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초 후스(Jan Hus, 1369/1370~1415)의 추종자들이 남부 보헤미아(오늘날의 Česká) 지방에서 결성한 이단 분파. 이들에 의해 이른바 후스 전쟁(1420~1431)이 일어났다.
후스파의 영성은 보헤미아의 교회 개혁 운동에서 시작되어, 15세기에 십자군과의 전쟁을 치른 후 양형 영성체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보헤미아 형제회' (Böhmische Brüder)가 이룬 공동체에 널리 확산되었다. 그리고 이 영성은 16세기에 보헤미아에 전해진 프로테스탄트에 큰 영향을 끼쳐,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이후 체코슬로바키아로 독립한 지역에서 국가와 정치인들의 강요로 3백 명의 사제와 약 100만 명의 신자들이 가톨릭 교회를 떠나 후스파 교회로 옮겨 체코슬로바키아 국가 교회를 세웠으며(1920), 이 교회는 현재 체크 지방에 남아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한다면, 보헤미아 지방에서 후스파의 역사는 후스가 화형당한 1415년부터 1436년까지로 제한된다.
〔보헤미아의 교회 개혁 운동〕 보헤미아 지방에서는 후스가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이전에 이미 교회 개혁 운동을 시작한 인물들이 있었다. 먼저 프라하의 교구장인 에르네스트(Emest of Pardubice, 1297~1364) 대주교가 개혁운 동을 시도하려고 1360년 보헤미아로 불러들인 콘라트(Conrad of Waldhausen)와 그의 후임자인 요한(John Milíč, 1305?~1374)이 있다. 특히 요한은 금욕주의자였지만, 창녀들이 생활을 청산하고 바르게 살려고 할 경우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계획안을 만든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교회의 개혁을 주장하는 설교자들 가운데 첫 번째 사람으로 후스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끼쳤다. 마티아스(Mathias of Janov, +1393)는 신학이 성서적인 토대 위에 있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여 그 분야에 새로운 기원을 이룩한 신학자이며, 토마스(Thomas of Stitné, +1409)는 평신도로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일반 대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쉽고 친근한 말로, 그러면서도 생기가 넘치는 문체로 글을 쓴 영성가였다. 이상의 네 사람이 개혁 운동의 선봉에 서서 해이해진 도덕적 기준을 새로 정비하기 위해 애썼으며, 특히 성직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살았던 것처럼 생활하도록 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들은 신자들의 맹목적인 믿음과 순교 성인의 유해 거래, 미신적인 수준에 이를 정도의 대사 남용, 사람들을 현혹하는 '기적' 이 일어났다고 하여 유명해진 지역으로 몰리는 순례 행렬, 성상(聖像)과 동상(銅像)에 대한 지나친 공경, 그리고 많은 돈을 들여 화려하게 거행하는 전례 예식 등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개혁을 외치면서도 성체성사에 대해서는 큰 존경심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당시 교회의 예식에 편중하는 경향과 성직 매매로 성직자가 된 사람들에 의해 성체성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강하게 비판하기는 하였지만, 신자들이 자주 영성체를 하도록 권장하였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이 드러나는 성서에 커다란 관심을 나타내면서 설교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1400년경에 이러한 개혁 운동은 매우 강력한 대세(大勢)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 운동의 선봉에 선 사람들이 위클리프(J. Wycliffe, 1330?~1384)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서 점차 정통성에서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후스, 프라하의 히에로나무스(Hieronymus, 1365?~1416), 스트리브로(Stríbro)의 야코우백(Jakoubeck), 니콜라스(Nicholas of Dresden) 등 개혁 운동가들의 행동이 점점 과격해지자, 스타니슬라우스(Stanislaus)와 팔레츠(Stephan Paletz)처럼 개혁 운동에는 찬성하고 동참하였지만 위클리프를 이단이라고 결론내린 사람들은 보수적인 성향으로 완전히 돌아서 버렸다. 이들이 교회에 복귀하였을 때, 전자의 후스파에 속한 사람들은 더욱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면서 성직자들의 청빈을 요구하고 윤리적인 죄를 지은 사제들의 처벌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리고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자유롭게 설교할 권리를 요구하였다. 후스가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에 소환되어 프라하를 떠난 다음 야코우벡은 신자들이 양형 영성체를 하도록 하였다. 개혁 운동에서 후스가 미친 영향력은 동료들에 비해 약했지만, 그를 화형시킨 처사(1415)와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양형 영성체를 단죄한 것에 보헤미아 사람들은 분노하였다. 이 두 사건으로 개혁 운동에는 나섰지만 후스파에 속하지 않았던 사람들까지 열렬한 후스파로 변모하게 되었다. 그들이 주장하는 네 가지 혁신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제들은 그리스도가 명한 방식에 따라 하느님의 말씀을 자유롭게 설교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신앙이 있는 모든 신자들이 영성체를 할 때에는 양형 영성체로 이루어져야 한다. 셋째, 윤리적 · 도덕적으로 죄를 지은 사람들은 처벌되어야 한다. 넷째, 사제들을 포함하여 모든 성직자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살고 일하기 위하여 세속적인 재물을 소유하지 않아야 한다.
〔후스의 주장〕후스파의 정신적인 지주인 후스의 신학은 위클리프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았지만, 실제적으로는 교계 제도와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는 당시의 탐욕적이고 위선적으로 타락한 교회가 외적 · 미신적 종교심을 이용해 수입을 얻으려 하며 쇠퇴해 간다고 판단하고, 참된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는 성서, 성체성사 등이 초대 교회 때의 모습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교회론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첫째, 교회는 신자들의 모임으로서 가시적 · 신학적인 요인들을 인정한다. 둘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 그리스도와 혼인 관계에 있으며 신앙인들의 공동체는 예정된 자들의 모임이다. 셋째, 교회는 보편적이고 예정된 공동체로서 그리스도가 중심이지 교황이 우두머리가 아니다. 그리고 교회의 일치는 신앙, 덕행, 자선을 그 요소로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도 위클리프처럼 교황의 권한을 공격하면서, 로마 교회가 보편 교회라는 개념을 부정하였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아니라 단지 사도단의 우두머리였기에, 교황들은 베드로의 계승자가 아니며 교황좌는 로마 제국 황제의 한 기관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교황의 무류성(無謬性)을 거부하고, 로마 교회가 없어도 보편 교회는 가능하다고 보았다. 한편 그는 교부들을 강조하였으며, 오직 성서만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위클리프와는 달리 미사 중의 성변화와 수도자들의 서약을 인정하였다. 또한 성직자는 복음을 선포하고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며 성사 집전을 통해 모범적인 삶을 살아야한다고 강조하였다.
〔후스 전쟁〕 후스와 프라하의 히에로니무스의 죽음을 박해로 간주하여 분노한 보헤미아의 추종자들은 그들을 보헤미아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교황 마르티노 5세(1417~1431)의 간절한 호소도 듣지 않았으며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이자 보헤미아 왕권의 상속자였던 지기스문트(Sigismund, 1411~1437)의 위협마저 무시하고 무장 항거를 결정하였다. 무장 세력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종교적인 열성에서 자원 입대한 경우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세속적인 계산에 의한 행동이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도시의 노동자들, 특히 프라하의 노동자들은 귀족 가문으로부터 세력을 탈취하기 위하여 입대하였으며, 몰락 귀족들은 교회 재산을 탈취하여 부를 축적하려고 사람들을 선동하였다. 전리품을 나누어 갖기 위한 욕심에서 입대한 이들도 많이 있었다.
1420년 교황 마르티노 5세는 <위클리프파, 후스파, 그 밖의 이단자들에 대하여>라는 칙서를 발표하고 십자군을 조직해 후스파 원정을 선포하였다. 당시 후스파는 타보르 시에서 유래된 타보르파(Taboriti, Taboriten), 양형 영성체를 주장하는 양형론파(Utraguisti, Utraquisten), 어떤 우두머리도 인정하지 않는 고아파(orfaniti)들로 갈려 서로 다른 주장을 하며 심지어는 적대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지즈카(J. Žižka, +1424)의 지도 아래 하나로 단합하였다. 그들은 주로 하층민으로 구성되었으며, 성서가 보장하지 않는 모든 것을 타파해 버리자는 입장을 취하였다. 교황 마르티노 5세의 호소에 응하여 소집된 십자군은 두 차례에 걸쳐 이들을 진압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교황 에우제니오 4세(1431~1447)에 의해 세 번째로 소집된 십자군(1431)마저 이들을 진압하는 데 실패하였다. 군사적으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천재' 라는 소리를 듣던 지즈카가 사망한 후에는 프로코프(Prokop) 신부가 그 뒤를 이어 '위대한 사제' 라는 칭송을 받으며 후스파가 무적임을 알렸다. 이 전쟁은 관용 행위가 돋보이기도 하였지만 잔인무도한 전투로 기록되기도 하였으며, 15년간 지속된 전쟁으로 보헤미아 지역은 황폐해졌다. 지즈카는 "한 가지의 신성 모독죄를 처벌한다는 명목으로 수천 가지 신성 모독죄를 저지르는 전쟁"이라고 하였다.
후스파는 십자군과의 전투에서 연승을 하였으나 내부의 알력으로 붕괴되었다. 타보르파와 프라하파, 아담파와 고아파는 교황과 황제의 연합군과 전투를 치르는 사이에 서로 전쟁을 하였다. 결국 1434년 프라하파에 속한 후스파의 도움으로 황제 군대는 리파니 전투에서 후스파 중에서도 극단주의자들로 구성된 타보르파를 제압하였다.
〔분쟁의 해결〕 중부 유럽을 황폐하게 한 공포의 전쟁이 소강 상태로 접어들자, 바젤 공의회(1431~1437)는 후 스파의 주장이 교회의 가르침과 어떤 점에서 다른지를 논의하기 위해 그들을 초대하여, 1433년 초에 후스파의대표들을 성대한 예식으로 맞이하였다. 양측은 진지한 논의를 하였지만 협상은 길고 어려움이 많았다. 결국 후 스파가 협상을 포기하고 보헤미아로 돌아가자 황제는 프라하로 사절을 파견해 그들이 공의회로 돌아오도록 설득하였고, 마침내 양측은 1433년 11월 30일 '프라하 협정' (Prager Kompaktaten)을 체결하였다. 그 내용은 크게 네 가지이다. 첫째, 하느님의 말씀은 자유롭게 설교되어야 하지만 교회로부터 그 사명을 위임받은 사람에 한하여 이를 허용한다. 둘째, 평신도의 영성체는 양형 영성체로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성체나 성혈 어느 쪽이든 그리스도가 온전히 현존한다는 것을 배우고 이를 믿는 사람들에 한하여 할 수 있다. 셋째, 대죄를 지은 사람, 특히 공적인 죄를 지은 사람들은 신법과 교회법에 의해 처벌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법적으로 권위를 가진 사람에 의하여 행해져야 한다. 넷째, 교회는 재산권을 갖는다. 성직자들도 온전히 합당한 방법으로 사용하고 관리할 때에 한하여 재산을 소유할 수 있다.
후스파의 일부는 '프라하 협정' 에 찬성하였고, 타보르 파는 반대하였지만 얼마 후 전투에 패배하자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로도 조약에 반대하는 이들로 인해 분쟁은 국지적으로 계속되었으며 때로는 무력 충돌로 발전한 예도 자주 있었다. 또한 새로운 형태의 이단들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협정 체결 이후 양형론파는 평화 협상을 다시 시작하 여 1436년 7월 '이홀라바(Jihlava) 협정' 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은 프라하 협정의 내용을 모두 포함하고, 그 위에 양형 영성체, 교회 토지의 사회 환원, 보헤미아 가톨릭 교회의 독립 보장 등의 내용까지 담고 있다. 이후 보헤미아인들은 지기스문트를 자신들의 왕으로 받아들였다. 전쟁기간 동안 보헤미아 지역 교회의 재산 주인이 바뀌었고 교회 내에는 양형 영성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주를 이루었지만, 교황청 또한 이러한 현상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이로써 후스파를 제압하기 위한 전쟁은 종식되었으며 후스파가 벌였던 개혁 운동은 양형 영성체를 주장하는 신자들 사이에만 남게 되었으나, 후스의 영성은 곧이어 등장한 '보헤미아 형제회' 라는 거대한 영성 운동에서 큰 영향력을 미쳤다. 1462년, 교황 비오 2세(1458~1464)는 신자들의 양형 영성체를 완전히 폐지시켰다. (→ 바젤 공의회 ; 체크 ; 후스)
※ 참고문헌 E. Bonnechose, The Reformers before the Reformation, trad. di C. Mackenzie, Eimburg, 1844/ A. Reus, La destruction du protestantisme en Bohème, nuova ed., Parigi, 1868/ H. Hutton, A History ofMoravian Missions, Londra, 1922/ J. Müller, Geschichte der Böhomischen Brüder, 2 vols., Herrnhut, 1922~1930/ Justo L. Gonzales,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vol. 2, Nashville, Abingdon, 1971. [全壽洪]
후스파
派
〔라〕Hussitae · 〔영〕Hussi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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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

후스의 화형으로 자극을 받은 그의 추종자들은 후스파를 결성하였고, 그로 인해 후스 전쟁이 일어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