
19. 성직자는 자신의 지위를 높이기 위하여 파문 처벌, 금지 처벌, 정지 처벌의 교회 징계를 통하여 평신도를 복종시키며, 탐욕을 늘리고, 부정을 보호하고, 반그리스도에게 길을 터 준다. 성직자의 소송에서 벼락(파문)이라 일컫는 징계들이 반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이 분명한 표지이다. 그러한 징계들을 가지고 성직자는 주로 반그리스도의 사악함을 폭로하는 이들에게 반대하는 조치를 취하며, 무엇보다도 그것들을 독점하였다.
20. 교황이 악하고 특별히 저주받을 것이 예정된 사람이라면, 그는 유다와 같이 악마이며 도둑이고 멸망할 운명에 놓인 아들이며, 교회의 일원이 아니기 때문에 거룩한 지상 교회의 머리가 아니다.
21. 예정설의 은총은 교회의 몸과 지체가 그 머리와 해체될 수 없도록 결합시키는 끈이다.
22. 악하고 저주받을 것이 예정된 교황이나 고위 성직자는 단지 명목상 목자일 뿐 참으로 도둑이며 강도이다.
23. 교황은 그의 직무에 따라 "가장 거룩하다" 라고 불려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왕도 그의 직무에 따라 "가장 거룩하다"라고 불려야 하고, 또한 고문자나 사자(使者)도 "거룩하다" 라고 불려질 것이고, 심지어 악마도 "거룩하다" 라고 불려야 한다. 왜냐하면 악마도 하느님의 직무자이기 때문이다.
24. 만약 교황이 그리스도와는 반대로 산다면, 비록 그가 직권적이며 합법적인 선거를 통하여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인간적 규정에 따라 자리에 오를지라도, 또한 원초적으로는 하느님이 한 선택에 따라 등극하는 것일지라도, 그는 그리스도를 통하는 것과는 다른 곳에서부터 등극하는 것이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하느님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권적이며 합법적으로 사도로서 선택받았지만 '양 우리의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갔기' (요한 10, 1) 때문이다.
25. 학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위클리프의 45개 명제의 단죄 항목은 비합리적이고 부당하고, 역겹게 작성되었다. 즉 항목의 어떠한 것도 가톨릭적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들 모두가 이단적이고 오류를 담고 있거나 불쾌감을 유발한다는 그들의 인용 근거는 날조되었다.
26. 유권자들이나 그들 대다수가 구두로 인간들 사이의 보편적인 관행에 따라 한 특정한 사람을 뽑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합법적으로 선택된 것은 아니고, 교회 직무 안에서 사도 베드로, 또는 다른 사도의 진실하고 명백한 후계자 또는 대리자도 아니다. 그 때문에 유권자들이 올바로 아니면 잘못 선택하였는지, 선택한 사람들의 노고를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공로를 쌓을수록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더욱 큰 권한을 받기 때문이다.
27. 항상 지상 교회와 함께 살아가는 유일한 머리만이 교회의 영적 지도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낌 새는 없다.
28. 그리스도는 괴상한 머리들 없이도 세상에 뿔뿔이 흩어진 그의 참된 제자들을 통하여 교회를 더 잘 다스리신다.
29. 교황직이 수행되기 전에, 사도들과 주님의 신심 깊은 사제들은 이미 구원에 필요한 일들 안에서 활동적 으로 교회를 다스렸다. 교황이 없다면-가능한 것이지 만-그들은 그것을 심판 때까지 수행할 것이다.
30. 대죄 상태에 있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세속의 군주, 고위 성직자, 주교가 아니다.
[평 가]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후스가 실제로 이단자였는지에 대한 문제보다는 후스와 위클리프의 교회론의 상반된 점을 찾아 구분을 짓는 데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의심의 여지 없이 후스는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았지만, 몇 가지 점에서 그보다 더 보수적이며 정통 신앙적이었다. 온건한 개혁자로서 그는 성서에 증명되지 않은 모든 것을 거부한다고 말하지 않았고, 오히려 성서와 일치하지 않는 모든 것이 교회에서 없어져야 한다고 말하였다. 사실 그는 성서에서 증명될 수 없지만 전통에 뿌리박혀 있는 성모 승천 교리에 대하여 반대하지 않았다. 또한 성인들의 전구 개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고 성인 공경을 거부하지 않았다. 단지 미신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비난하였을 뿐이다. 후스는 성사들을 공격하지 않았고 오히려 성체성사론에 대한 위클리프의 이단적인 가르침을 단죄하였으며, 영혼 구원에 없어서는 안 될 선업을 주장하였다. 또한 대죄 상태에 있으면서도 그들의 직무를 유효한 형식과 신자들에게 유용한 형식으로 행사하는 고위 성직자들과 신부들의 통치권의 적법성을 인정하였다. 그런데 어째서 후스는 장작더미 위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는가? 정치 · 종교적인 배경을 제외하더라도 간단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후스가 공의회에서 자신의 생명으로 값을 치루었다는 것이다. 콘스탄츠에서 후스에 대한 주요 고소 내용 중의 하나는 로마 교회의 수위권과 그의 보편성을 부정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클리프가 그러하였듯 후스 역시 교황청을 맹렬히 공격하는 적은 아니었으며, 그리스도교 내에서 교황직의 우위와 주교단 안에서의 수위적인 역할(primus inter pares)을 인정하였다. 참된 교회는 실제로 비가시적이기 때문에, 그의 눈에는 성령에 의해 이루어진 그리스도교 교회들의 지체들이 참된 교회의 부분이었다. 가톨릭 교회는 이 공동체에 속하며 그 안에 많은 의인들과 성인들이 있었기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지만, 결코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임을 요구할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이며 교회 일치적인 교회론은 15세기 초에는 완전히 새로운 사상이었다.
1999년 12월 17일, 대희년을 앞두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78~2005)는 후스에 대한 국제 역사학자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 특히 하벨(V. Havel, 1936~ ) 체크 대통령 앞에서 후스에게 가한 잔인한 죽음과 그로 인해 생긴 보헤미아 민족의 정신과 마음을 갈기갈기 찢은 상처와 갈등의 원인과 분열에 대해 심심한 유감을 표할 의무감을 느낀다고 밝혔다. (→ 바젤 공의회 ; 서구 대이교 ; 위클리프 ; 체크 ; 콘스탄츠 공의회 ; 후스파)
※ 참고문헌  Mag. Iohannis Hus Opera omnia, Bd. 1-22, Prag 1959~1985/ Franz Palacky, Documenta Mag. Joh. Hussi vitam. illustrantia, Prag, 1869/ F.M. Bartos · P. Spunar, Soupis pramenu k literéni cinosti M. Jana Husa a M. Jeronyma Prazskéhl, Prag, 1965/ P.de Vooght, L'hérésie dejean Huss, Löwen, 1960 : Prag, 1964/ G. Leff, Wyclif and Hus, a doctrinal comparison, 《BJRL》 60, 1968, PP. 387~410/ M. Spinka, John Hus, a biography, Prag, 1968/ J. Nechutová, M. Stepán v. Pälec und die Hus-Hiistoriograpie, Mediaevalia Bohemica 3, 1970, pp. 87~1221 J. Macek, Jean Hus et les traditions huasistes(15e~19e siecles), Pais, 1973/ R. Kalivoda, Revolution und Ideologie, derHussitismus, Köln, 1976/ A. Molnar, Jean Hus, témoin de la vérité, Paris, 1978/ 一, Der Platz des M. Johannes Hus in der europaischen Reform, Evangel. Diaspora 54, 1984 · 1985, PP. 35~621 V. Herold, Prazskd universitaa Wyclif, Prag, 1985/ F. Machilek, 《TRE》 15, Pp. 710~721/ Joseph Gill, Konstanz. und Basel-Florenz, Geschichte der ökumenisichen Konzilien, Mainz, 1967, pp. 85~106. 201~232/ 클라우스 샤츠, 이종한 역, <보편 공의회사》, 분도출판사, 2005, Pp. 177~1791 필립 샤프, 이길상 1,《보니파키우스 8세 부터 루터까지, 교회사 전집 VI),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2004, Pp. 337~3781 Hubert Jedin, Handbuch der Kirchengeschichte, Bd. Ⅲ-2, Freiburg · Basel · Wien, 1968, pp. 543~558/Jean-Marie Mayeur Hrsg., Die Geschichte des Christentums, Bd. VI, pp. 282~284. [ 黃致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