휫비 교회 회의

教會會議

〔영〕The Synod of Whit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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휫비 교회 회의가 열렸던 휫비 수도원.

휫비 교회 회의가 열렸던 휫비 수도원.

앵글로 색슨(Anglo Saxon) 교회 시대에 영국 칠왕국(七王國, Heptarchy) 중 노섬브리아(Northumbria) 왕국에서 일어난 부활 대축일 계산법에 관한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664년 사순 시기에 소집된 교회 지도자들의 모임.
〔역사적 배경〕 431년에 교황 철레스티노 1세(422~432)는 로마 교회의 부제로 알려진 팔라디오(Palladius, 363/364~431?)를 아일랜드의 초대 주교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그는 세 곳에 성당을 세우고 선교에 나섰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스코틀랜드로 옮겨간 다음 곧 사망하였다. 이어 골(Gaul, 오늘날의 프랑스) 지방 오세르(Auxerre)에서 아일랜드 선교를 준비하던 파트리치오(Patricius, 389?~493)가 팔라디오의 후계자로 아일랜드에 파견되어 북부와 서부 지역에서 부족장들의 개종에 주력하여 성공하였다. 이후 그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주민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다가 북아일랜드 지방에 아마(Armagh) 교구를 설립하였다. 파트리치오가 유럽의 수도원들을 방문하며 갖게 된 수도원에 대한 애착은 아일랜드 교회를 수도원 체제의 교구로 만들었다. 6세기에 이르러 많은 수도원들이 설립되었고, 이 수도원들은 교구 행정과 본당 사목 및 선교 활동의 중심이 되어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563년에 수도회 선교사인 골룸바(Columba, Columcille, 521?~597) 신부는 12명의 동료들과 함께 스코틀랜드 서부 해안의 작은 섬 이오나(Iona)에 상륙하여 수도원을 설립하고, 이곳을 수도원들의 중심이자 선교 활동의 거점으로 삼아 주변의 섬들과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북부 지방에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를 세웠다. 그에 의해 수도자의 삭발 형태, 부활 대축일 계산, 세례 거행 예식, 성사적 참회 예식 등에 아일랜드 고유의 켈트(Celt) 전례가 도입되었다.
골룸바가 사망한 597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4)가 파견한 선교단, 즉 첼리오의 베네딕도회 수도원 원장인 아우구스티노(Augusinus Cantuariensis, ?~604/605)를 중심으로 한 40명의 수도자로 구성된 선교단이 템스 강 입구에 상륙하였다. 그들은 칠왕국 중 하나인 켄트(Kent) 왕국에서 프랑크 왕가 출신 왕비이며 신자인 베르타(Bertha)의 도움으로 국왕 에텔베르토(Ethelbertus, 560~616)의 선교 허가를 받고 복음 전파에 나서 교회를 설립하기 시작하였다. 선교가 성공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새 선교단을 파견하였고, 601년에 캔터베리(Canterbuy)와 요크(York) 대교구를 설정하였으며 아우구스티노를 캔터베리의 초대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정복자인 앵글족과 색슨족에 대한 본토 브리튼인들의 증오 때문에 잉글랜드 선교가 어려웠으나, 점차 칠왕국에도 앵글로 색슨 교회들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노섬브리아 왕국의 사정은 달랐다. 627년 로마에서 파견된 바울리노(Paulinus, 584?~644)는 국왕 에드윈(Edwin, 616~632)과 그의 여러 신하들을 개종시켰고 요크의 초대 대주교가 되었다. 그러나 632년에 에드원이 머시아(Mercia) · 웨식스(Wessex) 왕국의 연합군에게 패전하여 사망하자 바울리노는 왕비 에텔부르가(Ethelburga)와 함께 켄트 왕국으로 피신하였고, 노섬브리아의 그리스도교는 붕괴되었다. 그러나 에드윈의 조카이며 이오나 수도원에서 교육과 세례를 받은 오스왈도(Oswaldus, 604?~642)가 노섬브리아의 국왕이 되자(633~642) 그리스도교의 재건을 위해 켄트로 피신한 바울리노를 대체할 새 주교를 이오나 수도원에 요청하였다. 그래서 635년에 아이다노(Aidanus, ?~651) 수사 신부가 린디스판(Lindisfarne)에 주교좌를 설치하고 초대 교구장이 되었다. 이로써 노섬브리아 왕국에는 로마 교회의 선교가 단절되고 켈트 전통의 교회가 재건되었다.
〔토론과 해결〕골룸바의 선교로 잉글랜드에 도입된 켈트 교회 전통의 전례 관습은 로마 교회의 전통과 대립되었다. 매우 보수적인 켈트 전통은 특수한 전례 관습을 고수하였고, 로마 교회가 직접 설립한 앵글로 색슨 교회는 켈트 전통의 특수성보다는 교회의 보편적 영역을 더욱 의식하였다. 이렇게 상이한 전례 경향 탓에 켈트 교회와 로마 교회는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603년 켄터베리의 대주교인 아우구스티노는 켈트 전통의 웨일스(Wales) 주교들과의 회합에서 켈트 교회의 관습을 로마 교회의 전통에 융합시키려고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결국 켄트 왕국과 로마 교회 출신 지도자들은 켈트 교회의 부활 대축일 전례 관습은 가톨릭 교회의 보편성에 위배된다고 선언하였다. 골 지방과 이탈리아 교회의 교회 규율을 배운 로난(Ronan, +664) 주교는 아일랜드 출신이지만 로마 교회의 부활 대축일 관습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그는 토론 중에 아이다노의 후계자인 피난(Finan, +661) 주교에게 로마 교회의 전통을 따를 것을 촉구하였지만 설득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로난의 과격한 대응으로 논쟁은 격화되었다. 바울리노의 부제인 제임스(James)도 그의 제자들에게 로마 전통의 부활 대축일 관습을 준수하도록 촉구하였으나, 피난 주교를 계승한 콜먼(Colman, +676)은 아일랜드 교회 전통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부활 대축일 논쟁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한편 오스왈도를 계승한 국왕 오스위(Oswiu, 641~670)는 아일랜드 전통의 수도자들에게 교육을 받고 세례를 받았으며, 앨프리스(AIfrith) 왕자는 로마 전통의 열렬한 주창자인 리펀(Ripon)의 월프리드(Wilfrid, 634~709/710) 수도원장에게 교리를 배웠다. 결국 왕궁에서는 일 년에 두 번 부활 대축일을 거행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국왕이 사순 시기의 단식제를 끝내고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고 있는 동안 켄트 왕국의 공주로서 로마 관습을 지키던 왕비 인플레드(Eanflaed)와 왕자는 여전히 사순 시기 중의 성지 주일 예절에 참석한 것이었다. 이러한 부활 대축일 계산 문제로 인한 논쟁과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서 664년 사순 시기에 국왕은 왕자의 제안으로 힐다(Hilda, 614~680)가 수도원장으로 있는 횟비 수도원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하였다.
국왕이 주재하는 회의에 국왕과 린디스판의 콜먼 주교, 힐다 수도원장, 이스트 색슨(East Saxon)의 체드(Cedd, +664) 주교가 켈트 교회 전통의 대표로 참석하였고, 왕자와 함께 월프리드 수도원장, 웨식스의 아질베르토(Agilbertus, ?~685?) 주교가 로마 교회 관습의 주창자로 참석하였다. 국왕은 같은 유일신을 공경하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같은 전례 전통을 준수해야 한다는 말을 한 후 양측의 의견을 청취하였다. 그리고 윌프리드가 로마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천국의 열쇠를 받은 베드로가 세운 교회라는 논증에 콜먼의 동의를 받으면서 참석자들에게 "나는 천국 문을 지키는 사람에게 반대하지 않을 것이며 내 지식과 능력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여 그의 명령에 복종하려고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하느님 나라의 문에 이르렀을 때에 천국 열쇠를 지닌 사람이 나를 외면하여 천국의 문을 열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로마 교회 전통의 부활 대축일 관습을 따르도록 결론을 내렸다.
〔평 가〕 횟비 교회 회의는 몇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 이 교회 회의는 주로 부활 대축일 날짜를 다루었다. 서로 다른 계산 방법에 대한 논쟁이 주요 쟁점이었다. 부활 대축일 날짜를 상이하게 준수하는 것이 오늘날에는 물의를 일으킬 만한 문제로 판단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다. 둘째, 윌프리드의 논증은 설득력이 부족하였으나 국왕이 그리스도교에 대한 지식을 갖추지 못하여서 수용하게 되었다. 이로써 교리 지식이 없는 국왕의 결정으로 교황권에 대한 새로운 교리가 등장하였다는 비판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셋째, 국왕이 로마 전통을 지지한 사실은 영국 교회 안에서 켈트 전통이 명백히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콜먼은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자신의 교구를 떠나 이오나로 옮기는 등 일부 지역에서 교회 지도자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이는 체면 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716년에 켈트 전례의 중심인 이오나도 로마 교회의 전통을 따르기로 하였고, 곧이어 웨일스도 아일랜드 전통을 포기함으로써 전례 논쟁은 끝났다.
마지막으로 베드로 사도로부터 계승된 로마 주교, 즉 교황의 권한에 대해 부정적인 역사가들은 횟비 교회 회의의 결정만 갖고 교황권 사상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에 따르면 이 교회 회의 이전에 베드로 사도가 천국 열쇠를 쥐고 있다는 교리는 있었지만, 인간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베드로 사도가 위임받은 권한에 달려 있다는 사상은 없었다. 그들은 횟비 교회 회의의 결정으로 베드로 사도가 오스위 국왕이나 앵글로 색슨 교회와 같은 게르만 그리스도인들에게 권한을 갖게 되었듯이, 모든 사람들은 베드로 사도의 계승자인 교황에게 순명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견해가 나타났다고 강조하였다. 즉 이는 로마 교회나 고대 그리스도교 시대에는 없었던 교리로, 앵글로 색슨 교회의 선교사들을 통해 유럽의 게르만 세계에서 결실을 맺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성서적 근거와 신학적 논증을 무시하고 역사적 사실에만 의존한 견해 또는 교황권을 반대하기 위한 의도적이고 편파적 견해라고 배척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교황사(敎皇史)에 있어서 교황권에 대한 교리 발전에 공헌하였고, 교회 발전 과정에 있어서 게르만 민족의 역할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횟비 교회 회의에서 고찰되지 않은 교황권이 게르만 그리스도교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고 깨달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 아우구스티노, 캔터베리의 ; 에텔베르토 ; 영국 ; 오스왈도 ; 파트리치오)

※ 참고문헌  Henry Bettenson ed., Documents of the Christian Church, 2nd ed., London · Oxford · New York, Oxford Univ. Press, 1975/ Bede, Historia ecclesiastica gentis Anglorum(731), Patrologia Latina Tomus XCV, excuberatur et venit apud J.-P. Migne, Paris, 1861, pp. 23~288(Judith McClure · Roger Collins eds., The Ecclesiastical History of the English People, New York, Oxford Univ. Press, 1994)/ D.H. Farmer ed., The Ages of Bede, trans. by J.F. Webb, London, Penguin Books, 1988/ W.R.W. Stephens · William Hunt eds., A History of the English Church vol. 1. The English Church. From Its Foundation to the Norman Conquest by William Hunt, London, Macmillan and Co., Limiyed, 1907/ H.O. Wakeman · S.L. Ollard, An Intorduction to the History of the Church of England, London, Rivingtons, 1938/ J.R.H. Moorman, A History ofthe Church in England, 2nd ed., London, Adam & Charles Black, 1976/ Philip Hughes, A History ofthe Church vol. 2 The Church in the World the Church Created, rev. 3rd imp., London, Sheed and Ward, 1993/ Judith Herrin, The Fommation of Christendom, rep., Oxford, Basil Blackwell, Ltd., 1988/ Timothy Joyce, Celtic Christianity, New York, Orbis Books, 1998(채천석 역, 《켈트 기독교》, 기독교문서선교회, 2003)/ 김성태,《세계교회사》 I, 바오로 딸, 1995(2판), pp. 325~328. [金聖泰]