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기경. 교황 사절. 교회법 학자. 동방 이교(東方離敎, Schisma Orientale)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
1000년경 신성 로마 제국의 로트링겐(Lothingen) 공국에서 출생하였으며, 1015년경 프랑스 보주(Vosgi) 산맥에 위치한 무아앵무티(Moyenmoutier)의 베네딕도회에 입회하였다. 법과 신학을 중점적으로 공부하였고, 세속적 · 영적 문제들과 동방 교회의 분열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1035~1049년 사이의 지위는 분명하지 않지만, 후에 교황 레오 9세(1049~1054)가 된 툴(Toul)의 부르노(Bruno)와 협력하였다는 것, 저술가로 명성을 얻었다는것 이 두 가지는 확실하다.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완벽하게 이해하며 교회 개혁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인물이었으므로, 1049년 10월 교황 레오 9세는 그를 로마로 불러 교황 고문단의 일원으로 임명하였다. 특히 노련한 문장가이자 법률가이며 신학자였던 그는, <거룩한 로마 교회에 관하여>라는 미완성의 논문과 《성직 매매 논박》(Libri tres adversus simoniacos, 1054~1058)을 통해 교회 정치에 대한 구상을 제시하였다. 이 저술들을 통해 강조하고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최고좌이고 사도좌인 교황직은 교회의 모든 법규의 원천이자 규범이며, 모두를 심판하지만 자신은 누구에 의해서도 심판받지 않는 최고 법정이다. 둘째, 교황과 교회의 관계는 경칩과 문, 기초와 집, 수원(水源)과 강, 어머니와 가족의 관계와 같다. 셋째,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해와 달, 영혼과 육신, 머리와 지체의 관계와 같다. 넷째, 대가를 받았든 아니든, 평신도에 의한 성직 임명을 '성직 매매' (Simonia)로 간주한다. 이로써 성직 임명권 투쟁의 신호가 울렸다. 다섯째, 사제의 결혼은 내연 관계로 그 아내는 내연의 처이며, 아이들은 법적 권리가 없는 사생아이다. 이 조치는 특히 독일에서 성직자들의 단호한 저항에 부딪혔다. 이와 같은 그의 교회 개혁안들을 실천에 옮긴 이는, 12년 후 대담한 돌파력을 보인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1085)였다.
훔베르트가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때는 1050~1061년으로 1050년 시칠리아 지역의 대주교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에 실바 칸디다의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성변화와 유아 세례를 반대한 투르(Tours)의 베렌가르(Berengar, 1010~1088)를 단죄한 것도 이때였다. 이듬해에는 베네벤토(Benevento) 지역을 교황령으로 복귀시켰다.
또한 그는 1054년 로마 교회와 동방 교회가 분열되던 동방 이교 논쟁의 중심 인물이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is)의 총대주교였던 체룰라리우스(M. Cerularius, 1043~1058)는 황제가 원하던 동 · 서방 교회의 일치에 회의를 품으며 방해하려 하였다. 사실 그는 교황의 영향력이 자신의 관할지인 이탈리아 남부로 확장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의 독자적 자치권을 강조하여 교황과의 갈등을 자초하였다. 그는 관할 지역에서 서방 전례를 거행하는 성당은 동방 전례로 바꾸어 거행하도록 명령하였고, 신경에 "성자에게서"(Filioque)를 삽입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또한 1053년 불가리아의 대주교인 레오네(Leone di Acrida)를 부추겨 서방 전례에 대한 강력한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는 편지를 쓰게 하였는데, 특히 라틴 교회의 전통을 폐지하고 누룩이 든 빵을 사용하여야 하며 사순 시기에도 복음 환호송을 노래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서방에서 주일 영성체를 준비하는 의미로 토요일에 단식하는 관례와 사제 독신제 규정을 반대하였다. 훔베르트는 그 편지를 번역하고 이에 대한 교황 레오 9세의 답신 형식으로 <그리스인들의 책략에 반대해서>(Adversus Graecorum calumnias ; 《PL》14, coll. 929~974)라는 논문을 작성하여 그의 주장에 반박하였다.
교황 레오 9세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9세(1042~1055)와 협상을 추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체룰라리우스 총대주교의 공격을 물리치기 위해 1054년 훔베르트와 아말피의 베드로(Pietro di Amalfi) 대주교, 교황청 상서 원장으로 후에 교황 스테파노 9세(1057~1058)가 된 로트링겐의 프리드리히(Friedrich von Lothringen)를 콘스탄티노플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4월 19일 교황이 세상을 떠나자 사절단의 권위가 애매하게 되어, 이들이 수행한 일들 역시 오늘날까지 논란 거리로 남게 되었다. 당시 훔베르트는 연로한 수도자인 스테타토스(Niceta Stethatos)가 작성한 항의문(《PL) 14, coll. 985~1000)에 대답하여야 했는데, 1054년 6월 24일 황제 앞에서 개최된 신학 논쟁은 그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그는, 교황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체룰라리우스 '주교' 와 그 협조자들에 대한 파문 교서(《PL) 14, coll. 1001~1004)를 직접 작성하여, 7월 16일 하기아 소피아 성당 제대 위에 올려 놓고 이틀 후 그곳을 떠났다. 사절단 일행이 황제가 마련한 셀림브라(Selimbra)에 도착하자 체룰라리우스가 선동한 폭동이 일어났고, 그들은 하루 속히 떠날 것을 강요받았다. 체룰라리우스 총대주교 또한 7월 21일 홈베르트와 그 동행들을 파문하여(《PG) 120, coll. 735~748), 동 · 서방 교회는 결정적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로마로 돌아온 훔베르트는 1056년 교황 빅토르 2세(1055~1057)가 독일로 가는 길에 동행하는 등 교황 자문직을 계속 수행하였다. 그 후 1057년 8월 5일, 옛 동료인 프리드리히가 교황 스테파노 9세로 선출되자 훔베르트는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교황은 그를 로마 교회의 대법관 겸 도서관장으로 임명하였고, 그 또한 능력을 발휘하여 교황청 법원을 지휘하고 교황의 정책 수립을 도왔으나, 1058년 3월 29일 교황이 사망함으로써 교황직은 분리되었다.
1057~1058년 사이에 훔베르트는 <성직 매매를 반대하여>(Adversus simoniacos)라는 논문(《PL) 143, coll. 1004~1212)을 저술해 성직 매매를 통해 고위 성직자가 된 자로부터 받은 서품은 무효이며, 악의 중요한 원인이 되는 평신도에 의한 성직 임명의 남용을 폐지하기 위해 성직자나 백성들로부터의 주교 선출을 강조하였다. 1059년에는 투르의 베렌가르의 주장을 논박하며 성체성사의 성변화를 변호하였다. 한편 지금까지 툴(Toul)의 대부제인 귀베르토의 작품으로 알려져 왔던 《교황 레오 9세의 생애》(Vita S. Leonis IX papae)도 훔베르트가 저술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단과 성직 매매자에 의해 집전된 성사의 가치를 부인하던 그의 신학적 극단주의는 베드로 다미아니(Petus Damiani, 1007~1072)와 충돌하여 논쟁에서 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베드로 다미아니,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더불어 11세기의 위대한 교회 인물들 중 한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다. 세속 권력으로부터의 교회 자유와 교회 개혁을 통한 교황권 강화, 로마 교회의 체제 확립을 위해 평생 노력하였던 그는 1061년 5월 5일 세상을 떠났으며, 로마의 요한 라테란 대성전에 묻혔다. (→ 동방 이교; 레오 9세 ; 체룰라리우스 ; 필리오궤 논쟁)
※ 참고문헌 H. Halfmann, Card. Humbert, ein Leben und sine Werke mit besonderer Berücksichtigung seines Traktates Libri tres adversus simoniacos, Göttingen, 1883/ L. Bréhier, Le schisme oriental du XI siecle, Paris, 1899/ A. Fliche, Le card. Humbert de Moyenmoutier, Etude sur la Réforme grégor., 《Rev. hist.》 119, 1915, pp. 47~76/ A. Fliche, Le Réforeme grégor., vol. I, Louvain, 1924, pp. 265~308/ A. Michel, Humbert und Kerularios, Quellen und Forschungen der Görresgesllche 21, 1924 : 23, 1930/ E Amann, Michel Cérulaire,《DThC》 Ⅸ, pp. 1677~1703/ M. Jugie, Le schisme de Michel Cérulaire, Echos d'Orient 36, 1937, pp. 440~447/ R. Morghen, Medioevo cristiano, Bari, 1951, Ppp 100~119/ W. Ullman, Cardinal Humbert and the ecclesia Romana, G.B. Borino, Studi Gregoriani, IV, Roma, 1952, pp. 111~127/ A. 프란츤, 최석우 역, 《세계교회사》, 분도출판사, 2001/ 한스 큉, 이종한 역, 《그리스도교 본질과 역사》, 분도출판사, 2002/ 전수홍, 《세계교회사 산책》 상, 바오로출판사, 서울 2002. [全壽洪]
훔베르트, 실바 칸디다의 (1000? ~1061)
〔Humbert a Silva Candi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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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

교황 레오 9세(오른쪽)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체룰라리우스. 둘 사이에서 훔베르트는 동방 이교 논쟁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