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암동 본당

厚岩洞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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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소속 본당. 서울시 용산구 후암동 38-3소재. 1949년 9월 약현(현 중림동) 본당에서 분리 설정되었으며, 주보는 예수 성심. 관할 구역은 후암동 전지역, 동자동 · 갈월동 · 남대문로 5가 일부 지역. 〔교 세〕 1953년 520명, 1970년 1,611명, 1975년 3,044명, 1980년 3,213명, 1985년 3,916명, 1990년 2,328명, 1995년 2,785명, 2000년 2,716명, 2003년 2,850명. 〔역대 신부〕 초대 임화길(林和吉) 안드레아(1949. 9~1950. 1), 2대 신인균(申麟均) 요셉(1950. 1~1953. 10), 3대 김효신(金孝臣) 마티아(1953. 10~1954. 4), 4대 방유룡(方有龍) 레오(1954. 4~1955. 9), 5대 임종구(林鍾求) 바오로(1955. 9~1958. 7), 6대 윤병희(尹炳熙) 바오로(1958. 7~1960. 5), 7대 김영식(金永植) 베드로(1960. 5~1963. 1), 8대 장대익(張大翼) 루도비코(1963. 1~1971. 5), 9대 이문근(李文根) 요한(1971. 5~1974. 2), 10대 박성종(朴成鍾) 프란치스코(1974. 3~1979. 5), 11대 김정진(金正鎮) 바오로(1979. 5~1983. 8), 12대 김윤상(金允相) 베네딕도(1983. 8~1989. 10), 13대 최서식(崔瑞植) 라우렌시오(1989. 10~1991. 10), 14대 강귀석(美龜錫) 아우구스티노(1991. 10~1996. 2), 15대 장경원(張炅源) 세례자 요한(1996. 2~9), 16대 김덕근(金德根) 요셉(1996. 9~1999. 9), 17대 오승원(吳昇原) 이냐시오(1999. 9~2004. 9) , 18대 탁헌상(卓憲相) 보나벤투라(2004. 9~현재).
해방 후 후암동 일대 신자들은 거리가 먼 약현 본당까지 가서 미사를 보는 데 많은 불편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약현 본당 보좌 신부이던 최석호(崔奭浩, 바오로) 신부가 평일에 신자 집을 방문하여 미사를 집전하곤하였다. 신자들은 후암동에 본당을 설립하고자 계획하고, 마침내 1949년 3월에 후암 성당 건립 기성회를 구성하였다. 기성회 회원들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먼저 후암동 입구인 동자동에 공소가 설치되어 8월 15일에 최석호 신부의 집전으로 첫 미사를 봉헌하였으며, 9월에는 본당으로 승격되어 초대 주임으로 임화길 신부가 부임하였다. 사목 활동이 활발해지고 신자수가 점차 늘어나서 성당 건물이 협소해지자, 임 신부는 신자들과 협의를 거듭하여 동자동 19-12(17통 3반)의 대지 300평의 적산 가옥을 매입하여 간단하게 수리한 후 1949년 12월에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2대 주임 신인균 신부는 부임 후 건물을 개조하여 성당 내부를 약 2배 정도로 넓혔다. 그러나 1950년 한국 전쟁 발발로 피난을 갔던 신 신부와 신자들이 1953년 서울 수복 후 돌아와 보니 성당은 이미 무너져 있었다. 이에 성당 인근에 위치한 음무희(陰戊喜, 체칠리아)의 집에서 임시로 미사를 드렸으며, 이후 성당 내 일부를 수리해서 낮에는 미사를 드리고 밤에는 사제관으로 사용하였다. 3대 주임 김효신 신부는 부임 즉시 성당 재건을 위해 회장단과 반장단을 정비한 후, 주일 헌금과 교무금의 대부분을 성당 재건비로 적립시켰다. 그리고 회장 및 반장들은 신자 집을 방문하여 모금을 하였으며, 김 신부 본인은 미 8군과 접촉하여 건축 자재를 지원받게 되었다. 이러한 모금과 지원으로 계획한 지 3개월 만에 성당 준공을 하게 되어 1954년 1월 24일에 공사를 완료하고, 노기남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4대 주임 방유룡 신부는 성당을 확장할 계획으로 기성회비를 거두고 있었는데, 성가 수녀회에서 운영하던 후암동 38번지 소재의 양로원을 교구에서 매각한다는 말이 나오자 1954년 11월 약간의 현금을 더하여 동자동 성당과 양로원을 교환하였다. 이에 본당이 동자동에서 현 위치인 후암동으로 이전되었고, 복자유치원도 성당 내로 전입하여 복자회 수녀들이 주일학교 교리를 담당하였다. 1955년 3월에는 목조의 낡은 성당을 철거하고 새로운 현대식 건물의 성당을 신축하기 위해 성당 신축 기성회를 결성하였다. 5대 주임 임종구 신부는 1956년 2월 15일 본당 최초의 여성 단체인 성모 성심 부녀회를 조직하여 난민들을 위한 급식소와 편물 학원들을 운영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6대 주임 윤병희 신부는 성당 신축 기금을 조성하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레지오 마리애 활동을 장려하여, 1958년 8월 15일 자비하신 모후 쁘레시디움을 시작으로 1959년 8월 19일에는 인자하신 모후 쁘레시디움, 1960년에는 파티마의 성모 쁘레시디움이 발족하였다. 그리고 학생 신자들의 활동 역시 장려하여 1959년에는 고등부 학생회와 고등부 셀(Cell)이 발족하여 성가 연습, 문학의 밤 개최, 회지 발간 등의 활동을 펼쳤다.
8대 주임 장대익 신부는 전임 신부들의 성당 신축 사업을 이어받아 1963년 9월 11일에 성당 신축 기공식을 거행하여, 이듬해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을 기해 첫 미사를 봉헌하고 이후 12월 22일에 노기남 대주교와 캐롤(G. Carroll, 安) 몬시놀의 공동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그 사이에 어머니 성가대(1964. 8)와 성 빈천시오 아 바오로회(1964. 12)도 결성되었다. 이어 유치원과 수녀원을 새로 마련하고자 1969년 5월에 낡은 유치원 건물을 헐고 7월 31일에 현대식 콘크리트 연와조 건물로 준공하여 1층은 유치원, 2층은 수녀원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9대 주임 이문근 신부는 각종 단체의 회합 장소를 만들고자 5대 주임 임종구 신부 재임기에 수위실로 지은 소규모의 목조 건물을 헐고, 1973년 7월에 건평 20평의 단층기와로 슬라브 건물을 준공하여 회관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지역 사회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1974년 2월에 야간 중학교를 설립하였다. 10대 주임 박성종 신부는 1975년 3월 23일에 본당 내 신용 협동 조합을 설립하였으며 1976년 2월에는 사제관 신축 기성회를 결성, 3월 14일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6월 20일에 준공하였다. 한편 성모 성심 부녀회는 1977년 6월 15일에 후암 에덴 노인학교를 개교하여 노인 복지 활동을 펼쳤으며, 1978년 9월 17일에는 불우한 이웃이나 가난한 교회와 공소 성직자들을 돕기 위한 단체인 프란치스코회가 발족되었다.
11대 주임 김정진 신부는 1981년부터 중 · 고등학생의 교리 공부를 격려하기 위해 교구 차원의 교리 경시 대회에 입상한 본당 학생 신자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82년에는 강사 부족 및 재정난 등으로 소극적인 운영을 해 오던 에덴 노인학교의 운영진을 대폭 개편 · 확대하여 지역 사회 노인대학으로서의 정비 작업을 완료하였다. 12대 주임 김윤상 신부는 1984년 10월 26일부터 매주 금요일 '103위 한국 순교 성인 공경 미사' 를 봉헌함으로써 순교 정신의 생활화에 노력하였으며, 1987년 8월 16~21일에는 젊은이들의 신앙 쇄신을 위해 단기 성령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14대 주임 강귀석 신부는 매년 음식 바자회를 개최하여 그 수익금으로 낙도 및 오지 어린이들의 서울 구경을 주선하여 1992년에는 거제도 어린이들을, 1993년에는 태백시 장성 지역 어린이들을 초청하였다. 그리고 1995년 6월 30일에 본당 신문인 《두덤바위》를 창간하였고, 1996년 1월 1일에는 모든 신자들을 대상으로 신 · 구약성서 완독하기를 실시하였다. 16대 주임 김덕근 신부는 1998년 6월에 성모회관 공사를 진행하였고, 17대 주임 오승원 신부는 2000년 7월에 복자 유치원 교실의 내부 공사를, 2001년 7월에는 본당 교리실 및 화장실의 개 · 보수 공사를 진행하는 등 본당 환경 개선에 노력하였다.
현재 18대 주임 탁헌상 신부가 사목하고 있는 후암동 본당은 서울역 노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배식 봉사에 참여하는 등, 지역 사회 내의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 서울대교구)

※ 참고문헌  《두텀 바위》, 천주교 후암동 교회, 1979/ 《본당 현황 사목방문자료》, 천주교 후암동 교회, 2004. 31 《가톨릭 사전》 《서울대교구 교구 총람》, 가톨릭출판사, 1984. [白秉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