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테러, 미카엘

Futterer, Michae(1912~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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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 소속 한국 선교사. 신부.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수도명은 미카엘. 한국 이름은 곽미걸(郭).
1912년 8월 10일 라티스본(Ratisbon) 교구에 속한 푸르트 임 발트(Furth im Wald)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5년간 초등 교육을 받은 후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 소속 슈바이클베르크(Schweiklberg) 수도원에서 운영하던 소신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김나지움(Gymnasium) 고학년 때 파사우(Passau)의 인문계 고등학교로 옮겨 학업을 마쳤다. 1933년 3명의 동료들과 함께 슈바이클베르크 수도원에 입회하여 1년간 법정 수련을 받고 1934년 7월 11일 유기 서약을 한 후 성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철학을, 파사우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1937년 5월 10일 종신 서약을 하였고, 8월 29일 차부제(Subdiaconus)로 6명의 동료 차부제들과 함께 한국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10월 28일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 도착하여 동료들과 함께 덕원 신학교에 편입해 한국어와 신학 공부를 한 후 1939년 4월 10일 연길 수도원에서 브레허(T.Breher, 白化東, 1889~1950) 주교의 주례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41년부터 팔도구 본당 에그너(R. Egner, 王, 1906~1975) 신부의 보좌 신부로 활동하였으며, 이후 연길 대목구의 여러 본당에서 사목을 하였다. 그러던 중 중국 공산당에게 체포되어 1946년 4월부터 1952년 8월 24일까지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9월 본국의 슈바이클베르크 수도원으로 귀환하였다.
1954년 9월 19일 다시 남한으로 파견되어 왜관 수도원의 재무 담당 및 선교 총무로 일하였다. 1966년 경상북도 상주의 서문동 본당 주임을 거쳐, 1968년에 김천평화동 본당의 주임으로 11년 동안(1968. 8~1981. 2) 사목하면서 다수동, 신음동, 광천 공소 등을 설립하였고, 교리실을 신축하였다. 1981년 2월부터 구미의 원평 본당에서 사목하다가 지병인 당뇨를 치료하기 위해 그해 9월 본국으로 휴가를 떠났으나 갑자기 건강이 나빠져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생의 마지막 수년 동안을 수도원 병실에서 지내다가 1998년 6월 4일 선종하였다. 그는 병중에 있으면서도 왜관의 수도원을 경제적으로 도울 수 있는 길을 모색하였으며, 건강이 회복되어 한국으로 돌아오길 원하였다. 그의 유해는 슈바이클베르크 수도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 연길교구 ; 원평 본당 ① ; 평화동 본당 ①)

※ 참고문헌  A. Kasper · P. Berger, HWAN GAB(還甲), Miinster- schwarzach, 1973/ Chroniken aus den Mission, Der Benediktiner- Missionar von St. Ottilien, Sonderausdruck aus der Benediktiner- Kongregation von St. Ottilien, Tatsachenbericht aus dem Missionsgebiet Yenki(Mandschurei) Nr. 3., 1954/ 부산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 녀원 60년사 편찬위원회 편, 《은혜의 60년》, 부산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1995/ 주성도, 《주성도 자서전》, 분도출판사, 1993/ 韓興烈, 〈延吉教區 天主教略史〉, 《가톨릭 청년》 41호( 1936. 10)/ P.D. Drexel OSB, Necrologium congregationis Ottiliensis 2000, St. Ottilien/ Erzabtei St. Ottilien, Schematismmus 1923~1946, St. Ottilien/
Todesanzeige von Abtei St. Ottilien, 1998. 〔宣智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